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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5. 신해영

물 위를 걷는 사람


  경준은 씨를 바른 참외를 접시에 두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휴대폰을 보던 희소는 탁자를 힐끔 내려다보다 소파 밑으로 내려왔다. 네 엄마부터 가져다줘라. 하얀 줄무늬가 고르게 난 새 참외를 깎던 경준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참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포크를 집는 희소에게 말하자, 그러려고 했다며 냉큼 덧붙인 희소가 참외를 찍은 포크를 들고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서영에게 달려갔다. 어머, 고마워. 서영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앉지도 않은 채 포크로 찍은 희소가 참외를 입에 집어넣었다. 경준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자, 금세 잘게 씹은 참외를 삼킨 희소가 알아서 먹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경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참외를 깎는 일에 몰두했다.

  해영 오빠 또 연락이 안 되네.

  희소의 중얼거림에 경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젠 끝이라는 그의 말에 산산조각 난 그만의 이상은 어쩌면 오만이나 무례일 수도 있었으나 경준은 남몰래 서운했었다. 경준은 해영을 동류라고 생각했다. 동생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확고한 확신이 있었다. 해영의 단호한 거절에 자신의 절박함에 해영이 흔들린 사실도 알기에 잠시간 고민했으나, 경준은 절박함을 무기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간절함은 가시가 있었으나 뾰족하지 않았고 분노를 닮아 있었으나 애정이 컸다. 그래서 경준은 해영을 응원하고 싶었다. 젊고 온화하며 다정하지만 애도로 얼룩져 있는 그를. 언젠가 그가 말을 정정하거나 살아갈 내일을 위해 간신히 막아둔 서러움을 분출하고 싶어 한다면, 경준은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해영을 마주한 것은 찰나였으나 경준은 어느새 큰 동질감과 동정을 품고 있었다.

  너 나중에 그 애 만나냐.

  희소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만나면 내 번호 좀 전해줘.

  경준은 탄식과 충격에 빠져 해영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뒤늦게 해영의 말을 되짚어보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요괴의 잔혹성에서 그 애만 예외인 이유 같은 거. 물론 해영에게 대답을 듣는 대신 곤란함만 가중할 수도 있지만. 경준은 해영과 요괴의 기묘한 연이 가장 궁금했다. 아는 사이라기엔 모르는 눈치고 아예 연이 없다기엔 뭔가 숨기는 것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걔가 거절하면, 뒷말의 여지를 남겨두고 뜸을 들인 경준은 무슨 말이냐고 재촉하는 희소를 흘겨보며 머뭇거렸다.

  혜경이 동호회, 회장 번호라도 넘겨줘.

  둘 사이에 그만큼의 교류가 있냐며 툴툴대던 희소가 입을 다물었다. 굳어진 얼굴은 약간의 의문으로 뒤덮여 예고 없이 파헤쳐진 상처에 움츠러들었다. 그걸 왜, 물으려고 뻐끔거리던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그 오빠도 요괴 얘길 해?

  언성이 높아진 희소가 지난번의 만남에서 나눴던 암호 같은 대화를 떠올리기 전에 경준이 공백을 이으려 했지만, 희소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경준은 희소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간신히 아문 상처를 헤집는 기분에 괴로움을 삼켰다. 이럴까 봐 그때 우스운 상황극에 해영을 끌어들인 것이었는데, 경준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결국 희소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둘이 재밌었어?

  희소의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아롱거렸다. 그간의 해영과 경준 사이의 묘한 기류를 무엇으로 해석한 건지, 희소는 대각선 위 허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경준은 아직은 섣불렀다는 것을 알아 자책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희소는 큰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혜경의 이름을 들을 순간부터 꾹꾹 참았던 눈물이 폭죽처럼 터져 흘렀다. 방음이 잘 안돼 소리가 들릴까 봐 입 안으로 삼킨 신음이 물기에 젖어 딸꾹질처럼 새어 나왔다. 지난 몇 개월간 경준은 넋이 나가 혜경의 흔적을 더듬으면서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거나 티 내지 않으려 했다. 희소는 그것이 경준 나름의 위로 방식이자 애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준이 혜경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을 속박하던 금기가 깨진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아마 그것은 대상 없는 분노와 알 수 없는 배신감이었다. 희소는 의미 없는 변명을 지껄일 기운도 없다는 듯 자신을 붙잡지 않는 경준에 화가 나 침대에 몸을 던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오빠는 왜 아빠의 이상한 믿음에 어울려줄까. 설마 그 자식도 요괴가 있다고 믿나?

  요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이라니. 사이비와 다를 게 뭐야. 혜경도, 아빠도, 해영도, 맨 처음 요괴의 존재를 알려준 그 애도, 왜 다 그 말도 안 되는 걸 믿는 걸까. 그거라도 붙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실한가? 누구에게나 절실함이란 있기 마련이다. 그 절실함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 많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빠는 왜 자꾸 무언가에 쫓기듯 사는 걸까. 이럴수록 곁에 있는 나는 더 괴롭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희소는 코를 훌쩍이며 따가운 눈을 깜빡거렸다. 혜경이 그렇게 되고, 서영과 함께 급하게 상경해 실체 없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경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덮어둔 상처를 파헤치면서까지 현재를 버려두는 경준이 가끔 미웠다. 상실의 슬픔은 누구에게나 공평한데, 전부인 양 살아가는 경준을 이전처럼 붙들지 못하고 홀로 남매를 키워는 서영을 바라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잊고 살아가려고 해도 경준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젠 경준을 생각하기만 해도 상처가 벌어졌다. 혜경을 위하는 경준의 행동이 희소를 더 괴롭게 했다.

  그냥 살아가면 안 되는 거야? 허상을 좇는 것처럼 보이지만 혹여 그게 진실이래도 모른 체, 아무래도 그냥 살아지지 않는 거야? 잊고 있던 오래된 상처를 인식한 것처럼, 희소는 물음표 없는 물음을 허공에 뿌리며 아주 오랜만에 그 애에 대해 생각했다. 정의로운 척 모두를 기만하고 허상을 이용해 독선에 빠져 있던, 오만하고 영악한 그 아이를.      

                                                                                                                              *     


  죽여줘.

  전날은 모두 잊은 것처럼 뻔뻔하게 살려달라고, 숨겨달라고 애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는 듯이 초연한 여자를 보자마자 제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그마저도 울음에 뭉개져 우스워졌다. 여자는 여전히 못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속이 후련해? 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그럼 소원도 사라지나?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해영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눈물과 섞여 뺨을 타고 흘렀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내 인생은 왜 이래?

  해영이 몸을 경련하며 울음을 삼켰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렀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 돈 걱정 없이. 근데 내 꼴을 봐.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돈도 집도, 가족도……

  맞은 부위가 뒤늦게 화끈거려서 해영은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스포츠형에게서 실컷 얻어맞고 애먼 곳에 분풀이나 하는 찌질한 모양새로 비칠 것임을 알아도 비관이 생을 억지로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도 그걸 알고 있는 듯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저 서 있었다. 코에서 흐르는 건지 입에서 흐르는 건지, 아니면 머리에서 흐르는 건지 모를 피가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비릿한 철분 맛이 났다. 눈두덩이가 부어오른 탓에 눈앞이 뿌옇다. 제대로 서서 똑바로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초점을 잡을 눈을 한 번 깜빡이니 푸른 녹음이 세상의 반절을 가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쇳소리가 났다. 아까부터 이명만 울리는 제 귀에 들어오지 못하고 튕긴 말 따위, 여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해영은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기를 포기한 채 맞닿은 땅에 귀를 대고 심장 박동을 들었다. 선명하게 뛰고 있는 생명의 소리가 들렸다.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괜찮을 거라고, 충분했다고. 그런데 해원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발길질했다. 살고자 발버둥 쳤다. 계단에서 구른 남자의 머리에서 정수기 물통을 쏟은 것처럼 흐르던 피 웅덩이를 밟아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고 CCTV의 존재를 확인하려 눈동자를 굴렸다. 무의식이 남자의 몸에 새겼을 제 흔적을 더듬었다. 잡히지 않으려 있는 힘껏 도망쳤고 이리 죽든 저리 죽든 좋다는 생각이 아니라 살려고 숲에 들어왔다. 그래 놓고 여자에게 뱉은 말은 죽여달라는 말이었다.

  자신도 설득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에, 여태 꺾지 못한 자존심 덩어리. 왜 이곳으로 이끌렸는지 모르지만, 해영은 만사를 제쳐두고 이대로 잠을 자듯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다. 지친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기를 바랐다. 해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여자가 서 있던 자리를 뿌연 시야로 더듬으며 눈을 감았다.  

                                                                                                                              *     


  여기도 없어, 대머리가 강 씨를 돌아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강 씨는 욕을 읊조리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말없이 뒤따라온 도끼도 입술을 물고 주먹을 쥐었다. 형님, 그놈 내가 죽여버려도 됩니까. 강 씨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고 대답 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요괴가 산다는 숲이었다. 숲으로 튀는 놈의 뒤를 쫓아 들어오긴 했지만 여간 마음이 찝찝한 게 아니었다. 숲이 넓어 오늘 안에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 무엇보다 날이 지고 있었다. 강 씨가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다 아무래도 날이 밝고 다시 와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돌아서자 도끼가 우락부락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울먹거렸다. 형님. 난 못 돌아갑니다. 그놈이 효빈이 죽인 거, 형님도 보셨잖습니까. 나도 마찬가집니다, 잠자코 씨근거리던 망치도 주먹을 불끈 쥐며 동조했다.

  “그래서 니들이 뭘 어쩔 건데.”

  강 씨는 턱 끝까지 올라온 욕을 씹어 삼키며 시퍼런 안광을 번뜩였다.

  “신해영 어디로 토꼈는지 알아?”

  망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대머리는 먼 곳을 응시하며 철수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도끼는 뭐라도 대꾸하고 싶은 얼굴로 입을 딱 다물고 다부지게 버티고 섰다.

  “나 혼자라도 남을 테니까 형님은 먼저 가십시오.”

  강 씨는 퓨즈처럼 이성을 붙들어 매어 놓던 것이 뚝 끊어졌다. 주머니에 쑤셔 놓았던 벅나이프를 거칠게 꺼내 시뻘건 얼굴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도끼의 턱 끝에 겨누었다. 숨을 들이켠 도끼의 미동이 은색 날을 타고 강 씨에게 전해졌다. 사색이 된 망치만 쩔쩔매며 강 씨를 말리고 도끼는 결연한 표정으로 강 씨를 마주 봤다.

  “다 우리 가족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도끼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덧붙였다. 얕게 베인 턱에서 선혈이 고여 흘렀다. 강 씨의 얼굴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봐, 일단 그거 내려놓게. 속상하고 분해서 그런 것 아닌가.”

  대머리가 침착하게 강 씨를 달랬다. 안광을 번뜩거리며 버티고 서 있던 강 씨가 서서히 벅나이프를 거두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망치가 허겁지겁 도끼의 턱에 제 소매를 가져대 댔다.

  어쩔 건데, 강 씨가 물었다. 도끼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숲이 넓어 바깥으로 빠져나가긴 어렵고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호수 쪽으로 알아서 기어 나오겠죠.”

  허공을 응시하던 강 씨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망치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려고 하다 말고 이번에는 눈치껏 빠졌다. 씨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 같이. 강 씨는 할 말이 없을 때 욕을 읊조리는 습관이 있었다. 강 씨가 대머리에게 눈짓했다. 해영을 잡는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대머리가 피곤에 반쯤 감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강 씨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니들 알아서 해. 난 갈 테니까.”

  대머리는 그제야 아아, 하며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등을 돌린 강 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 도끼와 그를 따라 얼떨결에 허리를 숙인 망치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본 강 씨는 다시 고개를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간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해? 뒤늦게 지평선을 넘어가는 해가 걸렸는지 망치가 팔꿈치로 도끼를 툭 쳤다.

  “요괴가 있는 곳으로.”

  망치가 반문하기 전에 도끼가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애초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망치는 불안한지 계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도끼에게 이 길이 맞는지 재차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기에 망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습한 기운과 짙은 안개가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서로의 손을 잡고 가야 했지만, 도끼는 질색하거나 알아서 따라오라고 일갈하지 않고 묵묵히 손을 잡고 앞장섰다. 축축하게 젖은 흙냄새가 물씬 났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고요 속에 울리다, 마침내 도끼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야? 입 다물어. 도끼가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너도 어서 숨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숲의 요괴라니, 그런 해괴한 소문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

  망치는 못마땅한 얼굴로 설렁설렁 도끼의 곁으로 갔다. 도끼는 한 손으로 나무를 짚고 얼굴의 사분의 일 가량만 내놓은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퉁명스럽게 물어도 도끼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희뜩하게 눈을 뜰 뿐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늘 그렇듯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겠지, 아무렴. 망치는 그의 기이한 취미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망치는 아까 전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는 강 씨에게서 도끼를 구했다는 생각에 우쭐해 있었다. 명실상부한 위계 속에서 유일하게 애매한 것은 도끼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그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부터 도끼를 조금 더 신임하는 듯한 강 씨의 묘한 태도와, 늘 관망하거나 방관하며 제삼자의 역할을 취하는 대머리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위계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끼는 의리가 있고 영특하긴 하지만,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해 몸을 쓰는 중요한 일에는 늘 그가 나섰다. 그래서 강 씨가 자신을 훨씬 신뢰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 전 도끼의 턱을 긋고 떠나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아이러니하게 도끼의 위치를 실감했다. 자연스럽게 도끼의 피를 닦고 있는 거나, 도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존중해 주는 강 씨에겐 자신은 도끼의 똘마니 정도로 비췄을 것을 알아버렸다. 망치는 여전히 안개 너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도끼와 핏자국이 묻은 제 소매를 번갈아봤다. 알 수 없는 수치심과 박살 난 자존심이 묘하게 피어올라 그는 도끼가 하라는 대로 어울려주기 싫었다. 망치는 염불하던 신해영은 쫓지 않고 요괴 따위를 믿는 겁쟁이 도끼와 잡고 있는 남사스러운 손을 뿌리치고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걸어갔다. 안개가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확신으로 강 씨의 걸음을 흉내 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끼는 손이 뿌리쳐진 순간부터 아무 말도 없었다.

  “하하. 봐, 요괴 같은 건.”

  망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발밑이 출렁거렸다. 거대한 젤리 위에 선 듯 물컹거리고 차가운 감각이 발밑에 맴돌았다. 망치는 그가 젖은 흙을 밟았다고 생각했다. 혹은 커다란 뱀의 허물이나. 씨발, 조용히 읊조리는 도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먼 곳에서 들렸다. 산꼭대기에 올라선 것처럼 먹먹하던 귀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서늘한 바람이 갑작스럽게 다리를 훑고 지나가 안개가 부분 걷혀 무엇을 밟고 섰는지 보였다. 소리만으로 확신할 수 없었던 그가 까무러치며 뒤로 넘어졌다. 뻥 뚫린 그의 귓속에 찰박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얀 발이 지척에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 위에 보란 듯이 서 있는 채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만 둥그렇게 안개가 개어서 그가 본 것은 발목 위로 안개에 가려진 두 발뿐이었다. 망치는 비명도 시원하게 지르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룩 기절했다. 그가 밟고 있던 거대한 줄기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안개와 물 사이에 널브러진 망치도 삼켜지듯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다란 덩치를 삼킨 물이 작게 트림하자 얕은 파동이 생겼다.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안개가 완전히 물러갔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긴 도끼의 눈에 비친 것은 덩그러니 숲속에 놓인 작은 못 하나였다.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간 망치도, 희미하게 들린 찰박이는 소리도, 발끝 하나 보지 못한 요괴도 없었다. 도끼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요괴가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도끼는 철저하게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다. 도끼가 요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신해영의 집에 찾아간 날이었다. 며칠째 텅 비어 온기라곤 없이 그 안에 오롯이 남아 있는 건 시퍼런 분노뿐인 집에는 신해영도 그의 동생도 없었다. 말없이 작은 집 안을 뒤지기 시작하는 강 씨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 우연히 탁자 위를 보게 되었다. 신해영의 동생이 쓴 듯한 쪽지를. 자살 숲? 도끼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강 씨가 돌아봤다. 찰나이긴 했으나 도끼는 묘한 얼굴의 강 씨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자살 숲의 요괴라니, 우스울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강 씨의 순간적인 반응은 솔직했으며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숲에 남은 건 효빈의 죽음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강 씨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캐내기 위함이 더 컸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은 아니라도 어떤 식으로든 강 씨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직 완전히 저물지 않은 해를 보고도 내뺀 강 씨의 소극적인 태도로 더 분명해졌다. 강 씨는 언제나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를 둘러싼 무성한 풍문은 풍문으로 그쳤다. 망치가 따라나선 것은 계획 밖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요괴를 찾으러 숲에 남았다는 건 망치 놈밖에 모르고 그마저도 죽었는지 끌려갔는지 증발하듯 사라져버렸으니까. 도끼는 요괴를 보기 위해 무모한 모험을 했으면서도 요괴의 존재에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사그라든 망치의 목소리와 찰박이는 소리, 사라진 망치는 불확실을 확신으로 바꿨다. 도끼는 무작정 요괴를 찾은 자신의 무지함을 책망하며 고개를 슬쩍 뺐다. 그의 시야에 요괴는커녕 반대편 풀숲 사이로 삐져나온 두 발이 보였다.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이 묻은 밑창과 아무렇게나 풀려 있는 신발 끈. 고개를 슬며시 내밀자 쓰러진 남자인 듯싶었다. 체격이나 신발을 보아선 망치일 가능성은 없었고, 숲에서 조난된 민간인 남자이거나…… 도끼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빠르게 남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자신을 유인하려 쓰러진 척하는 요괴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소문에서 요괴의 모습은 커다란 체격과 붉은 눈, 투명한 몸이었으니 사람의 외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은, 신해영이거나.

  도끼는 잠이 든 건지 쓰러진 건지 죽은 건지 모를 해영을 내려 봤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엉겨 붙었고 그의 것인지 효빈의 것인지 모르는 핏자국이 얼굴에 집중적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고개를 대각선으로 숙인 해영의 입가에 있는 풀이 살며시 몸을 떠는 것을 보니 지쳐 쓰러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끼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확실히 숨을 끊을 수 있는 무기는 망치에게 들려 보낸 탓에 없었다. 도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해영의 목으로 손을 뻗는 순간 무엇인가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매끈거리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뱀일 거라 생각한 도끼는 뒷걸음질 치며 다리를 내려 봤다. 녹색에 길이가 길어 뱀의 형상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줄기였다. 두세 바퀴 감긴 줄기를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줄기는 못 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애는 왜?

  나른하고 권태로운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 도끼가 의아한 얼굴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올렸다. 어느새 여자가 못 한가운데 발끝으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도끼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동시에 빠른 속도로 줄기가 그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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