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도 갈 때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경유했다. 나와 친구는 이곳을 더 여행하고 싶어 남았고, 5주간 함께 생활하며 친해진 일행들과 헤어졌다.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시내로 들어간 날이 1997년 2월 2일 저녁때였다.
남아공은 그동안 보았던 동아프리카와 사뭇 달랐다. 백인들 천지였다. 정착해서 사는 영국인들도 많았다.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어가 공용어 중 하나여서 살기 편할 것 같긴 하다. 깨끗하고 세련되어 보이긴 했지만 도착한 날 눈에 들어온 건 가게마다 설치된 철장 같은 가림막이었다. 물을 사러 들어간 슈퍼의 주인아저씨는 우리에겐 친절히 대하면서 가게에 들어오는 한 흑인에게는 문 닫을 시간이라고 나가라고 막 소리쳤다. 요하네스버그 시내를 걸어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꼭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고 여러 사람(백인)이 말해주었다.
흑인들 모두를 범죄자처럼 대하는 백인들의 행태가 주객이 전도됐다 싶었다. 흑인들이 선점했던 땅에 와서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며 원주민 전체를 악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런 편견이 깊어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됐을 것이다. 백인들 자신에게도 굴레가 되는 건데. 여러 방범시설을 사용하는 것도 그 굴레 중 하나이다. 그런데 경비를 서는 사람들은 흑인이었다. 그들은 안전한 흑인이라는 건가?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임기 1994~1999)이 된 지도 3년이 되어가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해도 인종혐오의 골을 무너뜨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인종에 대한 선호가 있을 수 있다. 물론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선호가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사막같이 건조한 지역에 세워진 태양의 도시(Sun City)가 있다. 처음에는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오락 지역으로 조성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땐 이미 인종에 구분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몇 개의 호텔, 카지노, 놀이공원, 골프장, 수영장, 파도 풀장, 사파리 등이 있는 데다가 호수, 계곡, 폭포, 숲도 아름답게 조성해 놓아 작은 ‘도시’라고 할만했다. 1일 투어로 참여하려다가 비싸서 우리가 스스로 가기로 했다. 선시티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선시티 입장료를 내면 할인 혜택들을 묶어놓은 작은 책자를 주었다. 조화롭게 꾸며놓은 자연경관도 볼만한데 태양의 도시답게 상당히 덥기도 해서 밖에서 오래 다니기가 힘들었다. 바우처에는 카지노 시설들을 이용하는 할인권도 있었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는데도 카지노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바우처에 있는 돈만큼 쓰고 나오면 손해 볼 게 없겠거니 하면서. 바우처를 칩으로 바꿨다. 둘러보다가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 거 같은 슬롯머신 앞에 친구랑 나란히 앉았다. 같은 그림을 나오게 하는 거였다. 내 돈이 들어간 게 아닌 데도 욕심이 생기고 다음번엔 잘 될 듯하여 연달아서 자꾸 하게 되었다. 도박이라는 게 왜 무서운지 알만했다.
받은 칩만 갖고 즐기고 있는데 친구가 사용하는 슬롯머신에서 큰 소리가 났다. 우리는 기계를 망가뜨린 줄 알고 깜짝 놀라 당황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쪽을 보며 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이용했던 슬롯머신 윗부분이 번쩍번쩍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직원이 와서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갔다. 얼마를 물어줘야 하나 걱정하면서 따라갔는데 오히려 돈을 주었다. 잭팟이 터져서 소리가 났던 거였다. 50달러 정도 되는 돈을 벌었다. 큰돈은 아니어도 물어준다고 생각했던 비용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순 없다. 그 반전에 기뻐하며 첫 도박기구 사용은 해피앤딩이었다.
다시 슬롯머신을 한 것은 6년 정도 후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서였다. 도박이 어떻다는 것을 선시티에서 경험해서 10달러, 아니 5달러만 갖고 놀기로 결심한 후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세계적 도박의 도시인 라스베이거스까지 와서 그냥 가는 건 후회를 남길 것 같은 기분에. 커다란 도박장에서 혼자 하기는 뻘쭘해서 상가에 있는 작은 기계 앞에 앉았다. 얼마 안 되어 역시 돈을 다 잃고 일어섰다. 배낭여행자였기에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도시에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하는데 라스베이거스의 별명은 Sin City, 죄 많은 도시이다. 도박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죄책감에서 일까? 시내 여기저기에 한글로 ‘금 삽니다’라고 쓰여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여기서 많은 돈을 뿌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라스베이거스는 재미있는 도시(Fun City)이다.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이 도시는 오아시스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 다양한 쇼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동화 속의 거리를 걷는 느낌이 든다. 한 호텔 건물 앞에서 본 보물섬 공연은 실제로 배가 뜨고 파도가 쳐서 실감 나게 즐길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의 ‘Time to say Goodbye’ 노래에 맞춰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분수 쇼였다. 웅장한 규모로 춤추는 물줄기는 노래가 주는 감동과 잘 어우러졌다. 오아시스에서 얻은 생명수처럼 그 하나로도 라스베이거스를 찾은 이유로 충분했다.
카지노에서도 즐길 수 있을 만큼 놀고 자제가 된다면 라스베이거스는 Sin City가 아니라 Fun City였을 것이다. 모든 게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카지노에서는 그 선을 너무 쉽게 넘게 된다. 그래서 남아공의 Sun City가 Sin City와 혼동되기도 한다. 여러모로 두 도시는 아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