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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피 Oct 12. 2023

바람이 분다

spiti valley

추운 날씨 때문인지 마을의 분위기 탓인지 유독 혼자인 것이 쓸쓸하다. 잠도 달아났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오늘은 많이 걸어야 하니 다리에 집중적으로 비누칠을 하고 문질 문질 한참을 풀어 다. 이틀간 정든 방을 정리하고 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을 싸서 메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다시 돌아와 만날 테니 아직 자고 있을 호텔 주인과의 작별인사도 생략했다. 해가 뜨기 전이라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갔다.


대략 세 시간을 걸으면 키 곰파에 도착할 것이다. 로컬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 할 버스 시간표도 없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걸어보자 싶었다.


스피티밸리는 북서쪽은 라다크 레(Leh)로 가는 잠무 카쉬미르(Jammu  Kashmir)와 맞닿아 있고, 북동쪽은 티베트(Tibet)와 연결되어 있는 고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높은 고도 탓에 초록색을 띈 생명을 찾아볼 수 없어 얼핏 보면 사막에 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청정지역인 이곳에서만 허락된 밤하늘, TV속 드라마에서 흔히 저승 가는 길의 어디쯤을 묘사하고 있는 듯한 지구의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 분명 전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몇 시간 걷는 것쯤이야.’      

호기롭게 시작한 내 걷기 여행은 한 시간쯤 지나자 조금씩 고통과 후회로 젖어든다. 포장도로라고 생각했던 도로는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고 그 덕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의 흙먼지가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온다. 길에서는 종종 중장비들을 볼 수 있었는데 민둥산에서 떨어진 큰 돌들을 도로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치우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깨어 부수고 있었다. 마스크를 챙겨 오지 않은 스스로를 탓하며 짐작도 가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강물에 얼굴이나 좀 씻어 볼까 하여 급하게 물을 얼굴에 끼얹었더니 심장이 요동을 친다. 너무 차가워서 놀래다 못해 화가 나버린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번에는 물을 조금씩 조심스럽게 가져다 댄다. 입도 한번 헹구고 바위에 걸터앉으니 그제야 바람도 느껴지고 조금 멀리까지 바라 볼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진한파란색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고 분명히 멀리 있을 텐데 몇 걸음이면 갈 것 같이 가깝게 보이는 설산, 청록색의 강물까지 어우러지니 컴퓨터 배경화면을 보는 것 같다. 물은 또 어찌나 맑은지 차디찬 얼음물에도 여유로운 물고기의 움직임이 다 보인다. 가방을 뒤적거려 CD 플레이어를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MP3플레이어가 존재하던 시기였지만 아직 내 CD플레이어는 용도가 분명했다. 존재감이 확실한 크기와 움직임이 과하면 멈추었다 다시 도는 것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그 외엔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었기에 늘 가지고 다니며 그 풍경과 분위기를 음악과 함께 기억하곤 했다. 언제라도 같은 음악을 들을 때 그곳의 내가 생각나길 바라면서. 지금 이 순간은 쳇 베이커 노래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CD를 찾아 조심스레 판 위에 올려둔다. 뚜껑을 닫으면 ‘지잉’ 소리를 내며 날쌔게 굴러가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이윽고 감미로운 반주가 시작된다.


‘하, 살겠다.’


보온병에 싸 온 민트 티까지 따라 마시니 걷는 내내 가지고 왔던 후회와 걱정은 더 이상 없다. 그렇게 재충전을 마치고 다시 길 위로 올라와 끝나지 않는 풍경화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땡볕아래서 충전의 기운이 고갈되어 갈 무렵 저 멀리 건물이 보인다. 목적지가 보이니 다시 초인적인 힘이 솟아난다.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한 어린 스님이 나를 발견하고 큰 스님을 모셔왔다. 죽을 곳에서 살아온 것처럼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미소가 반갑고 아름답다.        

지금 나는 해발 4,166m의 천년 된 유물 ‘키 곰파’ 위에 서있다. 교육생 스님들의 불경 외우는 소리가 점점 거세 지고 있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젊은날 이곳에서? 정말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저런 삶일까?"  

학교에서보다 길에서의 배움이 큰 나의 흥미롭고 좌충우돌적인 삶을 생각하니 그들이 조금 안쓰럽다.


잦은 침략으로 인한 보수작업으로 건물이 제각각인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통일감 있어 보였다. 산등성이를 깍지 않고 그대로 지어진 계단식 건물들이 마치 고대 고성과 같다. 키 곰파는 주로 티베트 승려들의 종교훈련장소로 이용되는데 여행객들을 위한 도미토리 또한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삼천 원이면(2008년기준) 세 끼니를 포함 하루 묵어 갈 수 있다. 방을 안내받고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넘어있다. 아침 6시가 되기 조금 전 출발했으니, 강가에서 한 시간가량 노닥거린 것을 빼고도 다섯 시간을 걸은 셈이다. 땀으로 잔뜩 젖은 양말을 벗었는데 그 모습이 처참해 샤워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운물을 찾으니 어린 승려께서 아궁이에 불을 때 물을 끓인다. 이런 시스템인 줄 알았다면 그냥 찬물에 씻었을 텐데, 괜히 미안하다. 곰파가 마을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하여, 계단에만 걸터앉아 있어도 눈앞에 황홀한 전경이 펼쳐진다.


"미스 송, 물 준비 되었네요."

"오우, 땡큐 쏘 머취."


대답을 하고도 일어나 움직이기가 싫다. 사납게 내리쬐던 길 위의 태양 빛이 아닌 한결 부드러워진 따스함에 노곤해진다. 알맞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발가락 사이로 느끼며 깊이를 알수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쉼없이 움직이는 구름기둥을 물이 끓고 나서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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