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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3. 비일상

물 위를 걷는 사람


  소현은 편의점을 나서며 점장 임 씨에게 인사했다.

  소현 씨, 가려고?

  유리문에 달린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자 안쪽에서 발주를 확인하던 임 씨가 빛바랜 녹색 유니폼 조끼를 입은 채 헐레벌떡 나왔다. 소현은 무조건 반응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리며 그런데요, 대답했다. 알 수 없는 거뭇한 자국이 문양처럼 눌어붙은 조끼를 내려 본 소현의 눈이 공허해졌다. 임 씨가 웃자 소현도 살짝 시선을 피하며 적당히 대꾸하듯 따라 웃었다.

  그건 생각해 봤어?

  무슨 말씀 하시는건지……

  또 그런다, 정말 그만둘 거야?

  소현은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임 씨가 더 붙잡기 전에 큰 소리로 인사하며 편의점을 나왔다. 딸랑, 원 플러스 원 할인 행사와 날짜가 적힌 포스터가 크게 붙여진 투명 문 너머로 아쉬움을 삼킨 임 씨가 도로 들어갔다. 소현은 니트 재질의 브이넥 카디건을 벗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소름이 끼친 팔뚝을 꽉 잡아 중얼거렸다.

  더러운 새끼, 집적거리기나 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고 확실히 말해둔 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해영의 부탁을 받고 대타를 온 것도 늙다리 점장이 아직도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현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처 없이 끈적하게 소현의 몸 위를 휘돌던 시선이 생각나 당장이라도 시원한 물줄기를 뿌려 느낌을 지워내고 싶었다. 진동으로 설정한 휴대폰이 울려서 소현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막연히 저녁에 만나기로 한 예지나 언제 오는지 묻는 엄마의 전화라고 생각해 통화 버튼을 누를뻔한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연락처에 저장하지 않은 번호였는지 발신자의 이름은 뜨지 않았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지만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해영 씨 아세요?

  여보세요, 운을 떼기 전에 다짜고짜 본론부터 던진 너머의 목소리가 거칠어 소현은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떼 화면을 내려 봤다.

  지금 해영 씨가 돈을 쳐빌려 가셔서 안 갚았거든요?

  구두 소리. 소현은 전화기 너머 자그마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을 죽였다. 최소 대여섯의 발소리가 들렸다.

  해영 씨랑 연락되세요?

  결국 급하게 본론으로 넘어간 얘기에 소현은 적당한 말을 고르려 말꼬리를 늘였다. 작은 한숨이 허락된 인내처럼 들려 소현은 속사포로 잘 몰라요, 대답했다.

  연락되면 이 번호로 문자 남겨주세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통화는 마무리 지어졌다. 전화가 완전히 끊기기 전 곁에 있는 다른 이에게 말하는 듯한 욕지거리에 벙찐 소현은 아랫입술을 입 안으로 넣었다. 사채라니, 현실과 유리된 것처럼 멀어 보였던 것이 단숨에 피부로 와닿았다. 소현은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해서 연락처에서 해영의 번호를 찾은 후에도 주저했다. 이제라도 연락처를 지워버려야 하나. 직접 찾아오진 않겠지? 소현은 거리에 멈춰 서 커다란 가죽 숄더백의 스트랩에 올려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 휴대폰 전원을 눌러 껐다.

  연락이 끊기니 미처 세우지 못했던 자존심이 잡초처럼 자라나 해영의 연락처에 있는 사람 중 왜 하필 자신에게 연락했는지 불만하다 연락처에 저장된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누그러졌다. 소현은 뒤늦게 해영의 상황이 걱정되어 휴대폰 화면을 들여 보다 말기를 반복했다. 소현은 괜히 알바 대타를 해줬다고 생각하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잊기로 했다. 어딘가에 몸을 잘 숨겼으니 잠적한 해영을 찾아 자신에게 전화가 왔으리라.

  소현은 통화 버튼을 잘못 누르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번호를 복사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창에 번호를 붙여 넣자 ‘010으로 시작하는 모든 번호’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이 상단에 뜰뿐 ‘즉시 대출’이나 ‘일수 전문’ 같은 문구는 없었다. 원래 인터넷에 사채 정보가 뜨지 않는 건지 소현은 알 길이 없었지만 멈춰 서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자신은 불안에 떨 만큼 잘못한 것이 없고 사채를 하지도 않았으니 이대로 모른 척 지내면 해결될 일이었다. 해영이 돈을 빌렸든 연락이 안 되든 깊게 관여할 일도 아니었다. 해영이 먼저 연락해서 자신의 위치를 순순히 불어버릴 일은 없을 테지만, 설령 연락했다고 해도 그것을 사채 쪽에 곧이곧대로 넘겨줄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연락처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돌리다, 마침 휴대폰을 진동으로 설정하고 알바가 끝나 여유가 있었으며 모르는 번호지만 덥썩 받아 얻어걸린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설마 나 혼자 전화를 받진 않았겠지, 소현은 숄더백에서 에어팟을 꺼내 양쪽 귀에 꽂고 휴대폰을 들어 올려 아직도 두근대는 가슴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으로 설정한 트로트가 구성지게 흘렀다. 하이라이트가 끝나기 전에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소현은 남몰래 안심했다.

  엄마, 나 방금 누구한테 전화 왔는지 알아? 사채야, 사채. 아니, 내가 사채를 했다는 게 아니고, 아는 오빠가 돈 빌리고 안 갚는다고 나한테 연락이 왔지 뭐야. 그니까, 진짜 무섭더라…… 응, 오늘 예지 만나기로 했어. 금방인데 뭐, 응, 지금 거의 다 왔지. 알았어.

  소현은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순애의 목소리를 듣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소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SNS 계정에 접속했다. 예지가 올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피드에 올라온 글을 무심하게 넘겼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과시 속에서 소현은 차분해졌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의 물기를 걸친 앞치마에 대충 문지르며 순애가 헐레벌떡 중문 앞까지 나왔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갈 거야. 이거 김치찌개 냄샌데.”

  “더 연락이 온 건 없고?”

  “어, 없어. 없어.”

  순애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소현은 괜히 마음이 울렁거려 순애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 오빠가 고생이지 뭐, 걔네 내 연락처만 알고 얼굴도 모를걸?”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얼른 들어가자.”

  순애는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과보호나 과잉 참견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오십이 다 되어 낳은 늦둥이 딸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신경 쓰였다. 자신의 어린 딸은 확실히 심장을 덜컥덜컥 내려앉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순애의 시선이 휴대폰 모양으로 빳빳하게 당겨진 바지 주머니를 향하자 소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과보호야, 그렇게 항의하는 것이겠지. 순애는 순순히 시선을 뗐다.

  “그 남자애랑 더 연락하지 마. 그쪽이랑 엮일까 무섭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이제 괜찮다니까? 이 오빠 그 오빠야, 잘생겼다고 했던.”

  “잘생기고 뭐고 멀리하라면 멀리해.”

  “내가 관심 간다니까 좋아 죽더니.”

  순애가 자신보다 호들갑이니 오히려 소현은 침착하게 이성을 찾았다. 입술을 비죽이는 소현의 등을 아프지 않게 친 순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 연락 안 해, 끝. 됐지? 나 옷 입으러 간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적만 해도 불안이 역력하던 소현의 얼굴은 안도를 넘어 귀찮아 보였다. 순애는 소현의 팔자걸음을 지적하려다 말고 소파에 주저앉듯 몸을 기댔다.

  최근에 관심 가는 사람이라며 소현이 사진을 보여줬던 건 기억나는데, 그 옆에 소현의 웃는 얼굴만 얼핏 기억나고 남자의 얼굴은 뿌옇게 흐려진 것처럼 가물거렸다. 멀끔하게 생겼던 것도 같은데 사채나 하고 다닌다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순애는 강경하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동정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동생이랑 둘만 산다고 했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녀에겐 항상 소현이 최우선이었다. 순애는 소현이 들어간 방문을 쳐다보다가 혀를 차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김치찌개 끓는 소리가 부글거리다 잦아들었다.     


  소현은 방문을 닫았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한 탓에 시원한 여름 이불은 반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는 옷가지로 어질러져 있었다. 소현은 카디건을 의자에 던지듯 걸어두고 잠시 시선을 주다 옷장을 열었다. 옷걸이로 건 옷과 순애가 정갈하게 개어 놓은 옷이 빽빽하게 비좁은 옷장을 채우고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봄옷을 산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날씨가 더워져서 긴팔을 입으면 쪄 죽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반팔을 입자니 2년 전에 산 탓에 유행이 지난 옷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건 귀찮았지만 헌팅 포차에 가기로 했으니 예지가 예쁘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올 것이 눈에 선했다. 예지는 눈이 크고 예뻐서 꾸밀 맛 나겠지, 소현은 옆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르바이트해서 쌍수나 하려고 했는데 그 점장 새끼 때문에, 소현은 떠오른 얼굴을 짜증스럽게 지워냈다. 소현은 얼마 전에 기존에 애용하던 쇼핑몰에서 시킨 옷이 실밥이 풀려 있고 냄새가 나서 급하게 다른 쇼핑몰에서 여름옷을 시켰다. 괜찮은 곳을 검색하고 그 안에서 옷을 찾으려니 예정보다 시간이 걸렸다. 발송은 빨랐으나 옷은 사흘 후에나 배송될 예정이었다. 거기가 배달이 빨랐다는 거 하난 좋았는데, 소현은 하는 수 없이 옷장을 뒤적거렸다. 유행 지난 옷, 촌스러운 옷, 연예인 따라 산 옷. 마음에 들지 않는 옷만 잔뜩이라 소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리본이 달린 하늘하늘한 푸른 계열의 블라우스와 흰 치마를 꺼내 들었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화장을 수정하자 나름 괜찮아 보였다. 예상보다 과하고 확실했던 순애의 반응에 어느새 은근한 불안은 흔적만 겨우 남을 정도로 사라지고, 자랑하듯 떠들고 다닐 말은 아니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흥미로운 얘깃거리 정도로 벌써 지나간 일이 되었다. 소현은 앞머리를 구르프로 말고 책상에 올려둔 심플한 무채색의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소현은 콘센트에 꽂아놓은 고데기의 열을 확인하며 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이어지다 예지가 받았다.

  나 준비 중. 10분 뒤에 집 앞에서 만나. 아, 나 방금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사채 전화 왔어. 아니, 나 말고. 그 오빠 있잖아. 그래, 신해영. 그 오빠 좀 생겼잖아. 아니, 좋아한 건 아니고. 응,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전화하냐고……   

                                                                                                                                 *     


  해영은 곧장 집으로 가 휴대전화를 충전했다. 천장 가까이 뚫린 작은 창문 너머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가 보였다. 늘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체념하고 한탄하기만 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파트 너머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즈음의 시원한 공기와 애수에 잠긴 하늘은 붉은 기가 섞인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내리쬐던 햇빛은 먼 치에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해영은 울렁이는 마음을 추스르며 긴 호흡을 뱉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고 여전히 가슴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거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없었던 일처럼 털어버리고 살아내야 했다. 까만 화면이 켜지기를 기다리던 해영의 시선 끝에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종이 쪼가리가 보였다. 사채업자가 집에 들렀다면, 이 종이를 봤을까. 해영은 제 실수를 자책하며 쪽지를 집어 들었다.  

   

경찰에 실종 신고하는 거 아니지? 쪽지를 먼저 발견했길 진심으로 바라.

난 지금 자살 숲에 갈 거야. 오늘 안에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미리 말하지만 자살하러 가는 거 아니야! 찾으러 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야. 그냥 돌려받으러 가는 거야.     


  꼬깃꼬깃 구겨진 흰 종이 위 동글동글한 필체를 보자 해영은 괜스레 웃음이 나서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오늘’이 언제인지, 처음 쪽지를 발견했을 때 패닉에 빠져 고민했었다. 이젠 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라는 거. 해원은 언제 죽은 걸까. 해영의 눈가가 어둑해졌다. 쪽지를 발견하고 무작정 숲에 갔던 오늘은 아닐 테니, 해원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은 어제? 혹은 그보다 더 전에? 해영은 강 씨가 찾아오기 전날, 해원에게 친구 집에서 며칠간 있으라고 당부한 후 집을 나왔다. 적어도 일주일은 집에 안 들어올 것처럼 굴더니 나흘도 채우지 못하고 집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일까. 친구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영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부도가 난 집. 완전히 와해된 가족. 기억 속 모습이 단 하나로 좁혀진 부모는 이혼 후 고작 열 살배기 해원을 남긴 채 제각각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해원은 머리가 커 가며 부모님이 없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학급 친구들. 채워주고 싶었다. 그 애 가슴에 있는 공백을. 내가 느꼈던 감정이니까. 부모의 사랑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해원은 그 길로 소원을 들어주는 요괴가 있다는 숲으로 향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친구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해영은 조명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인고 끝에 불이 들어온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켜 장례 치르는 법을 검색했다. 여전히 믿고 싶지도, 믿기지도 않지만, 회피하고 좋을 대로 단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추모의 시간이었다.     


  미안하다. 제대로 된 식은 못 치러줘서.

  해영은 간단한 절차를 마무리하고, 밝게 웃는 해원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더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종종 있는 정전을 대비해 가지고 있었으나 다 녹아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며 불어 껐던 몽당초를 사진 옆에 두었다. 타는 냄새와 뿌연 연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장례를 짐작할 수 있는 거라곤 상복 대용의 까만 정장뿐이었다. 조문객도 곡소리도 없는 장례식은 어린 생명이 탄생한 순간부터 늘 그래왔듯 빈곤했으며 고요했고 기쁨이 없었다.

  이런 때에도 돈부터 걱정해서 미안해.

  해영은 나무처럼 서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눈가를 짓눌렀다. 너무 슬퍼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모든 슬픔은 손바닥 안에 넘치지 않게 담아두었다. 감은 눈을 꽉 누르니 희끄무레한 하얀 원 테두리가 일렁거렸다. 해영은 천천히 손바닥을 뗐다. 6평 남짓한 고요한 사각의 방 안에는 낡은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만 있었다. 해영은 홀로 조촐하게 치른 장례를 정리하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취직을 위해 아껴둔 돈으로 산 까만 정장은 길이가 짧아져 손목과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차라리 그 돈으로 해원이 먹고 싶어 했던 거, 갖고 싶어 했던 거나 사줄 걸, 후회는 늘 한 걸음 늦게 왔다. 그것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질리도록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해영은 휴대폰을 켰다. 알림을 꺼둔 탓에 알지 못했지만 전화와 메시지 앱 위에 999+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해영은 부재중 전화부터 확인했다. 강 씨와 다른 사채업자들의 이름으로 몇백 건의 부재중 기록이 있었다. 나머지는 평소 연락하던 지인들부터 연락이 뜸하거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해영은 신음하며 무릎 위에 이마를 박았다. 몸조심해라. 연락 왔는데 이거 뭐야? 차단한다. 씨발 뭐냐? 한 명 한 명 답장을 하다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머뭇거렸다. 강 씨. 해영은 문자를 확인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확인하지 않고 넘겼다. 메시지 미리 보기 화면을 통해 보이는 문자 내용이 씨발 새끼야, 로 시작한 순간부터 기대를 벗어나는 말은 없을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최악의 하루였다. 해원이 사라지고, 요괴를 만나고, 강 씨가 찾아올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집까지 꾸역꾸역 들어왔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강 씨가 이번에야말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지장 찍었던 종이에 신체 포기각서 같은 것을 덧붙여 올 수도 있다. 그것이 법률상으로 무효이든 아니든 해영에게 중요한 것은 멀기만 한 법이 아니라 이행의 시점이 지연될지언정 중단되지 않는 강 씨의 철칙이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패면 맞고 내놓으라 하면 수긍하는 삶은 죽지 않을 정도로 패는 관용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돌연 잠적으로 끊겼다. 안전이 확보된 적당한 곳을 찾게 되면 해원을 데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란 계획은 급조된 만큼 엉성하며 서툴렀다. 언제 다시 떠나야 할지, 이번엔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아무 답도 결정도 내리지 못했지만, 해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해원이 사라진 이후부터 줄곧 예민했던 감정이 한바탕 지나고 뒤늦게 냉정이 뒤덮였다. 강 씨에 대한 생각을 덮어두니 숲에서 만난 여자가 생각났다. 해영은 느꼈던 감정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꿈같은 만남을 떠올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숲의 요괴를 직접 마주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도 전부, 허상 같았다. 그 모든 게 짜인 극같이 이질적이었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만, 죽이지 않고 하물며 기억도 지우지 않고 멀쩡히 보내준 것이 괜히 찜찜했다. 게다가 순간 욱해서 죽어버리라고 말한 걸 소원이라고 생각하다니, 그걸 또 들어주겠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해영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압하며 두 눈을 감았다. 잊어버리자. 없었던 일인 거야. 그 여자도 진짜 죽는 건 아니겠지. 설령 죽는다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고. 해영은 찜찜한 마음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시선이 맞닿는 곳마다 해원의 흔적이 있었다. 이 작은 방이 늘 부끄럽기만 했는데, 혼자가 되니 벅찰 정도로 넓어 보였다. 여름밤인데도 방 안은 서늘했다. 해영은 묻어둔 슬픔의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손톱으로 세게 눌렀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촛농이 눌어붙은 몽당초는 제 몸의 마지막을 불사르고 있었다. 해영은 불어 끄지도 눌러 끄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떨어진 촛농이 금세 굳어 변모를 거듭했다. 가운데가 움푹 함몰된 초의 심지는 이미 까맣게 말라비틀어져 구부정했다. 해영은 최후를 들이마셨다. 약간의 틈을 두고 창문을 가린 두 장의 빳빳한 종이 양 끝에 테이프가 붙어 있다. 아닐 비(非)가 다짐을 망가뜨리기 전에 모서리가 작게 찢어진 탓에 훤히 보이는 바깥을 바라보다 찢어진 자리 위에 테이프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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