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사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혼으로 새 가정을 꾸린 부친의 집에 부유물처럼 섞여들지 못한 채 사는 사람만큼이나 흔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공평한 우울, 입에 올리는 것조차 뒷말이 되어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가슴에 묻어두지만 발작처럼 엄습하는 불안은 깊은 물 같아서 끝없이 침잠하고 불순물이 되어 잠긴다.
누군가는 밤을 수놓은 도시의 빛을 보고도 별이라 답할 텐데 왜 난 이 도시가 답답하기만 한지, 모친이 떠오르는 밤이면 밀물처럼 몰려오는 우울에 잠겨 죽기 전에 차가운 밤공기에 체한 것처럼 얹힌 불안을 토해내려 신발을 끌며 부랑자가 된다. 모친의 죽음은 특별할 것 없이 가난에 대한 비관으로 종결된 자살이었는데, 친인척 간 교류도 없이 천덕꾸러기로 낙인이 찍혀 이혼과 함께 모든 연이 일방적으로 끊긴 모친의 아래에서 자란 아이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진 건지 엄마를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것인지, 혹은 말과 글을 배우지 못한 천치인지 분간할 수 없어 열여섯이나 된 아이를 도맡으려 한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별 볼 일 없던 사람이 별수 없이 죽어버려 홀로 남겨진 나를 서로 맡으라고 떠밀던 친척들이 ‘재혼했어도 친부는 친부’라는 적당하고 단순한 구실을 만든 탓에, 새 가정을 꾸린 부친은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살맛이 나는 귀여운 짓도 간단한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하는 나를 거두었다. 각자의 방과 사생활이 보장된 그의 가정엔 옷장이 모피 코트로 가득 찬, 입술 주름 하나에도 새빨간 립스틱을 쑤셔 바르는 40대 초반의 여자와 목재 가구 향이 나는 소년이 있었다. 너 벙어리야, 아님 그냥 병신이야. 웃는 얼굴이 부친을 빼닮은 소년은 까맣게 윤기 나는 가죽 소파에 드러누운 채 이제 막 집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나를 보고 놀라거나 충격을 받거나 울며불며 떼쓰지 않았다. 두 자릿수를 간신히 넘긴 나이에 비해 조숙한 영악함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낯선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휘어지던 눈꼬리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우디 향처럼 나른한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말투는 순식간에 우위를 구별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고 비틀던 입꼬리를 떠올리며, 바퀴벌레처럼 거리를 희미하게 비춘 가로등 아래를 습관적으로 피해 계단을 걸었다. 철창 모양의 계단 난간을 잡으려다 꺼슬꺼슬한 녹이 슨 페인트칠이 부스러져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의지하며 한 걸음씩 움직였다. 서늘한 밤공기에 어깨가 으슬거렸다.
마치 나를 위해 짜인 극처럼, 모든 게 내가 이미 정해진 어떤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종용하고 몰아세웠다. 갈 곳이 마땅히 없어 걸음이 향하는 곳은 무의식에 맡겨두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장막이 걷히듯 호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몇 번이나 바뀐 건물과 나무를 뒤늦게 가늠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건 아닌지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듯싶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이곳이 그 호수가 맞는지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근처에 밤을 보낼 곳이 있나 둘러보던 찰나 잔잔한 호수를 보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은촛대를 훔치고 달아난 죄인이 된 양 숨이 막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에는 인력이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호수에 몸을 숨긴 인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까만 호수 안에 비친 달이 잔잔한 떨림에 일렁거렸다. 분명 처음 본 호수도 아닌데 몸에 밴 낮아짐이 습관적으로 찾아들었다. 함부로 입을 열면 철없는 아이 같은 울음이나 고해성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할 것 같아서 미동을 죽인 채 밤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풀벌레 소리도 없이 고요한 호수로 다가갔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다. 사랑했다면 버리지 않았다. 내가 엄마였으면 적어도 도망치듯 혼자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열여섯이나 먹었으면 부모 없이 독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엄마는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이고. 아니, 이건 조금 상처니까 사랑하지 않은 걸로 하자. 차라리 그게 낫다.
이런저런 거창한 이유를 붙일 필요 없었다. 단순하게, 아득바득 살 이유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걸어온 길이 여전히 흐린 빛이 표면에 잔잔히 내려앉은 채 그 자리에 있을 텐데, 왠지 걸음도 고개도 그 무엇도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나아지지 않을 거란 유일한 확신 속에서 걸음 하나 앞에 있는 물거울을 내려 봤다.
늘 수면 아래가 궁금했다. 바다의 끝은 어딘지, 부유물이 떠다니는 호수 아래에도 물고기가 존재하는지. 엄마도 그곳에 있을까, 그곳에선 나는 무엇이라도 될까, 한 번쯤은 애매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다 문득 엄마도 별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괴로울 정도로 아름다우니 몸을 던지지 않고는 못 배긴 거지.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 기꺼이 삼켜지고 싶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지니 말이다. 분명 엄마의 마음 같은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간만에 호수를 봐서 그런가, 엄마를 데려간 호수 앞에 맨정신으로 서 있는 게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라 그런 건지, 자꾸만 엄마를 이해하려고 들었다. 3년간 미워하고 증오한 만큼 사랑도 찾으려 하니 실낱같은 희망을 자꾸만 붙들고 싶어졌다.
허리께까지 차오른 물이 넘실거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삼켜지듯 물속으로 작은 몸이 허물어졌다. 회신조차 닿지 않는 곳으로 간 가난한 사랑을 찾아서, 닳아버린 낭만이 가라앉은 곳을 향해 발버둥과 물거품 없이 까만 수면 위에 작은 파문만 일었다 금세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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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시는 거대하다기엔 초라하고 관광 명소라기엔 인근 동네의 주민들만 간간이 찾아 산책하는 호수 하나를 둘러 끼고 있다. 태산시는 새로 부임한 젊은 시장의 공약인 지역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십여 년 전 넓은 호수를 간척하는 수고를 들였는데, 서울과 인접해 있는 데다 의욕과 자신감이 가득한 우 시장의 빠른 공약 이행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간척을 위해서 인근 숲을 토취장으로 만들어 거기서 나온 흙을 매립토로 활용한다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우 시장은 자신만만하게 내건 ‘지역 발전’ 공약을 위한 일이라며 주민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주민들의 입장은 완고했다. 주민들이 소음 문제와 산림과 토양 등의 환경 파괴를 내걸고 나서자 환경 단체들도 합세했다. 젊은 시장은 귀를 닫고 독단적으로 근 2년간 개발을 진행했으나 막대한 비용과 반대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장기 계획은 무산되고 첫발만 간신히 들여다 놓은 탓에 호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방치된다. 호수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다. 맑던 호수의 수면은 탁해졌고 숲의 일부는 듬성듬성 파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십여 년 전까지는 수면 아래가 훤히 들여 보일 정도로 맑아서 호수 안을 헤엄치는 이름 모르는 물고기들이 종종 눈에 띄곤 했는데, 물고기는커녕 부유물이 흘러 들어간 이온 음료가 뚜껑도 없이 유유히 유영하거나 5년 전 반짝 떴다 혜성처럼 사라진 남자 아이돌의 2집 앨범 CD가 홀로 빛을 내며 망망대해에 표류한 뗏목처럼 잔잔히 떠다녔다. 5년 전부터 나이아 숲은 잇따른 실종과 자살 사건으로 태산시를 술렁이게 했는데, 자극적인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 좋아하는 소규모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 ‘자살 숲’이라 부른 것을 기점으로 기사 제목을 골몰하던 기자가 냉큼 낙점해 기사의 제목으로 써먹은 것이 쐐기를 박았다. ‘나이아 숲’이라고 검색하는 것보다 ‘자살 숲’으로 검색했을 때 더 많은 정보가 뜨는 것은 물론 카더라와 섞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이아’라는 이름은 연관 검색어 끝자락에 겨우 얼굴만 내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건에 묻혀 자살이라는 말의 무거움을 실감하지 못하는 십 대의 가벼운 농담, 혹은 준비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쉽게 입에 올리는 유희거리로 소비되는 불명예만 남게 된다. 숲을 가지고 떠드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개중엔 건물이나 부지를 가진 부유층들도 있었는데, 손가락질 받을 작정으로 집값 떨어지니 입 다물라는 말을 얹거나 세상이 말세라며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지역을 떠났다.
경준은 근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수를 둘러봤다. 팔 년 전 자살 숲 같은 기이한 별칭이 붙기 전에 그는 태산시를 떠났다. 첫째 희소가 열세 살이 되었을 무렵 경준은 동업하던 친구가 회사의 이름으로 무리하게 끌어 쓴 대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잠적해서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됐다. 빚을 갚으려고 그가 추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수록 해결할 수 없는 수렁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업은 애매하게 끝을 맺었다. 예고 없이 내던져진 망망대해에는 나침반도 없었다. 경준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착수했다. 그런 중에도 사업에 대한 열망은 여전해서 이번에는 할 수 있다고, 혼자서 해보겠다고 밤중 아내에게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그가 계획한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노부모가 있는 지방 변두리로 내려가게 된 것은,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이 늘어나자 그간 홀로 꾹꾹 참아내던 만삭의 아내가 새벽 동이 트고 나서야 죄인처럼 집에 들어와 부엌 바닥에서 쪽잠을 자던 그를 붙들고 터뜨린 눈물 때문이었다. 그즈음 셋째 희겸이 태어났다. 경준은 아무래도 난 사업을 할 놈이 아닌가 보다, 하고 미련 없이 귀향길에 올랐다.
경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부친의 밭에서 오이 씨종자를 심으며 맡았던 소똥이나 거름 냄새는 아니다. 도심의 매캐한 매연과 잿빛 구름이 덮은 하늘은 고향의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나 상쾌하고 이물감 없이 깨끗한 공기와는 다르지만 그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경준은 빨갛게 칠한 자전거 도로와 구분된 산책로에 섰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여기저기 금이 간 흰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선선히 걸어가며 호수를 바라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산책로를 따라 호수를 걷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서 그는 사람들이 자살 숲이 있는 동네라는 오명을 못 견뎌 떠났다고 짐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최근 십 대 사이에서 SNS 챌린지로 유명하다는 노래에 조잡한 EDM이 깔려 흘러나와, 경준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일부러 문을 활짝 열어둔-유행하는 음악과 사람으로 꽉 채워진 내부를 은근히 노출해 근방을 지나는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가게에는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꽤 있다. 야외 테라스에는 흰색 파라솔과 이어진 꼬인 사슬 모양의 철제 테이블이 있다. 호숫가라 간간이 세게 부는 바람이 불안한지, 신경 쓴 플레이팅이나 높은 물가를 운운하며 슬금슬금 올린 가격의 실체와 늦은 후회는 연말로 미뤄두고 음식이 쥐똥만큼 담긴 접시를 부여잡아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중 몇 사람은 이미 식사를 마쳤는지 선선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화하다 먼 풍경을 찍었다.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두드리다 저들끼리 키득거리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카메라 렌즈가 초점을 맞춘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경준은 우두커니 서서 한 곳을 바라보다 말고 선득하게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려 가래를 목 안쪽 깊은 곳에서 톺아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탁해진 가슴이 납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겁다. 탁 뱉은 가래가 붉은색 자전거 도로와 눅눅한 녹빛의 산책로 사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침범이나 멋대로 일상 대화를 중단시키는 경쾌한 경적으로부터 안전하게 갈라놓은 흰 선에 떨어졌다. 뒤늦게 아차 싶었던지 경준은 고개를 쳐올려 주위를 둘러봤다. 신발로 바닥을 쓸려다 말고 머뭇거리는 경준의 뒤로 저어, 하고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짙지 않은 새물내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와 겨우 닿은 목소리를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느낌만 남기고 흩어졌다.
어깨 밑으로 후줄근하게 내려온 어깨선, 쥐색 후드 집업과 명치까지 올린 지퍼 뒤로 보이는 흰 무지 반팔 티.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밴딩이 있는 중청바지는 발목 위에서 끊겨 있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에 작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손 선풍기를 든 채 기껏 목소리를 쥐어 짜내고 낯을 가리는 건지 듣기 좋게 입 안에서 굴리는 건지, 손을 뒤로 뻗어 뒤집힌 모자를 매만지는 남자를 경준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꺾어 올려봤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땅으로 처박힌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치며 길게 내려온 앞 머리카락에 가린 눈매가 꽤 사납게 생겼다고 생각한 경준은 남자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눈짓했다. 경계심을 완전히 푼 것은 아니지만 남자가 특별한 것 없는 호수를 보러 먼 곳에서 왔다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져 친절하게 웃었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치고 휴대폰을 꽉 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액정이 깨지거나 모난 곳 없이 깔끔하고 남자의 손짓에 잠시 켜진 화면은 누르스름하지 않아서 최근 출시된 기종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한참 전에 출시된 기종이었다.
경준의 말로 타이밍을 놓친 모양인지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불안한 시선을 옮기던 남자가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나이아 숲이 여긴가요?
안 돼요, 경준은 저도 모르게 떨어진 입술을 도로 붙이며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남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기 전에 빠르게 머리를 굴려 남자와의 만남을 훑었다. 자살 명소라고 젊은 세대 안에서 소문이라도 난 것인지, 경준은 눈앞이 아찔했지만 남자의 말간 얼굴에선 도무지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조용히 안도했다. 경준은 괜히 어쩔 줄을 모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남자의 목적을 가늠했다.
숲이라면 이곳에서도 훤히 보이는데 진영처럼 위압적으로 펼쳐진 숲의 녹음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 테고, 정확한 위치나 확신을 받아내고 싶은 건지 그가 포교나 설문조사 같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끌어들일 작정인 건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아 경준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을 찾아야 해요, 경준의 표정을 보고 기묘한 대답의 이유를 어렴풋이 가늠했는지 부쩍 침착해진 얼굴이다. 경준은 이번에도 못의 잉어처럼 불쑥 튀어나올 뻔한 물음을 입 안에 가두고 저기 맞아요, 그 숲.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경준은 남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담담함으로 가린 두근거림과 잔떨림, 자신을 불러 세웠을 때 눈동자 속의 날 선 불안을 감추기 위해 한참을 망설인 것이 배려임을 알아차렸기에 내부에서 요동치는 감정과 물음의 소용돌이를 남자에게 넘기지 않았다.
짧게 묵례하듯 고개를 숙이자 익숙해진 남자의 향이 다시 코끝을 건드렸다. 남자가 우두커니 멈춰 서 있는 경준을 지나치자 뒤늦게 경준의 셔츠가 휭 날렸다. 경준은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홀린 듯이 카메라를 켜 들어 올렸다. 피사체를 담은 카메라가 경준의 손가락이 누른 곳에 작은 네모 칸을 만들며 해상도를 높였다.
찰칵, 경준은 셔터음과 동시에 까맣게 변했다 돌아오는 화면처럼 희뿌옇게 밀려오는 기억의 해일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