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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4. 박경준

물 위를 걷는 사람


  아메리카노 안 시켰다니까!

  해영은 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소란스럽던 카페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카페 안 시선이 노골적으로 한 곳에 몰렸다. 중년 남성 한 명 앞에서 희소가 침착한 얼굴로 더듬으면서도 또박또박 설명하고 있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셨잖아요. 잘못 누른 거라니까? 그럼 일찍 말씀하셨어야죠. 드셔 놓고 환불이라뇨. 큰 규모의 카페가 아니라 버럭버럭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단층 내부를 울렸다. 남자는 환불해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인지 떡하니 버티고 서서 환불해 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희소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한숨을 참는 것이 보였다. 해영은 응대하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희소의 옆으로 다가갔다.

  손님. 죄송하지만 환불은 어렵습니다.

  갑작스러운 젊은 남자의 등장에 중년 남자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지만 팔짱을 풀지 않고 되레 큰 소리를 냈다. 잘못 시켰다고 몇 번을 말해. 카페 지침이 원래 그래서요. 해영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자 아까의 기세가 조금 꺾인 듯 슬쩍 팔짱을 풀었다. 아니, 내가 손님인데. 융통성 있게 이런 것 좀 못해요? 매니저 부르던가…… 남자는 어느새 경어를 쓰고 있었다. 좋게 좋게 달래던 해영이 몇 마디 덧붙이기 전에 굳은 얼굴로 희소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이거 영업 방해인 거 아시죠. 신고하기 전에 나가세요. 남자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커플이 참다못해 거들자 꿍얼거리며 돌아섰다. 굽은 등 뒤에서 어흠, 하는 헛기침 소리와 작게 중얼거린 욕이 들렸다. 희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남자를 쳐다보지 않고 거들어준 커플에게 짤막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해영은 머쓱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손님을 응대하고 음료를 만드는 희소를 흘끔거렸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다시 돌아오고 조금 전의 소란은 없던 일인 것처럼 지나갔다. 몇 차례의 주문을 더 받고 음료를 만들고, 인사를 하는 동안 희소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빠. 내내 말 한마디도 하지 않던 희소가 얼음을 가지러 해영의 곁으로 다가오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따 잠시 봐요. 얼음을 퍼 컵 안에 넣으며 고개만 돌린 희소의 말에 해영은 잠자코 끄덕였다.


  미안해요.

  해영은 예상을 벗어난 서두에 눈을 데굴 굴렸다. 알바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희소는 아예 허리까지 숙여 사과했다. 장난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장난칠 기분도 아닐 것이고. 해영은 옆을 지나다니며 이쪽을 힐끔거리는 행인을 슬쩍 바라보다 다시 희소를 바라봤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시선이 쏠리는 것도 모르는지 희소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심하는 듯했다.

  어제 연락 왔었어요.

  연락. 해영은 곧바로 희소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엊저녁 며칠간의 연락이 쌓인 휴대폰을 쥐고 울었던 게 떠올랐다. 어제 본 문자에 희소가 있었던가, 해영이 문자의 내용을 되짚기 전 희소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사채요.

  희소의 얼굴은 두려움이나 미안함이라기보다 분해 보여서 해영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미안해. 차단해도 할 말이 없어. 근데 이건 내가 미안해야 할 일 아니야?

  희소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내내 어색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솔직히 안 올 줄 알았어서…… 이제 괜찮은 거예요?

  해영이 대답하지 못하자 희소가 죽상이 된 얼굴로 괜한 걸 물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영은 괜찮지 않았지만, 희소의 반응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얼른 해결할게.

  해결 못 할 걸 알면서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덧붙이자 희소의 얼굴이 펴졌다. 희소는 너무 오래 잡아둬서 미안하다며, 아까 고마웠다고 꼼꼼하게 인사를 전했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희소의 말을 비집고 희소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한결 가벼워진 얼굴의 희소를 부른 중년의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정수리 부근에 새치가 듬성듬성 난 탓에 그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가슴 부분에 보라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고 탁한 회색과 남색이 섞여 오묘한 색을 내는 카라 반팔 티를 입은 남자였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확인한 희소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아빠. 여긴 웬일이야?

  아빠? 해영은 눈매를 가늘게 좁혀 남자를 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설명하려다 말고 희소의 어깨 너머 뻘쭘하게 서 있는 해영을 바라봤다. 넉살 좋게 웃던 남자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해영과 눈이 마주치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뒤로 물렸다. 눈치채고 있던 해영이 뒤늦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던 찰나, 검지를 치켜들고 입술을 옴찔거리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아 있잖아?

  영문을 모르고 남자와 해영을 번갈아 보던 희소가 경악하며 돌처럼 굳은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휘둥그레 놀란 얼굴로 해영을 가리킨 손가락을 내릴 생각을 일절 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해영은 몇 걸음 물러나 주춤거렸다.

  나 기억나죠. 어제 만났잖아요.

  희소가 재빠르게 따라붙어 남자의 소매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빠 진짜 왜 이래. 오빠를 어떻게 알아? 희소가 어깨를 두드리고 흔들어도 남자는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해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어요. 이름도 모르는데. 박경준이에요.

  해영은 어제 경준을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숲을 찾아갔고, 나이아 숲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경준에게 물었다. 현지인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틀 연속으로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영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경준은 여전히 신기하다는 얼굴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경준은 동생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믿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째서 살아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은 틀림없이 자살하러 들어간 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해영입니다.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경준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해영은 주춤거리며 어제는 감사했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경준은 묻고 싶은 게 많다며 시간이 괜찮다면 함께 카페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희소는 체념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쉬었다. 해영은 뒤에 일정이 있다고 거짓말하려다가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경준의 눈빛에 얼떨결에 승낙했다. 해영은 예정에도 없던 카페에 따라 들어갔다. 다행인 건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도로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두 블록 떨어진 경쟁사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쾌적한 실내에 들어서자 유행하는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노래가 애절하게 고음을 내질러서 해영은 눈매를 살짝 좁히며 앞장선 경준을 따라 카운터로 향했다. 아르바이트 외 목적으로 카페를 방문하지 않았기에 해영이 머뭇거리고 있자 경준이 가죽 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가 살 테니까 뭐든 시켜요. 희소는 여전히 불만과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경준의 옆에 딱 달라붙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늘 주문을 받는 입장이었는데, 반대가 되니 말투만 친절하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앉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자꾸 시선이 가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 전 이걸로…… 해영은 메뉴판에서 아메리카노를 가리켰다. 5,000원은 훌쩍 넘지만 한 끼를 대신할 수 없는 음료 중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경준은 희소에게도 무엇을 마실지 묻고, 가격표 오른편에 가게의 인기 메뉴라는 문구가 작은 손 글씨로 쓰인 슈크림 케이크와 함께 시켰다.

  동생은 찾았어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경준이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희소가 옆에서 눈치를 주려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해영을 바라봤다. 해영은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두 시선을 애써 피하며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아마도요.

  경준은 대놓고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해영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경준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금세 울리는 진동벨을 옆에 있던 희소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가 다녀와. 싫어. 그럼 내가 가리? 희소가 미간에 힘을 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빠한테 이상한 말 좀 그만해. 자기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경준에게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린 희소가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로 갔다. 희소의 생소한 모습에 해영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경준을 바라봤다.

  오기 전에 얘기할게요. 전 요괴에게 딸을 잃었습니다.

  멀어진 희소를 힐끔거리며 경준이 빠르게 본론부터 꺼내자 해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주할 용기는 없어서 어제도 그 숲 주변만 돌고 있었고요.

  희소가 진동벨을 카운터에 돌려주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경준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경준은 초면이나 다름없는 해영에게 무례임을 알면서 물을 수밖에 없다는 듯 절박해 보였다.

  요괴를 만나셨습니까.

  해영은 느리게 고개를 움직였다. 경준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급박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경준은 목소리를 낮추며 가까이 다가왔다.

  요괴를 마주했는데도 그가 살려줬다고요?

  희소가 음료 세잔과 케이크를 담은 트레이를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무슨 얘기해, 나 빼고. 경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대화는 그렇게 종료되는 듯했다. 희소는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경준과 해영을 바라보다 소파에 힘 있게 앉았다. 희소는 경준과 해영 앞에 아메리카노를 놓고, 자몽 에이드를 자신의 앞에 두었다. 희소의 손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경준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희소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쳐다봤다. 에이드 내가 시켰잖아. 이거 먹고 싶어졌어. 경준은 잠시 고민하다 희소의 논리에 쉽게 납득하고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에 빨대를 꽂았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제 말해. 충분히 참은 희소가 물었다. 어제 만났어, 식당에서.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희소가 살아있었냐는 말은 뭔데, 묻자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길래, 담담하게 대답하며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술? 오빠 술 안 마시잖아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타깃을 해영으로 바꿨다. 해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비협조적인 둘의 태도에 답답하기만 한 희소는 됐다며 박력 있게 에이드 잔을 쥐고 들이켰다. 해영은 희소를 따라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가 쓴맛에 질겁하며 슬그머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별일은 아니지만, 어제 그분은.

  딴청 하며 교차한 다리를 까딱이고 있는 경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자 희소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해영을 노려봤다. 자신이 음료를 가지러 갔다 온 그 짧은 사이에 대체 얼마나 많은 얘기가 오간 건지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긴 머리에 키는 160센티 정도. 조금 작았어요.

  포크로 케이크 끝을 긁어 부스러기를 포크 위에 쓸어 담던 경준은 처음엔 희소와 비슷한 표정을 짓다가 말의 뜻을 알았는지 평온해진 얼굴로 포크를 들어 입 안으로 넣었다. 여자? 소개팅했어? 희소가 자신만 소외시키는 것이 내심 서운했는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캐묻는 것은 포기하고 이 정도는 대답해 주라는 얼굴로 물었다. 해영이 선선히 대답하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준은 포크를 위로 치켜든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긴 머리카락, 작은 키. 사람의 외형에 여자라는 것. 해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희소의 질문에 적당히 지어서 대답했다.

  각오할 겨를도 없이 갔지만요, 살려줬어요.

  물론 술 내기요. 해영은 그럴듯하게 말을 꾸며내며 의미 없이 빨대를 휘저었다. 경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검게 가라앉은 경준의 눈동자가 탁해 보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딸이 그 여자에게 죽었다고 하니 상심할 만도 했다. 그런 이유로 해영은 말을 꺼내기를 망설였다. 경준을 마주했을 때부터 무엇을 물을지는 뻔했기에 대답을 피할 궁리만 했었는데, 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경준의 목소리가 너무 절박해서, 자신이 아는 별거 아닌 정보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것이 얼굴에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 마음이 이해돼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이면서 경준에게 있을 마음의 짐을 조금 덜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줄곧 절박했던 경준의 표정은 말을 들으면서 점점 어두워져서, 해영은 무심코 그 여자는 곧 죽을 거예요, 실토할 뻔했다. 정작 그 약속이 진짜인지 계속 의심하고 있으면서. 해영은 경준을 자신과 겹쳐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이해했다. 복잡한 표정 속에 슬픔과 애도로 얼룩져 있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이 말을 반드시 해야만 했다.

  물론 더 만나진 않을 겁니다. 이제 끝이에요.

  허공을 응시하던 경준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경준은 변화 없는 표정으로 해영을 바라봤다. 경준은 어제 동생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어도 생각했을 이상적인 동행은 없을 거라는 일종의 선언이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체념이었다. 희소는 묻고 싶은 것이 많은지 연신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눈치껏 침묵을 지켰다. 경준은 말없이 얼음밖에 남지 않은 잔을 흔들다 얼음이 녹아 고인 탁한 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에이드 마실 걸 그랬네, 경준의 중얼거림에 녹아 흐른 감정이 흩뿌려졌다.     

                                                                                          

                                         *


  해영은 걸음을 서둘렀다. 경준의 절박함을 알면서 일종의 놀이처럼 그가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정보를 준 것은 섣부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 요괴뿐 아니라 경준에게도 마찬가지란 걸 그 역시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기 전 그의 의미심장한 얼굴이 옷에 스며든 새물내처럼 잊고 있다가 불쑥 침투할 것을 알면서도 해영은 그렇게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원의 빈자리가 실감 나지 않는 데다 숲에 가느라 빠졌던 알바, 멋대로 연락을 끊고 잠적했던 사채 일까지 해영은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일이었다. 동정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작은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누군가의 기대를 받고 책임지지도 못할 약속을 하기에는 자신의 삶은 너무 비루했다. 지나친 세월이 적어 아직 목을 베지 못한 탓에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늘 생각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새 삶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고 허전하고 보잘것없는 삶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그러니 조금 매정해 보여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며 서로를 안전하게 갈라놓는 선이었다. 해영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복층 주택의 파란 지붕을 올려다봤다. 파란 지붕은 몇 블록만 더 가면 집이 나온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해영이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를 꺼내자 해원의 몫까지 하나의 고리로 묶인 열쇠가 찰그락 소리를 냈다. 해영은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꽂으려다 말고 옆으로 비켜섰다. 미세하게 열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문가에 걸터있었다. 해영은 조용히 문 가까이에 귀를 댔다.

  씨발, 이라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해영은 사색이 되어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폈다. 강 씨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소리가 들릴까 굳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해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소리를 내면서 왔음에도 문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으니 듣지 못했거나 지나다니는 행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영은 예고 없이 찾아올 만한 목적을 나열하다 이대로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자리를 피해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모텔, 홍등가, 이번엔 또 어디에 빌붙어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 말은 무사히 도망치는 것을 전제로 둔 철없는 투정처럼 들려서 해영은 곧바로 말을 철회하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현관문에서 멀어져 무사히 딱딱한 아스팔트를 밟았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냐.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한낮의 쨍한 햇빛처럼 꽂혔다. 조소와 냉소가 섞여 아찔하게 땀방울을 타고 흘렀다. 해영은 목소리의 주인을 인지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야 인마! 신해영! 아스팔트를 박차는 두 개의 발소리가 엇갈리다 맞닿기를 반복했다. 스포츠형이 미친 듯이 이름을 부른 탓에 소리를 듣고 집 안에 있던 남자들이 떼거리로 나왔다. 욕지거리와 조롱이 가득한 소음 속에서 해영은 파란 지붕을 지나쳐 반대 방향으로 걷는 행인들을 피해 달렸다. 불안에 떠는 눈, 소란에 찌푸린 얼굴, 비난과 의문의 시선이 교차하고 얽혀 해영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달리던 해영은 아파트 가에 도달해 근처 빌딩으로 들어갔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지 미지수인 데다 7층이나 되는 빌딩에 몸을 숨겨 숨을 돌리며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잡히지 않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과 무사히 도망이 가능할 거라는 전제는 극심한 공포를 숨기려 마음 깊숙한 속에서 가장 멍청한 형태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뒤따라오던 무리의 소리는 어느샌가 잦아들어 고요했다. 해영은 계단을 세 칸씩 뛰어오르며 연신 뒤를 흘긋거렸다. 해영은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에서 오는 돌발성과 예측 불허가 끔찍이도 싫었다. 그는 비상계단을 타고 올라가 어디든 몸을 숨겨줄 곳을 찾을 계획이었다. 확실히 해영은 두려움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차라리 뻥 뚫린 도로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 혹은 그대로 달려 경찰서로 직행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은 한참 후에 들었다. 해영이 잠시 멈춰 서 숨을 고를 때, 굉음과 함께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한층 위 비상구에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이나 악당을 처치하러 온 영웅처럼 뛰어든 스포츠형이 질겁하여 도망가는 해영의 뒷목을 잡아챘다.

  아, 이, 씨발…… 그대로 벽에 밀어붙인 스포츠형은 딱딱한 벽에 얼굴을 세게 부딪혀 잠시 정신을 잃은 해영의 머리를 짓누른 채 밭은 숨을 씨근거렸다. 도망치는 이유 네가 더 잘 알지. 스포츠형이 귀 가까이 붙어서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폰은 장식이냐? 매번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스포츠형은 작색하고 분노를 짓씹으며 귀엣말했다. 그에게서 특유의 인센스 향이 났다. 스포츠형은 억눌린 기침을 뱉는 해영의 뒷덜미를 잡은 채 거칠게 끌어내렸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게 된 해영의 뺨을 가로질러 피가 흘렀다. 새된 기침을 뱉으며 쉽게 초점을 잡지 못하는 해영의 뺨을 내려친 스포츠형이 신음하는 해영의 옆구리 양옆으로 다리를 벌린 채 힘을 주어 섰다. 한쪽 다리 자세를 바꿔 명치를 짓누르는 무릎과 죽여버리겠다는 듯 무게를 실어 목을 짓누르는 억센 손아귀. 단추가 풀어져 벌어진 난방이 콧날을 스쳤다. 담배 냄새와 시큼한 땀 냄새가 뒤섞여 흐려지는 시야 속에 연기처럼 퍼졌다. 개새끼가, 이 씨발놈이, 거친 부름으로 시작하는 말과 반동을 주어 가슴을 누르는 무릎에 정신이 혼몽해졌다. 이대로 죽으면 개죽음인가 호상인가, 사지가 묶여 산 채로 장기가 뜯기는 게 아니라 다행인 건가. 부모는 진작에 이혼하고 갈라져 생사도 모르고 해원은 죽었다. 남은 빚은 오로지 제 몫이니 멍청한 이 남자의 손에 오늘 전부 탕감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언제 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삶이었다. 실망해서도 아쉬워해서도 안 되는 한심하고 비루먹을 삶이었다. 남긴 미련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핑 돌아 관자놀이를 타고 줄줄 흘렀다. 어쭈, 울긴 왜 우냐. 스포츠형이 이죽이며 한 손을 떼 옆얼굴을 툭툭 치다 주먹을 쥐고 머리를 가격했다. 벌게진 얼굴에 핏대가 솟았다. 눈앞이 핑글 돌고 잊었던 구역감이 올라와 발버둥을 치자 더욱 힘이 실렸다. 아, 이 새끼, 힘이 남아도나 봐? 스포츠형의 이마에도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스포츠형이 해영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것이 촉발이 된 것처럼 정신이 휘까닥 넘어가기 직전 남은 힘을 쥐어짜 복부에 발을 내질렀다. 제 목을 조르던 손이 허공으로 쑤욱 들렸다. 막혔던 숨을 들이켜기 바빠 몸을 둥글게 말고 목을 감싸 쥐는데, 그대로 들려 걸음이 꼬인 남자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흘러갔다. 배를 감싸 쥐고 크게 기침을 토하던 스포츠형이 비명을 내지를 듯 말 듯한 이상한 얼굴로 팔을 허공에 뻗은 채 계단 밑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퍼억, 딱딱한 수박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스포츠형의 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스포츠형의 머리가 부닥친 계단 모서리마다 혈흔이 있었다. 머리에서 세 갈래로 흐르는 피가 이마와 미처 감지 못한 눈동자를 지나 콧날을 비켜 얼굴을 세로로 갈랐다. 해영은 차라리 이대로 숨이 멎길 바랐다.

  “신해영!”

  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계단을 박차는 여러 명의 구두 굽이 지척에서 들려 해영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세 칸씩 뛰어내려 차가운 바닥에 잉크처럼 퍼지는 핏자국을 피해 비상문을 열어젖혔다. 평일 낮이라 빌딩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해영은 제 옷에 핏자국이 묻었는지, 계단이나 남자의 옷에 묻은 발자국이 불리하게 적용할지, 비상계단에 시끄럽게 부닥치던 구두 굽 소리가 왜 멈췄는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걸음이 닿는 곳으로 몸부림치듯 뛰었다. 낡은 운동화 끈이 풀려 몇 번이고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해영은 멈추지 못해 내달렸다. 매캐한 혈향과 은밀한 인센스 향이 코끝에 맺힌 눈물에 섞여 들었다. 엄마, 해영의 입에서 흐느낌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모친이 집을 떠나기 전에도 불러본 적 없는 달콤한 애칭이다. 그의 기억이 시작된 이래로 그는 줄곧 이름 모르는 타인처럼 부르고 대했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못해 성인이 된 지금에야 미련을 남긴 사람인 것처럼 그는 애타게 매달릴 곳을 찾아 헤매듯 휘청이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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