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왔다. 내 마음속 고향!
35년 만에 돌아온 잠실은 긴 세월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빽빽이 들어선 고층 빌딩과 화려한 조명의 백화점과 호텔 그리고 놀이동산. 예전보다 넓어진 차도엔 자동차들로 가득했고, 인도에는 오가는 많은 사람으로 밤낮없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인 장미아파트와 주공 5단지 아파트를 보며
내 추억도 그때 그대로였다.
@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지금의 잠실 풍경
1979년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 장미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단독주택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시대의 변화된 흐름에 발맞춰 아파트로 오게 된 것이었다. 계절마다 꽃피고 잔디 넓은 마당에서 뛰놀던 우리 집 지킴이 크리스( 흰색 스피츠 강아지)와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다. 난 이사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러 갔던 날. '세상에 이런 집이 있다니! ' 난생처음 본 아파트는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집 같았다. 겨울에 따뜻한 물이 수도에서 나오고 화장실이 집안에 2개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내 방을 어떻게 꾸밀까 기대하며 하루빨리 아파트가 지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사 가기 하루 전 아침이 되자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다. 엄마가 부엌에서 데워서 가져다주신 따뜻한 물에 찬물을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물로 세수를 했다. 오늘이 우리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는 크리스를 볼 수 없고 -당시엔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지 않던 시절- 방학이라 학교 친구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전학을 가야 하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안녕, 우리 집! 그동안 고마웠어” 5살에 이사와 12살 때까지 살던 우리 집,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던 골목들을 뒤로한 채 난 덩그러니 몇몇 아파트만 있는 허허벌판인 잠실로 이사를 왔다.
드디어 내 방이 생겼다. 예전 집에선 어린 동생과 늘 함께 한 방을 사용하며 지냈는데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매일 방을 꾸미려 책꽂이에 책을 꽂았다 뺏다 난리 법석을 부렸다. 처음 가져 본 침대 위엔 예쁜 인형들도 올려놓고 방에서 신는 분홍 슬리퍼도 샀다. 나만의 방에서 나만의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이 생겼다. 이사오며 슬펐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즐겁고 신이 났다. 동생에게 내 방에 들어오려면 꼭 노크를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잠을 자다니 꿈만 같았다. 붙받이 옷장에 내 옷만 가지런히 걸어 놓고 열었다 닫았다 하곤 했다. 온전한 내 공간. 자유가 생긴 것 같았다.
따뜻했다. 이사 온 아파트는 중앙에서 난방을 공급해 주는 시스템으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닐 수 있었다. 더 이상 새벽에 연탄을 갈러 나가야 할 일도 없었고 위풍이 센 방안에 난로를 놓기 위해 석유를 사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있어 나와 동생은 준비물을 잊어도 다시 가져오기 편했다. 상가 안 큰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 집 앞까지 배달도 해주어 살림에만 매달리던 엄마에게도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수업을 마치면 친구들은 언제나 학교 앞 우리 집에 모여 간식을 먹으며 숙제를 하고 놀이터에서 놀았다. 시험 기간이 되면 친구들이 살고 있는 길 건너편 주공 5단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밤새워 함께 공부를 했다. 방학이 되면 나와 동생은 주공 5단지에 있는 YWCA에서 수영과 테니스를 배웠다.
아파트 상가에 ‘코니아일랜드’라는 -지금의 배스킨라빈스와 비슷-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가 오픈해 처음 고급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날, ‘아메리카노’에서 햄버거라는 빵을 줄 서서 사 먹고 신기해했던 날. 전기 구이 통닭만이 전부였던 나와 동생에게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집을 알게 된 날. 엄마와 새로 문을 연 대형 잠실 종합운동장 수영장 다니다 수영 선수로 발탁되어 온 가족이 기쁘게 파티하던 날. 대학 입시에 실패해 엄마와 서로 껴안고 펑펑 울던 날. 그렇게 새로운 추억들을 담으며 긴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장하며 대학생이 되었다.
1987년 5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짐을 싸고 계셨다. 이사를 간다고 하시며. 영문을 몰랐던 나와 동생은 어리 둥절했다. 이렇게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한동안 외할머니 댁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잠실을 떠났다. 7년 후 우리 가족에겐 다시 또 다른 집이 왔다. 그러나 그곳은 그저 머무는 공간일 뿐이었다. 각자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 우리 가족은 잠실의 시절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았다. 때론 너무 그리운 추억과 기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황하던 대학 시절, 잠실에 오면 평안했던 나날들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후에도 이따금 잠실에 오면 장미아파트를 한동안 바라보곤 했다. 내 방이란 소중한 나만의 공간이 처음 생긴 곳. 난방을 튼 것처럼. 내 성장기를 온전히 품고 있는 곳, 우리 가족의 행복함이 머물던 곳, 내게 안정감을 주고 나와 교감할 수 있던 공간이었다. 간혹 운전하다 지나칠 때나,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잠실에 올 때면 난 늘 훈훈함을 느꼈다. 내 추억이 있다는 것으로 평온함을 주었다. 중년이 되어 잠실로 이사를 결정했던 날, 12살 이사 왔던 그날처럼 마음이 꽁꽁꽁 설레었다. 좋은 추억과 좋지 않은 기억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다시 나의 공간을 찾아가고 싶었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다. 지금도 변함없이 잠실은 내게 포근함을 준다. 집은 그냥 공간이 아니고 지나온 시간과 함께 한 추억이 공존하기에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장소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픔과 상처를 품어주고 새롭게 숨을 불어넣어 주는 공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렇기에 치유할 수 있고 안정감을 주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소중하고 특별한 나만의 공간을 배낭에 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