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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테르 Apr 17. 2024

나만의 언어로 세상너머를 소통하다

     

“ 빠마기제, 빠마기제 ”


빠마기제는 ‘도와달라’ 뜻을 지닌 러시아 어이며    

'스빠시바'와 함께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2009년 1월 밤 10시 무렵, 모스크바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회사가 마련해 준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세 개의 방과 화장실,  드레스 룸, 유럽식 엔틱 장식가구들과 모던한 소파가 놓인 거실과 확 트인 다이닝 룸 그리고 벽 한쪽을 차지한 오븐과 한국에서 본 적 없던 4구의 인덕션이 설치된 아일랜드 식 부엌. 두 아이들은 “와 아. 멋지다” 하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박물관처럼 높은 층고 탓인지 아이들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자정을 지나자 창밖엔 온통 검은 하늘 아래로 하얀 눈이 비바람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4시,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밤새 뒤척이던 우리는 동이 트기도 전에 식탁에 모여  한국에서 가져온 검은색 이민 가방을 열고 음식들을 꺼내 허겁지겁 먹었다. 오전 8시,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을 현관에서 배웅하고 덩그러니 남은 나와 두 아이들. 거실에 놓인 흰색 소파 한 귀퉁이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이제 뭐 하지?’ 정적이 흐른다. 양손에 새우깡과 바나나킥을 들고 초코파이를 뜯어먹으며 TV를 틀었다. 그러나 화면 속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 앵커의 뉴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다양한 색채의 러시아 만화! 심심하다며 유치원 가고 싶다고 칭얼대던 네 살 바기 아들 녀석의 두 눈이 순간 TV에 고정되었다. “엄마 나 이거 볼래?” 다음 주가 되어야 등교할 수 있는  열두 살 난 큰 딸아이도 흥미로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빠마기제”  어푸어푸!!

화면 속엔 친구와 장난치다 물속에 빠진 남자 어린아이가 겨우 얼굴을 들고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아이가 빠진 호수에는 여러 마리의 백조가 무리 지어 지나가며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던 꼬맹이 아들 래미는  때마침 지나가던 어른이 그 아이를 건져주는 장면이 나오자,  ‘와아 잘됐다 “ 하며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마도 그 단어는 ‘살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 같았다. “SOS” “Help me" 검색해보지 않아도 영상을 통해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빠마기제” 는 '도와주세요.'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나와 아이들이 알게 된 최초의 러시아 언어였다.      


햇반 열 개, 라면 한 박스 

짜파게티 다섯 봉지와 스팸 다섯 통  모두 먹어버렸다.      

3일 만에 이민 가방에 나름 잔뜩 실어가져 온 모든 한국 음식들이 전부 바닥이 났다.

현관 문밖 한걸음도 나 기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우리는 한 끼를 먹고 돌아서면 다시 허기가 느껴져 목이 차오를 만큼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먹고 주전부리를 해대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공허함 때문이었을까 

‘어쩌지. 배편으로 운송되는 짐이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 달 반이나 남았는데.’ 부엌엔 제대로 된 그릇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먹고 비워진 플라스틱 햇반 용기가 눈에 띄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깨끗이 씻은 10개의 햇반 용기를 그릇 대신 사용하며 짐이 오기를 기다렸다.  ‘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마치 하루하루가  캠핑을 하는 것 같았다.  현대적이고 화려한 외관을 가진 아파트에서 우리의 생활은  내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부족함으로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주일, 열흘,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오히려 한편으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내 것이 없음이 주는 홀가분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바닥이 난 음식 먹거리와 식재료들을 사기 위해 회사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나와 아이들은 마트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외곽의 Metro라는 독일 대형 마트엔 다양한 나라에서 수입해 온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상품들 가지런히 놓인  깔끔한 진열대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삼겹살처럼 보이는 베이컨과 캘리포니아 산 쌀 한 포대, 우유와 유제품 그리고 사과, 오렌지 등 과일과 갖은 야채들을 카트에 넣었다. 특히 치즈와 소시지는 종류가 정말 다양했다. 아이들은 모처럼 신이 나서 다양한 맛의 Lays(포테이토칩)를 사고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늘어선 긴 줄 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눈치 빠른 계산원이 가격을 찍어 보여주었다. 지갑을 열어 돈(루블)을 내주고 잔돈을 받았지만 영수증을 살펴보니 계산이 맞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전해야 할지 답답했다. 하는 수 없이 제스처를 하며 잔돈을 계산대 위에 펼쳐놓고 연신 “빠마기제”를 외치며 바디랭귀지를 했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무척 답답했다. 다행히도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본 고려인 부부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연신 감사하고 말하는 내게 그 부부는 헤어지면서 스빠시바” (Thank You)라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배운 두 번째 러시아 단어였다. 여기서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순간 내 귓가에 ‘빠마기제’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물속에 빠진 만화 속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발코니 창문 너머 보이는 드넓은 보론초프스키 공원,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 숲.  태산처럼 쌓인 길가의 눈. 영하 30도의 날씨,  한 밤중 소름 끼치는 듯한 거센 바람 소리.   낯설기만 했다.     

아파트는 큰 스퀘어( 거의 70여 평) 와는 달리 부족했던 수납 때문에 옷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필요한 몇몇 가구들을 구입하기 위해 1시간 정도의 외곽에 있는 이케아라는 - 당시엔 한국에 입점이 안되어서 매우 생소했던- 곳에 가기로 했다. 도착한 이케아는 소위 조립식 가구들과 각종 실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스웨덴 대형 마트였다. 앞서 마트에서 겪었던 곤란한 상황을 고려해 이번엔 러시아말을 통역해 주는 분과 동행해 비교적 수월하게 가구들을 구입했다. 그러나 며칠 후 집으로 가구들이 배달되어 왔을 때 다시 의사소통의 문제는 발생했다. 한국과 달리 이곳은 배달비가 층마다 다르다며 -당시 우리 집은 8층-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배달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구입할 때 사인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었다고 하며 요지부동 1층에서 움직이지 않고 추가 지불이 되지 않으면 그냥 1층에 두고 가겠다고 했다. 부랴 부랴 회사 통역하시는 분께 연락해 전화로 간신히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미 저녁이 다 되어버렸다. 몇 분이면 끝날 일들이 언어가 다르다 보니 늘 몇 시간 아니 그 이상 걸리곤 했다.  이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고 대처하기 위해 현지 러시아 선생님께 러시아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계 3대 어려운 언어로 손꼽히는 러시아 어는 처음엔 기묘한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자 차츰 길가의 간판이 읽히고 6개월 후엔 더듬거렸지만 쇼핑몰에 가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지고 외출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생활에 자유로움이 시작되었다. 비록 문법을 다 익히지 못해 완벽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습득했지만 푸쉬킨 미술관, 크레믈 박물관 그리고 볼쇼이  발레 공연 티켓 등을 예매해 아이들과 틈틈이 보러 다닐 수 있었다. 언어를 배워 알게 되면서  문화를 감상하게 되었고,  예상보다 수준 높은 러시아의 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톨이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안톤 체호프와 같은 대문호의 생가도 방문했을 때 '이곳을 아이들과 내가 와서 직접 볼 수 있다니' 벅차게 감격스러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따금 뉴스에서만 전해 듣던 멀고 낯설게만 느껴지던 러시아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두려움이 조금씩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한 달 반이면 온다던 짐은 두 달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짐이 도착하고 거실에 하나하나 풀어 그릇들과 옷들 그리고 책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너무나 반가웠다. 두 아이들도 각자의 방에서 제 물건을 꺼내 정리하느라 난리법석을 피우며 소란스러웠다. 몇 달 전 내가 쓰던 물건들인데 새로웠다.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풍요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이렇게나 가진 것들이 많았구나 ’. 하는 마음이 들었다. 허허벌판 같았던 큰 공간이 우리들의 짐으로 서서히 채워졌다. 비로소 내 집인 것 같았다. 내 물건들이 주는 익숙함으로 인해 포근한 안정감이 들었다.  


요리에 재능이 없었지만 외식을 해도 러시아 현지 고급 레스토랑이나 몇몇 한식당은 가격만 비쌀 뿐 맛있는 음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 러시아 음식은 대부분 매우 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매일 집에서 신혼 때도 보지 않았던 요리책을 꺼내서 참고하거나, 때론 학부모들에게 레시피를 공유받아  요리와 조리를 하며 반나절을 보내곤 했다. 잡채, 김치, 탕수육, 식혜, 돈가스, 뉴욕 치즈 케이크, 카스텔라 등등 수많은 음식을 만들었다. 대학 졸업 후 20여 년 동안 운전을 했지만 한국에선 다니던 길로만 다녀 길에 대해서 무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택시나 차를 타고 갈 때면 혹시나 하는 긴장감으로 늘 차창 밖너머 지나가고 있는 도로의 방향, 길 중앙의 랜드 마크 등 세심히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모스크바 시내의 자주 가는 곳들의 전 도로를 거의 모두 외울 정도가 되었다. 낯선 환경이 주는  자연스러운 또 하나의 새로운 습관들이 쌓여갔다.

지금도 이따금 뉴스에서 모스크바 시내거리나 크레믈 궁전과 붉은 광장, 푸쉬킨 동상이 있는 아르바트 거리가 배경으로 나올 때면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과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러시아에서 지내던 5년 동안 난 매일 마음속으로 빠마기제를 외쳤다. 한국에선 혼자 해결하며 단 한 번도 남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이 지냈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어설픈 발음으로 ‘빠마기제’라고 하면 외국인에게 다소 냉소적인 러시이안들일지라도 늘 도와주었다. 처음 해보는 경험들. 소소하게나마 도움을 받고 나면 “스빠시바 발쇼이( 대단히 감사합니다)”로 미소 지으며 마무리하는 하루. 시간의 흐름 속에 외출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늘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빠마기제’로 시작된 언어는 생소한 타국에서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특성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서로 간의 소통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감정으로 교류하고 서로에게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언어가 지닌 힘이라는 것을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언어는 세상 너머의 낯선 이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글을 쓰며 마음속으로 러시아가 아닌 한국에서 빠마기제를 외치고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  

글을 쓰는 작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작곡을 하는 음악가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들 ,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자신만이 구사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나만의 언어를 가지려면 부단히 많은 실패와 경험이 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과정들을 통해 나만의 언어를 습득해 자유롭게 표현해 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내 인생의 배낭 속에 나를 대변하는 상징하는 고유한 나만의 언어를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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