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윤 희”
네. 네
1987년 3월 대학 입학식 날
넓은 운동장에 학과별로 늘어선 긴 줄
동시에 손을 든 앞줄과 뒷줄의 신입생 두 명
아 ~~~ 대~학~ 에서까지.
그렇다. 1974년 3월, 국민학교를 입학했던 첫날부터
1983년 2월, 여고 졸업까지 12년 동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윤희가 늘 있었다.
새 학기가 되고 새 학년이 되어도 J윤희. P윤희, G윤희라는 이름이 같은 반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가장 먼저 선생님들께 주목을 받는 아이였고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외워지는 이름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 아침 조회시간 학년 반장 대표로 교장선생님께 임명장을 받던 날, 전교생 앞에서 “K윤회”로 내 이름이 잘못 불린 채 교단에 올라가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에 돌아온 후 이름이 비슷한 옆 반 'K윤회'라는 친구와 임명장과 서로 바뀌게 된 사실을 알게 되신 담인 선생님께서는 교실에서 내 이름으로 된 임명장을 다시 전달해 주셨다.
중학교 시절엔 L윤희, C윤희가 있었다. 여고 시절엔 동명이인의 윤희가 존재했다. 선생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실 때면 "어머나, 이반에도 K윤희가 또 있어." 하시곤 했다. 매년 매 학기 첫 수업날이면 출석부에 나란히 놓인 동명이인의 윤희 이름 덕분에 매수업 과목마다 질문을 받았다. 특히 수학시간이면 가장 먼저 선생님께 불려 나가 문제 풀이를 해야 하는 했다. 내 차례가 끝나면 선생님께선 "윤희 뒤, 윤희 앞, 윤희 옆"을 호명해 내 근처의 친구들은 칠판 앞으로 나와 문제풀이를 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수학 시간되면 내 근처에서는 친구들은 수학에 자신 있는 친구들과 서로 자리를 바꿔 앉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고 3년 동안 또 다른 윤희와는 이름은 같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인 적도, 서로 친구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여고 졸업 후엔 동창생들 사이에선 같은 이름의 K윤희를 종종 헷갈려하기도 했다. 같은 이름과는 달리 서로 다른 친구를 사귀고 다른 추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런데 대학에 와서까지 하필 같은 학과에서 또 다른 K윤희를 만나다니. 앞으로 4년 이 걱정이 되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강의에서 출석을 부르던 조교님도 “어, 출석부가 잘못 기재되었나. K윤희가 두 명이 있네. 두 명 맞니? ” 하시며 의아해하셨다. 우리가 나란히 손을 들자 "어 정말 역사학과에 K 윤희가 두 명이구나. 출석번호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 하며 난감해하셨다. 그러자 잠시 후 모여 앉은 학생들을 향해 방법을 물어보셨고 결국 다수결에 의해 키순서로 정하기로 결정되었다. "일어나 앞으로 나와볼래?" 어색한 분위기 속 우리 둘은 쭈뼛거리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을 가리고 내성적 성격인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신입생들 사이에서 같은 이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이 순간이 정말 부끄러워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순간 이대로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또 다른 윤희는 나보다 머리 한 뼘이나 키가 작고 아담한 체구였다. 결국 윤희 A와 B로 출석부에 기재되었다. 4년 동안 우리 둘은 강의마다 교수님들에게 K윤희 A, B로 불렸고, 늘 그래왔듯 매 수업 원치 않은 관심과 질문을 받아야 했다. 16년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운명의 장난처럼 동명이인의 둘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한 주문에 걸린 숙명처럼. 같은 학과 같은 이름 때문인지 나와 또 다른 윤희는 같은 날 같은 옷을 입고 등교한 친구처럼 늘 데면데면 어색했다. 서로 바뀌어 전달된 온 학보와 편지 그리고 엽서들, 한참 뜯어서 읽다 보면 내 것이 아니었던 내용들. 때로는 상대의 사생활적인 내용인 담긴 서신들도 있었다. 학기 말이 되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성적표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했다. 대학 생활 내내 같은 이름으로 불필요한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 늘 일어나곤 했다.
매년 학기 초만 되면 늘 한 반에 또 다른 윤희들이 어김없이 있었다. 이사 가도 방안 한구석에 남아있는 북받이 장처럼. ‘내 이름은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와 철수처럼 왜 이리 흔할까’ “엄마. 내 이름 누가 지어주셨어? 내 이름 맘에 안 들어.” “왜 얼마나 예쁜 이름인데”, “ 아니야 항상 학교에 같은 이름이 있단 말이야” 입이 오십 리는 나온 채 퉁퉁거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좋은 이름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지어준 거지 ” 하고 대답하셨다. 특별히 집안 큰댁 아버지께서 네 생년월일을 보고 올바른 사람 되라고 진실로 윤(允) 자에 계집 희(姬) 자를 써서 정성껏 지어주셨다고 아빠도 말씀해 주셨다. “싫어! 채린, 리나 같은 이름이 예쁘단 말이야. 난 빛날 희 (熙) 자가 더 좋아” 실제로 '계집 희(姬) 자는 우리 집안 여자아이들의 돌림자여서 당시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이런 부모님의 말씀에도 윤희는 너무 흔한 이름만 같았다.
2019년 3월
늦둥이 둘째 아들 중학교 입학식 날
멀리서 누군가 나를 반색하며 웃으며 걸어온다.
단발머리에 반코트를 입은 작고 아담한 중년 여성 학부모
갑자기 나를 보며 웃으며 걸어왔다.
“너 윤 희 맞지 0대 00과”
“네. 누구세요 " 얼떨결에 대답을 했지만 난 상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 반갑다. 나야 윤 희 B,” 순간 깜짝 놀랐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간이 반대로 흐르는 듯 지금의 얼굴너머로 지나간 20대 대학시절 그 친구의 얼굴이 오버 랩 되듯 점차 낸 눈에 보였다. “아. 아 그래. 윤 ~ 희 B. 정말 오래 오래간만이야”
1991년 대학 졸업 후 무려 28년 만이었다. 같은 날, 같은 중학교 아이들 입학식 날
그렇게 또 다른 윤희를 다시 만났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얼마 전 외동아들 중학교 입학시키려고 강남으로 이사 온 이야기. 대학 동기들 이야기 등.
참 인연이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며 헤어졌다. “멀리서 보는데 너 같아서. 금세 알아보겠더라. 그런데 어쩜 넌 하나도 안 변했니.”라는 윤희 B의 말에 가는 길 내내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큰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 생각난다.
2004년 3월, 입학식이 끝나고 정문을 나서려는 데 어디선가 알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여고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동창이었다. 1983년 2월 여고를 졸업한 후 21년 만이었다.
외동아들 입학식에 참석했던 인영이는 여고 시절 내내 문과 전교 수석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던 수재였다. 역시나 멋진 전문직 커리어 우먼이 되어 당당한 모습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반가워. 네 딸도 입학하는구나. 나 여기서 일해. 서로 연락하자. ” 순간 결혼 후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주부였던 난 부끄러웠다. ‘나도 명함이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와서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지 않고 멍하게 한참을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날 이후 학부모 모임 때 만나거나, 이따금 내게 연락을 해서 학원 정보에 대해 물어보는 그 친구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는 그 친구를 볼 때면 부러운 마음과 못나게도 움츠려지는 마음이 동시에 생겼다. ‘00 엄마와 여고 동창생이라면서요. 좋겠다 “ 하는 한 학부모의 말을 듣고 더더욱. ” 나도 명함을 갖고 싶었다. 흔하지만 내 이름이 새겨진 “ 왠지 명함에 새겨진 내 이름은 흔하지 않아 보일 것 같았다.
2023년 3월
“K 윤 희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K윤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인성교육 봉사활동 강사로서 처음 배정된 중학교 담당 선생님과 만나는 날
난 다시 이름 속 내 숙명을 느껴야만 했다
담당 선생님 성함이 바로 ‘K윤희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평행이론과 같았다.
다행히 수업 첫 날 만난 ‘K윤희 선생님’은 무척이나 친절하신 분이셨다.
중학교에서 창체 동아리 수업 시간에 인성교육을 지도하며 내 이름을 소개한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내 이름 나를 제대로 알고, 나를 브랜드 하는, 퍼스널 브랜딩에 대해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 뿐 아니라 나 역시 위안과 도움을 받고 있다. 흔한 이름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득하던 학창 시절, 내게도 이런 수업이 있었더라면 내 이름에 대해 보다 담당했을 텐테,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를 피하지 않고 좀 더 친근하게 지낼 수 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2024년 4월
고 3인 늦둥이 아들 녀석의 학부모 참관 일어날, 학교를 방문 서명란에 이름을 썼다. K윤희.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어머나 신기해라. 같은 이름이 있네요. 어머님은 K윤희 1로 서명해 주세요" "네" 담당선생님과 나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내 이름은 항상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누구나 가지고 싶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름은 그저 이름이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자신만의 이름.
이름은 그 사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찾아가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흔하게 보이는 이름일지라도 자신만이 갖고 있는 유니크한 재능이나 가치관을 갖춰나가 그 이름을 떠올리면 곧 그 사람이 그려지는 나만의 이름표를 가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마치 명품 브랜드처럼. 테레사 수녀를 떠올리면 베풂과 선함을 생각하고 유관순을 떠올리면 3.1 운동을 떠올린다. ‘내 이름을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자 지금부터라도 내 이름을 값지게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사람은 죽으면 이른 석자를 남긴다’는 선조들의 명언처럼. 흔하고 흔한 이름이 아닌, 기억하면 미소가 떠오르고 사람, 후배들에게 그 길을 따라가게 싶어지게 하는 사람, 비록 한 권의 책을 남길지라도 내 이름을 보고 소장해서 갖고 싶은 마음,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나를 대표하는 이름. 그런 나만의 이름을 내 인생 배낭 한편에 꼭 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