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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 100점이 주는 교훈

by 채채

내가 처음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한글을 다 배우고 들어온 아이는 드물었다. 나이가 들면서 외국어에 대한 서투름은 있어도 공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적은 별로 없어서일까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도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는 딸이었다. 아이의 지능은 모계유전이라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내 아이도 잔머리(?) 정도는 날 닮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첫 번째 받아쓰기 점수 30점을 의기양양하게 들고 온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첫 받아쓰기였기에 아이들 대부분이 만만하게 생각했는지 고만고만한 점수를 받았다는 소식은 나중에 듣게 되었다. 미리 받아쓰기를 공부하라고 학습지가 학기 초에 나왔지만 크게 어려운 단어들이 없어서 방심했다.

반에서 한 두 명이던 백 점짜리들이 그 이후 80점 이하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들은 빠르게 적응해 갔다.

오직 내 딸만 빼고.

그날부터 받아쓰기 특훈에 들어갔다. 매일매일 오전에 연산 학습지를 5장 정도 풀고 밥을 먹고 등교를 하기 전까지 둘이 식탁에 앉아 받아쓰기 공부를 했다. 그냥 반복, 반복, 계속되는 반복이었다.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쓰니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저절로 외워져서 곧잘 쓰게 되었다. 그래도 100점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기껏 집에서 모의테스트 해서 보내면 꼭 쉬운 받침이나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를 빼먹는 게 다반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난독증을 겪는 사람들은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와 ~습니다. ~입니다. 같은 종결어미를 불분명하게 인식한다고 한다. 또 난독증은 예전에는 시각적인 문제라는 의견이 있으나 요즘은 뇌신경의 기질적 발달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백병원에서 시력 검사를 했을 때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서울대 소아청소년정신과에서 처음 난독증으로 판명되고 나서는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장장 5시간에 걸친 검사를 하시고는 난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난독은 질병이나 장애가 아니며 아이의 기질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해 보자고 하셨다. 앞으로 어디로 발전할지 모르는 아이의 인생에 장애라는 이름을 덧씌워 발목을 붙들지는 말자고. 난독의 특성상 아직 우리나라에서의 연구는 활발하지 않지만 그만큼 극복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으니 아이를 믿고 잘 이끌어주다 보면 난독이라는 이름도 낯선 장애가 아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는 아니라고.


받아쓰기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 딸은 암기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기도 하고 또 그 암기된 내용이 꽤 오래간다는 사실이었다. 한번 본 것, 들은 것은 절대 잊지 않고 가끔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반복되는 훈련으로 암기를 시켰다. 이해보다는 암기가 빨랐기 때문이다. 받아쓰기 100점이 소원인 아이의 바람은 그렇게 한 달여의 훈련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100점을 한번 맞고 나니 그 이후로는 수월하게 100점을 받아오게 되었다. 굳이 100점이 필요한가 하면 솔직한 엄마의 마음으로는 70점도 좋고 50점도 좋고 빵점을 받아온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국어 읽고 쓰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다른 과목 역시 마찬가지로 국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면 쉽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지한 엄마의 교육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받아쓰기를 하면서 자주 나오는 글자들은 외우지 않아도 외우게 되었고 이중받침이 있는 글자들도 차츰 정리가 되어갈 무렵부터 첫 100점을 받게 되었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문을 박차다시피 열고 들어오는 개선장군 같던 내 딸은 의기양양하게 드디어 100점짜리 받아쓰기 시험지를 내 앞에 내밀었다.

어린아이가 1주일에 한번 보는 받아쓰기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날 아침마다 심하게 등교거부를 했었는데 막상 한번 100점을 받아오더니 자신감에 차서 이후로 다음 주에 볼 받아쓰기 학습지를 시키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어렵게 끼운 첫 단추였지만 한번 끼우고 나니 그 이후에 단추는 쉽게 끼워졌다.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때가 되어서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받아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내 딸과 나누게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귤아, 너 받아쓰기 열심히 했던 때 생각해 봐. 매일매일 노력하니까 결국은 100점 받아왔지. 기억나?"


"그랬었지. 그때는 진짜 하기 싫었는데 엄마 때문에 억지로 했단 말이야. 근데 나도 모르게 다 아는 게 나와서 100점 받았을 때 너무 기분 좋았어. "


"거봐. 이것도 마찬가지야. 매일매일 하는 게 중요해.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매일매일 하는 게 쌓여서 잘하는 거야. 쌓인 게 없는데 어떻게 위에다 집을 지어?"


"근데 엄마, 나 너무 하기 싫어."


하지만 내 딸은 매일매일, 꾸준함의 힘을 이미 경험해 봤기에 이후 사춘기 시절의 고비도 과정은 힘들었지만, 알차게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결국 받아쓰기는 뭘 하든 꾸준함과 끈기가 있다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알게 된 내 딸의 첫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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