드디어 스피티 밸리 여행의 출발점인 ‘카자’ 마을에 도착했다. 내 덩치에 두 배나 되는 현준을 거의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여 일단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현준의 상태가 걱정이다.
“뭐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
“나 좀 눕고 싶어, 송.”
함께 숙소를 찾는 것은 무리이다 싶어 배낭과 현준을 식당에 부탁하고 빠른 걸음으로 찾아 나서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호텔을 예약하고 도움을 청했다. 나 또한 긴 이동시간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 아픈 친구를 끌고 올 수 없는 상황 설명을 하자 친절한 호텔 사장님이 배낭과 현준을 데리고 올 테니 걱정 말고 쉬고 있으라고 하신다. 너무 추워서 나까지 몸살이 올 것 같다. 정신없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포트에 물을 끓인다. 보글보글 끓는 사이 현준의 방으로 가서 인기척을 느꺄본다.
‘똑똑’
“현준, 괜찮아?”
“으응.”
문 사이로 힘없는 응답이 전해진다. 위풍당당 세계경제를 읊어대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마날리에서 언젠가 우리는 여행과 관광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 고난)’이야. 나는 지금 관광이 아닌 여행을 왔어. 하지만 많이 외롭고 힘든 것 같아, 괜찮다면 한동안 네 여행에 동행해도 될까?”
그날 밤 그는 마날리에서 최고 비싼 저녁을 사주었다. 한참 동생인 나에게 말하기 다소 민망했을 솔직함, 내 시간에 자신이 방해가 될까 염려하는 매너가 고마웠다.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동행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의도적으로 한동안 사람들을 피했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들이 ‘싫었다’라기보다는 집순이에 무계획 여행자인 나에게 어떤 스케줄을 기대하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준, 나는 하루종일 게스트 하우스에 박혀 책만 읽기도 하는 날라리 여행자야. 그래도 괜찮겠어?”
“나는 그런 너의 여행스타일이 너무 좋더라?”
평범했던 마날리에서의 일상을 생각하다 보니 물이 다 끓었다. 밥 먹으러 갈 힘도 없어 마날리 문라이트 호텔 사장님이 싸주신 페퍼민트 티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아마도 현준은 고산병일 것이다. 나는 고산지대인 다람살라와 마날리에서 오랜 시간 적응기가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는 고작 며칠이었다. 그의 병에 확신이 서니 없던 힘이 생긴다. 나는 호텔 식당으로 가서 뚝바(티베트누들)를 주문하고 이놈으 고산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다. 근처 병원에 산소통이 있는데 치료를 하면 좀 나아질 거란다. 당장 뚝바를 십 분 만에 해 치우고 현준을 깨워 병원으로 향했다. 산소통을 끼고 있으니 조금 나은지 오랜만에 현준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송, 네가 이래서 한국 사람들 피하는구나. 하하하”
희미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뱉어댄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호전 된 줄 알았던 그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식당에서도 통 먹질 못한다.
“아냐, 나도 고산증세인지 머리가 좀 아파서 쉬엄쉬엄 움직이면 좋겠어. 현준도 며칠 있으면 적응될 거야.”
“너한테 더는 민폐를 끼칠 수 없지. 넌 지체하지 말고 스피티 여행을 시작해. 아무래도 내가 여행고수를 한 번에 따라잡으려다 탈 난 거야.”
최선을 다해 말렸건만, 다음날 내 방 문 앞에는 현준이 한국에서 가져온 세면도구, 옷가지 등이 쌓여있다. 내게 필요할 것이라고 느껴진 생활용품들을 전부 두고 간 것이다.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오랜만에 정신적 육체적 노동에 진땀을 뺀 덕분일까, 한국산 구호물품에 감동을 받아서일까.
노트북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안심했던 내 여행사진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부터 여행의 흔적을 영구적으로 남길 방법들을 연구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이었다. 학창 시절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몇 번 탔던 재주로 끄적끄적 몇 자 적기로 한 것이 벌써 노트 한 권을 넘어섰다. 처음에는 작가 본인(나)에게 바치는 글에 가까웠지만 언제가 이 글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여행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쉼'이 되길 바라는 마음 등 내 여행과 함께 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도전적이고도 소소한 모순적 바램들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