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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2. 자살 숲

물 위를 걷는 사람


  해영은 갈증이 일어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땀이 흘러 들어간 눈이 따끔거렸다. 아직 하지가 지나지 않았는데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왔음에도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핑글 돌았다. 해영은 들고 있는 선풍기로 기울인 고개 반대편 목 부근에 바람을 쐬고 땀이 흐르는 뺨에 가까이 가져다 대기를 번갈아 했다. 손등으로 열기에 화끈거리는 뺨과 눈두덩이를 차례로 누르며 두 눈을 꽉 감았다 뜨자 부유스름한 시선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라 포장되지 않은 산책로가 보였다. 해영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이아 숲은 수해(樹海)로, 인근 호수 공원과 함께 개발되면서 비록 가장자리이긴 해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해영은 쨍하니 울리는 벌레 울음에 멍멍해진 귀로 오랫동안 방치된 흔적이 종종 발견되는 산책로를 따라 모로 걷다가, 크게 곡선을 그리며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오자 왔던 길을 돌아봤다. 나무가 첩첩이 공백을 채워, 초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길었던 어둠 끝에 발견한 동굴의 출구처럼 하얗게 터져 나온 빛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예리한 손끝으로 나무의 허리를 끊거나 구불구불한 나무 테두리를 흐리고 반짝이게 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소문에 비해 목격담은 거짓인지 진실인지 검증되지 않은 단 하나뿐이기에 산책로를 따라 끝까지 걸어간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길을 벗어난대도 곧바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운이 나쁘면 금세 어둠이 덮은 숲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해영은 잠시 갈등하다 다듬지 않은 옆길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들을 위한 전용로가 아니기에 작은 돌부리나 잡풀이 제거된 휑한 흙길과 멀어질수록 엉겨 자란 풀이 발목 위를 간질였다. 해영은 발밑과 정면을 번갈아 보며 이제 막 움튼 푸른 싹을 밟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걷다 마땅히 밟을만한 지점이 없어지자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뒤꿈치를 내려 걸었다. 해영의 발밑으로 억센 풀이 꺾이고 짓눌렸다.

  해는 아직 머리 위에 있는데 울창하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공중에서 뾰족탑 모양으로 얼기설기 얽혀 초저녁처럼 선선하다. 해영은 몇 걸음 걷다 멈추고 일정한 간격마다 크고 넓적한 돌 위에 작은 조약돌로 방향을 표시하며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배터리가 조금밖에 닳지 않은 휴대전화로 지도를 보며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가정과 불안으로 몇 겹씩 둘러싸인 고질적인 강박과 평정은 그의 습관이자 자기방어다.

  이혼과 방임, 떠남과 흘러감이 도미노처럼 매끄럽게 이어질 때부터 해영은 단 하나의 어긋남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질서 있게,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부모의 이혼은 최초의 어긋남이었기에 빈틈없음과 강박으로 포장한 허둥이는 삶을 살았다. 잘못 끼운 첫 단추나 톱니바퀴인 줄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살아간 방식은 결국 답습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되짚어본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 비스듬히 열린 문틈과 짐승 같은 헐떡임, 파고드는 행위를 통해 얻는 안정과 겹치지 않는 것에 선천적인 두려움을 가진 가난한 욕망, 관계의 종결과 이어진 부친의 비정상적인 강박을 작은 틈새로 엿본 두 눈동자에 깊게 화인을 새긴 듯이, 살아남기 위해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자신에게도 해원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 해원은 가끔 참지 못하고 불만을 표했지만 해영은 자신의 방식을 믿었다. 아마도 그것마저 강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늘 잘 정돈된 머리카락과 옷차림은 흐트러져 엉망이고,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손을 대는 게 맞긴 한지도 알 수 없었다. 어긋나고 뒤틀어지고, 내재한 본성과도 같은 강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땀으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해영은 억누른 숨을 푸욱 쉬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고 의욕과 불안이 앞서 무작정 떠나온 길이다. 해원이 자신의 강박에 질려 떠났든 부모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상처 입고 떠났든, 애당초 숲에 자발적으로 왔는지 강제로 끌려온 건지, 숲에 있는 게 맞긴 한지도 해영은 모른다. 그가 쥐고 있는 거라곤 숲에 대한 괴소문과 해원이 사라졌다는 연락. 그리고 베갯잇 안에서 발견한 쪽지 하나.

  정돈되지 않음으로부터 나오는 불안과 초조함에 늘 잘 다듬어져 있던 해영의 손톱 끝은 씹히고 물어 뜯겨 피가 비치고 너덜거렸다. 해원이 가출한 이유가 정말로 자신 때문이라면, 혹은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어느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 일어나는 0.001퍼센트의 기적으로 숲 한가운데서 해원을 만난대도 다시는 그 구질구질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해영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걸어도 걸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끝과 자신의 무모함에 허탈함을 느끼자마자 모른 척 외면하던 두고 온 일들이 둑을 범람한 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부탁한 아르바이트는 괜찮나, 사채는……

  그러다 문득 눈을 희뜩이며 잡은 멱살이 짐승이라도 되는 듯 흔들던 강 씨가 섬찟 떠올라 길게 침음하며 머리카락을 쥐었다. 무른 흙 위로 커다란 발밑에 짓뭉개진 잡초처럼 허물어진 해영의 몸 위로 둥근 빛 덩어리와 나뭇잎 모양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새겨졌다.

  경준에겐 동생을 찾아야 한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그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강 씨의 예고 없는 급습과 당연한 권리처럼 행해지는 폭력, 매번 무릎이 닳도록 싹싹 빌며 다음 달엔 꼭 갚겠다고 매달려 보아도 냉소로 무자비하게 짓밟은 강 씨의 억센 손아귀에 개처럼 끌려가 백지에 눌러 찍은 지장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었다. 인터넷을 잘 하지 않아도 이 숲이 자살 숲이라 불리는 것은 저를 둘러싼 작은 세상에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라, 동생 해원의 실종과 함께 완벽히 무너져 버린 그의 무의식이 이곳으로 걸음 하게 만들었다. 해영의 삶은 6평짜리 그의 반지하처럼 빛이 자주 들지는 않았지만 가끔 드는 빛에 붙인 이름이자 그의 삶에 유일한 미련인 해원은 삶의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그의 삶을 자꾸만 붙들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해원을 찾아야 했다.

  솨아아, 상쾌한 바람에 나무가 일제히 빗소리를 연주하며 몸을 떨었다. 해영의 굽은 몸도 흔들렸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지친 몸에서 곰팡이가 필까 싹이 틀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잡념에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해영은 며칠간 강 씨를 피해 홍등가 앞, 네온사인 하나는 떨어지고 하나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M’과 ‘TE’만 흐릿한 불빛을 깜빡이던 동네 모텔, 24시간 찜질방, 집이 아닌 곳은 어디라도 전전하며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불안에 떨며 쪽잠을 자던 날의 피로가 몰려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절의 풍경처럼 청아하게 지저귀는 아침의 소리와 청설모나 다람쥐 같은 소동물의 날랜 발놀림이 들렸다.

  희미한 물 내음, 해영은 반쯤 감긴 눈을 번쩍 떴다. 숲을 둘러싼 짙은 녹음을 비집고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시원하고 페트리코처럼 축축하게 젖은 냄새가 바람에 나부꼈다. 잊고 있던 갈증이 의식의 영역으로 흘러들어오자 해영은 마른침을 넘기며 몸을 일으켜 본능적으로 냄새를 더듬어 찾았다. 조금 전보다 강해진 바람에 진해진 물 내음을 따라 해영이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겼다. 나무들이 세게 흔들리며 가을의 낙엽처럼 맞닿아 비벼지고 바스러지는 소리가 꼭 환대처럼 들렸다. 해영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의 방향대로 흩날렸다. 해영은 타들어 갈 듯한 갈증에 정신이 반쯤 멍해진 중에도 자신이 위치한 곳의 방향을 알리는 돌을 쌓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다른 곳엔 온통 진녹색 배경 사이에서 겨우 시선 끝에 걸린, 하늘의 일부를 둥글게 잘라 땅에 옮긴 시푸른 못이 있었다. 어릴 적 읽었던 서양의 동화처럼 신비하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해영은 멍하게 풀어진 얼굴로 꿈결인 양 황홀하고 아득해지는 풍경에 압도되어 굳게 박힌 심지처럼 우뚝 서 있다가 뒤늦게야 달음박질하여 고꾸라지듯 못 앞에 무릎을 꿇고 손 안 가득 물을 퍼 담아 게걸스럽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얇고 곧은 손가락 사이로 미처 가두지 못한 물이 후두둑 떨어져 노래처럼 수면 위에서 튀어 올랐다.

  연잎만 듬성듬성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고 올챙이나 생명체의 움직임에 의한 파동은 없다. 해영은 충분히 물을 적신 다음 젖은 소매를 추켜올리며 새소리 하나 없이 적막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산책로를 이 방향으로 조성했다면 분명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수고를 조금은 덜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가 주저앉아 있는 이곳은 자궁이나 아공간처럼 그윽하고 잡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롭기까지 해서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가정했다. 해영은 손가락 한 마디만 겨우 닿는 정도로 수면 위를 흐늘거렸다. 찰박 소리를 내며 수면에 비친 해영의 얼굴이 파동에 흐려지고 일그러졌다. 해영은 허리를 숙여 수면과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결코 얼굴을 물속에 처박거나 네발짐승처럼 물을 마시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수면 바로 밑으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인영에 해영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몸을 뒤로 젖혔다. 젖은 입가에 차마 삼키지 못한 물이 흘렀다. 해영은 사색이 된 얼굴로 뒤로 손을 뻗어 지면을 발로 밀어 차며 못에서 멀어졌다.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을 구부리고, 슬그머니 뒷걸음질하다 말고 목을 빼 수면을 살피지만 잠시나마 보였던 인영은 땅속으로 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체일까, 혹은 귀신? 사람의 형태를 한 물고기…… 인어?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무수하게 머릿속을 배회했다.

  요괴.

  뇌리를 스쳐 지나간 한 가지 남아 있는 가능성에 해영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몇 년 전부터 나이아 숲을 둘러싼 소문은 소원을 들어주는 요괴가 산다는 것이었는데, 해영은 믿지 않았다. 유희를 위한 가십 혹은 정체불명의 자살 같은 것들을 한계가 명확한 대가리로 납득하고자 하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괴가 있다는 숲을 찾아가는 사람 중 비굴한 삶을 붙드는 소원을 빌러 갈 정도로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나, 해영에게 절박함은 사치이자 여유였다. 당장 굶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인 삶은 그랬다. 그러나 해원에게는 그 절박함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자살 숲에 다녀온다는 해원의 쪽지는 소문을 불신하던 해영을 무턱대고 숲에 도달하게 했으며 조급하게 했고 수면 아래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보고 요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환영이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어 해영은 성큼 멀어졌다.

  동생을 찾는 거지,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따라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산책로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지만 그런 것을 먼저 떠올릴 만큼 해영은 냉정하지 않았다. 건넨 말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채 허공에 부유했다. 여자의 목소리였기에 해영은 불필요한 경계나 긴장을 갖지 않았고 막연히 이곳에 먼저 온 행인이라고 생각했다.

  찰박이며 이질적일 정도로 느릿하고 단지 머무름에 그친 소리와 함께 수면이 얇게 요동쳤다. 해영은 본능적으로 숨을 훅 들이켜며 어정쩡하게 굽힌 몸을 폈다.

  혈색이 돌지 않아 안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 굽이치지 않고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 그러다 무심코 시선이 아래를 향했을 때, 해영은 겁도 없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시체처럼 핏기 없이 창백한 발이 수면을 똑바로 딛고 서 미동조차 없었다. 해영은 살인자가 시체의 발목을 잘라 전시한 잔인한 진열장을 본 것처럼 목 끝까지 차오른 비명을 간신히 삼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옴폭 들어간 복사뼈 아래부터 굴곡으로 부드럽게 이어진 얄쌍한 발목을 훑으며 시선을 올렸다.

  요괴. 아득해지는 정신 속 유일한 확신이 들었다. 왜 요괴가 이곳에, 아니 그보다도 요괴가 여자였나, 아까 본 건 뭐야, 해영은 떠오른 수백 개의 물음 속에서 적당한 말을 골랐다. 해원이를, 알아? 그 물음이 우선이었다. 응, 여자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모든 움직임이 멈춘 해영의 손끝에 맺힌 물이 똑, 똑, 떨어졌다. 여자의 시선이 물방울을 따라 움직였다.

  여자의 얼굴은 마네킹처럼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태곳적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소문대로 20미터쯤 되는 나무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크기나 길 잃은 사람들을 잡아먹어 새빨개진 눈동자는 아니다. 그 거대한 체격이 투명하게 일렁인다거나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해영은 소문이 전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변형됐으리라 생각하며 무심코 얼빠진 소리나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신경 썼다. 채 빠지지 않은 젖살과 왜소한 몸집의 여자는 십 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이토록 비굴한 자세로 거대한 자연물 앞에서나 느끼는 위압감이나 경외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괜스레 울컥하여 으스대며 내세울 일 없는 우스운 모욕감이 쳐들기도 했으나, 조용히 시선을 도로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잡아먹히면 어떡하지, 온 길로 도망가는 건, 아니 역시 해원이를…… 데룩 굴러가는 눈동자 속에선 어느새 물속에서 인영인지 현상인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본 사실은 잊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십 방법의 시뮬레이션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정과 예상을 비웃듯이 여자는 심상히 그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찰박, 찰박, 섬세한 비단 위를 걷듯, 예민한 송곳 위를 걷듯…… 물에 맞닿는 건 발끝뿐이다. 둥근 발 아치에 미묘하게 물이 닿을 듯 말 듯 느린 걸음을 뗀 여자의 뒷모습을 대각선으로 튼 고개로 응시하던 해영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며 겨우 가위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시체 같은 발을 보자마자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뒤늦게 세찬 박동으로 뛰었다.

  해영은 슬쩍 시선을 올려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코가 아릴 정도로 싱그러운 우디 향이 자국눈처럼 내려앉았다. 어느새 지면으로 올라선 여자의 맨발이 뒤꿈치부터 흔들 그네의 궤적을 그리며 푸르게 돋은 풀밭을 지르밟았다. 촉촉하게 젖은 발이 닿는 곳마다 하늘을 향해 솟은 풀이 꺾이거나 짓눌리지 않고 싹이 움텄다. 여자의 발이 채 떨어지기 전에 벌어진 발가락 사이로, 바닥에 맞닿지 않은 발 아치 옆으로 구불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진동하는 생명의 냄새가 해영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해영은 겨우 정신을 차려 입을 뗐다. 어떻게…… 아니,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내뱉은 말끝이 떨렸다. 여자가 돌아보자 해영은 저도 모르게 넓고 깊게 음미하듯 호흡을 끌었다.

  봤잖아, 너도.

  자동응답기처럼 건조한 대답에 해영은 저도 모르게 되물을 뻔했다.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여자의 시선을 따라 해영은 시선을 내렸다. 새까만 머리카락, 힘없이 내려앉은 눈꺼풀, 꺼져가는 숨 방울과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푸르게 창백한 얼굴…… 조각난 퍼즐처럼 어질러져 있던 기억이 하나씩 짜 맞춰지며 얼굴이 떠올랐다. 해영의 얼굴은 어느새 사색이 되었다. 들뜸과 가라앉음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대체로 무던한 그가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한순간에 추락하게 된 사람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서린 얼굴로 벌렸던 거리를 좁혔다. 무심코 벌어진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해영은 주저앉은 채 수면을 내려 봤다. 가장 이질적인 존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당황을 넘어선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사고의 톱니바퀴가 엇갈려 멈추었다.

  “신해원은.”

  “죽은 거라고?”

  물음이라기보다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죽은 게 맞아?”

  해영은 여자의 표정으로 답을 짐작했다. 금기어처럼 목 깊숙한 곳에만 맴돌던 말이 못 위 잉어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해영의 눈가가 붉어졌다.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뿌옇게 눈물이 고였다.

  “그럴 리가, 터무니없는 소리…… 왜.”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려다 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 의식의 영역으로 흘러들었다. 돌이켜보면 물 아래 가라앉는 무언가를 본 순간부터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오래. 해원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어쩌면 베갯잇에서 쪽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숲을 찾아오는 내내 지울 수 없었던 끔찍한 가정이 형태화하여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숲에 간 걸 알면서도 찾지 않고 오지 않는 그 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완벽히 무너질 테니까. 해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는 요괴니까 뭐든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다 할게. 한 번만 우리 해원이, 살려주면…….”

  억지로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뭉그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어. 여자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해영은 고개를 수그렸다. 눈물이 구역질처럼 쏟아졌다. 소리 없이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울었다. 구멍이 뚫린 가슴 사이로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깜빡임 없이 그를 내려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어깨를 떨다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젖은 흙 위로 여자의 작은 발자국이 못까지 이어져 있었다. 공포인지 서글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얼굴이 푸르게 질린 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사람들이 왜 당신을 찾아오게 했어?”

  여자는 못 한가운데에서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봤다. 여자의 손에는 그가 무심코 던진 손 선풍기가 들려 있다. 그는 크게 치켜뜬 눈동자로 두 눈만 느리게 깜빡이는 여자를 바라봤다.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당신 짓이지?”

  그의 말은 스스로 확신을 불어넣어 그의 얼굴에 푸르게 분노가 서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결코 달음박으로 변하지 않았고 그의 말은 느리다 못해 헐거웠으나, 그는 턱 끝까지 찬 숨을 내쉬면서도 짓씹듯이 말을 잇고 있었다.

  “왜 내 동생이 이 끔찍한 숲에 오게 했어, 왜!!”

  서러움에 목이 막혀 그는 울음처럼 말을 쏟아냈다. 비명 같은 외침이 공허한 숲속에 작게 메아리쳐 울렸다. 그에겐 변화 없이 평온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죽어.”

  그는 벌겋게 질린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죽어버려.”

  여자의 표정은 처음부터 생기 없이 단조로워서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 적막 속에서 여자가 들고 있는 선풍기 날이 돌아가다 말고 틈새에 끼어 있는 여자의 손가락에 부딪히며 타닥 소리를 냈다. 한참 동안 주고받는 대화나 일방적인 증오 대신 시선만 얽혔다. 여자가 먼저 시선을 비켜 피하며 선풍기를 눌러 끄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게 네 소원이야? 그래. 해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실핏줄이 터져 새빨개진 그의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채 이글이글 타올랐다.

  “내 동생이, 사람들이 겪은 것만큼… 고통스럽게.”

  그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어금니를 꽉 짓이겼다.

  “가치 없게 죽어버려.”

  여자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푸른 줄기가 그와 그녀 사이를 휘감았다. 해영이 몸을 움찔거리자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느리게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여자가 손을 거두자 줄기는 그의 발목 위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루어질 거야.

  여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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