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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테르 Apr 17. 2024

나만의 시간을 추억에서 찾다

    


아침 6시 30분. 갓 내린 따듯한 아메리카노. 쌉싸르한 한 모금에 밤새 무뎌진 정신이 돌아온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오믈렛과 토스트 그리고 사과와 우유를 준비한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치듯 아이들이 등교하고 남편이 출근한 뒤 홀로 남은 8시 30분. 비로소 커피메이커로 내가 좋아하는 우유 거품 가득한 라테를 내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밤새 일어난 사건 사고와 오늘의 날씨를 알리는 뉴스를 본다. 잠시 동안의 달달한 여유로움. 


오전 9시 30분. 집을 나선다. 어느 날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를 가기 위해. 때론 부모님 댁에 가기 위해, 지인과 만남을 위해, 학교 상담을 하러 가기 위해, 학원 등록을 하러 가기 위해, 어떤 날은 은행에 세금을 내러 가기 위해, 관공서에 문의하기 위해. 오후 2시 30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부랴부랴 집으로 향하는 내 양손엔 집 앞 제과점에서 산 갓 나온 빵과 무인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이 가득하다. 3시 30분. 학교에서 돌아온 두 아이들이 허기진 듯 야무지게 간식을 먹는다. 왁지지껄 떠들던 두 아이들이 학원에 가고 나면 또다시 홀로 남은 4시 30분,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저녁 준비를 한다. 온 방을 청소하고 서재와 책상을 정돈하면 10시 30분, 학원으로 픽업을 간다. 11시 30분, 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감하는 뉴스를 듣고, 12시 30분. 잠자리에 든다. 20여 년 동안의 규칙적인 삶. 난 그저 엄마였다. ‘나’는 어디 갔을까?      


라디오와 책이 전부였던 나의 10대 시절.

내 책상 왼쪽 모서리 한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만 미니카세트 소니 ’ 워크맨’은 늦은 밤 숙제할 때도, 밤새 시험공부를 할 때도 늘 함께 있었다. 부모님들과 온 가족 공동의 시각적 매체였던 TV와는 달리 미니 카세트 라디오는 지금의 핸드폰처럼 당시 최초의 휴대가 간편한 개인용 전자제품으로 청소년들이 온전히 누릴 수 있던 유일무이한 문화이자 세상과의 소통이었다. 손바닥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미니카세트는 그 당시 중˚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었던 휴대용 라디오였다. 지금의 삼성의 갤럭시와 아이폰이 서로 경쟁하듯, 1980년 일본의 SONY(사, 社) '워크맨(walkman)이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자 1981년 삼성전자에서 좀 더 합리적인 가격의 ‘my my’는 미니 카세트를 만들어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대중화되었었다.      


내가 라디오에 입문했던 중학교 1학년 15살,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난 밤 8시,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며 듣던 TBC(동양방송:1980년경 KBS로 통폐합됨) 가수 김만수가 진행하는 청소년 공개방송 인기 프로그램 <노래하는 곳에>를 청취하며 훈남 초대 가수이자 MC ‘이택림’의 재치 있는 말솜씨에 혼자 실실 웃기도 했다. 밤 10시에 시작해 12시에 끝나던 MBC 유명 DJ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를 통해 올리비아 뉴튼 존 'Hoplessly Devoted to you''(Greece OST), 'Let me be there' 팝송을 듣고 가사를 적어 따라 부르고, 용돈을 모아 샀던 내 생애 첫 LP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 노래도 처음 들었다. 

매일 아침 7시에 활기찬 시그널로 잠을 깨워주던 백형두의 ‘아침의 행진’의 애청자였던 난, 중학교 2학년 1월, 용기를 내어 ‘엄마 생신 축하’ 사연을 적어 보냈다. 엄마의 생신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실 전축 라디오를 크게 틀고 귀 기울이던 순간 "잠실에 사는 김윤희 학생의 어머님 오늘 생신이시네요. 축하드립니다” DJ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 마!!! 

목청 터져라 소리치며 부엌으로 달려가 아침밥을 지으시던 엄마의 팔을 잡고 라디오 들어보라며 호들갑을 부렸다. 운 좋게도 ‘청취자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코너’에 내 사연이 채택이 되어 축하 메시지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온 것이다. “어머 웬일이야” 엄마는 놀라셨지만 기뻐하셨다. 옆에 계시던 아빠는 “의미 있는 생일 선물이네” 하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셨고, 큰 소리에 잠 깬 동생은 얼떨떨하다 이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나의 작은 행동으로 인해 온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된 엄마의 생신날이었었다. 며칠 후 방송국에서 보내준 소정의 선물도 도착해 내 마음은 더욱 뿌듯했다.     


당시엔 집집마다 보기에도 부담스럽게 두꺼운 양장 형태로 한국과 세계 고전 명작 전집이 서재나 책장에 100권이나 50권씩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지금은 모두 헌 책방에나 가야 볼 수 있겠지만. 다른 놀이나 선택지가 없었던 그 당시 주말이나 방학 그리고 숙제가 없는 날이면 습관처럼 책장이 있는 책을 하나하나 꺼내어 읽었다. 『어린 왕자』에서 『데미안』까지 그리고 ‘톨스토이’와 ‘찰스 디킨슨’에 이르기까지.『올리버 트위스트』를 보고 슬퍼하고『장발장』을 읽으며 분노했고, 『빨간 머리 앤』을 보고 용기를 얻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미국의 아담한 가정집을 그려보며 언젠가 미국에 가보리라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여행을 가본 적이 거의 없던 당시엔 책 속에 묘사된 먼 나라들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낯선 상점 그리고 멋진 가구와 의상, 다양한 음식들은 머릿속 상상을 통한 대리 여행과 자유로움주곤 했다. 특히 책 속에 묘사된 ‘베이컨’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먹는 훈제 음식)에 대한 설명은 ‘어떤 맛일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했다. ‘훈제 베이컨’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던 때였기에, 궁금해하는 나를 위해 아빠는 미군부대를 다니던 지인을 통해 베이컨을 구해 오셨고, 그 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책’은 다양한 시각적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읽기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게 해 준 좋은 선배와도 같았다. 나 역시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거나 혹은 식사 시간을 잊고 늦장 부리다 엄마에게 매번 꾸중을 듣곤 했다. 책은 사각형 종이 위에 한 권이라는 제한적 한계가 있지만 읽는 동안엔 저 먼 세상으로 늘 나를 데려가곤 했다. 제약이 많던 그 시절, 책과의 여행은 무한하고 넓었다. 사춘기 시절에도 난 라디오를 들으며 힐링하고, 책을 읽으며 순간이동을 하듯 나만의 동굴과 같은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라디오와 책은 친구처럼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 시간들은 마치 멘토처럼 미성숙한 나를 확장시켜 주고 앞으로 나갈 수 있게 이끌어 주었다.     


청소년기 시절 '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상상하곤 했다.

어른이 되었다. 마음은 늘 분주하고 감정은 무뎌졌다. 무한의 상상력을 가진 소녀는 어디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때마침 빨간 신호등에 멈춘 사이, 문을 연 옆차 라디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노래 한 구절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변하나 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 문득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했던 나만의 시간, 책을 읽고 생각했던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다시 찾아야겠다. 나만의 라디오와 책을. 내가 놓치고 있는 시간들을. 그리고 내 인생 배낭 한 귀퉁이에 소중히 담아봐야겠다. 나만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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