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사람
빛에 감은 눈이 찌푸려졌다. 서서히 장막이 걷히듯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나무가 눈앞에서 바람에 몸을 떨었다. 해영은 상체를 벌떡 세웠다. 눈가가 짓물렀는지 따끔거리고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울다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해영은 괜스레 민망해져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다가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내려 보았다. 자신이 누운 자리의 테두리를 따라 꽃이 피어있었다. 머리맡에는 큰 잎에 정갈하게 담긴 열매와 움푹 파인 모양으로 굳어진 잎사귀에 고여 찰랑이는 맑은 물이 있었다. 그 여자다, 해영은 간질거리는 귀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눈을 뜨면 사지가 짐승에게 뜯기고 있을까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길 바랐는데, 여자가 자비를 베풀어 자신을 살려준 모양이었다. 밤새 자신을 지켜주고 맞은 곳은 치료해 주고. 이 열매와 물은, 먹으라고 준 것이겠지. 잠들기 전 그렇게 죽여달라고 난리를 쳤는데도 구태여 살린 이유가 무엇일까, 해영은 오랜만에 개운해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여자에게 있는 기이한 능력이 미처 씻지 못한 자신을 깔끔한 상태로 만들어준 것 같았다.
해영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라도 할 겸 못으로 다가갔다. 물을 손바닥에 퍼담아 몇 번씩 얼굴에 끼얹어 문지르고 닦았다. 독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몹시 고팠기에 여자가 놓고 간 열매와 물을 먹고 마셨다. 열매는 검붉은색으로 체리와 유사하게 생겼는데, 그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달았다. 과육이 입안에서 만개하듯 터졌다. 부드러운 껍질과 속살이 부담스럽지 않게 입맛에 잘 맞았다. 수북이 쌓인 열매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나무와 탐스럽고 실한 열매가 잔뜩 맺힌 나무, 그가 있던 자리에 유독 많이, 생기 있게 활짝 핀 꽃들이 그가 서 있는 현실의 경계를 흐렸다. 해영은 여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잠들기 전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어 지금은 눈에 보이기만 해도 안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우디 향이 짙어졌다. 여자의 실루엣이 보이자 해영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여자는 나무에 두 손을 짚고 가볍게 이마를 댄 채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해주지 않을 거니, 부드러운 미성이 왠지 씁쓸하게 들렸다. 해영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몸을 물렸다. 혼잣말은 아닐 테고, 나무에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리 사람의 껍데기를 가지고 있어도 요괴는 요괴인데, 해영은 어느 순간 내다 버린 경계와 생경함을 다시 주워 담았다. 요괴, 저 여자는 숲의 요괴야. 다짐처럼 상기하며 걸음을 돌리다 멈춰 섰다. 이인이라는 존재의 낯섦은 시간의 문제이나 요괴든 외계인이든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인사 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은 양심의 문제였다. 해영은 가만히 서서 갈등하다 여자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해영을 바라봤다. 원체 깜빡임이 적던 여자라 해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하고자 마음먹었던 말을 잊었다.
열매, 이름이 뭐야? 먹으라고 둔 거 맞지, 맛있더라.
여자가 대답이 없자 해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열매의 이름 따위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여자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일종의 발버둥에 가까웠다. 갑자기 살가워진 태도는 그가 생각해도 어색하고 인위적이었다. 뻔뻔하다고 면전에 대고 욕을 해도 시원찮을 것을 알았다. 제 안도를 위해 철저하게 여자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일이라는 것도. 해영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문을 연 책임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다. 여자는 가만히 해영을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여자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미동 없이 해영을 바라봤다. 까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살기가 없었다.
나이아.
여자의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내 이름.
해영은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탄성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
강 씨와 대머리는 숲을 나섰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건 아니라 줄곧 침묵을 지키던 대머리가 까만 장막이 덮인 하늘을 보고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앞서 걷던 강 씨의 걸음이 느려졌다.
숲에 보물이라도 숨겼나. 강 씨는 완전히 걸음을 멈춰 섰다. 대머리는 머리를 숙인 도끼의 얼굴에 얼핏 떠오른 안도를 회상했다. 망치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숙인 모양이었고 도끼 그놈은 처음부터 따돌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신해영은 어디에 몸을 숨긴 건지 모르고 어둑발이 두텁게 내리고 있었다. 효빈과 친밀했다곤 하나 감정적으로 동요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긴장을 모두 숨기지 못해 시종일관 눈썹에 힘을 주고 있었다. 논리는 그럴 듯 했으나 정황이 맞지 않았다. 그가 말을 얹지 않고 고분고분히 발길을 돌린 건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번거롭게 힘을 소진하고 싶지 않은 마음 하나였다. 강 씨가 대머리를 돌아봤다. 목 끝까지 단추가 꼼꼼하게 잠긴 각이 잡힌 셔츠가 강 씨의 움직임을 따라 주름이 졌다. 형형한 눈동자는 깜빡임도 없이 대머리를 꿰뚫고 있었다. 대머리는 새하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옆으로 팔을 뻗어 뒤따라 내달리던 망치의 가슴팍을 밀치며 멈춰 선 강 씨를 떠올렸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선명한 악취 속에서 홀로 또렷하던 얼굴을, 분노와 적의와 슬픔으로 젖어 들지 않는 생기 없는 눈동자를. 소란한 와중에 저울질을 끝내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는, 뒤돌아 시선을 남기지 않는 냉담한 뒷모습을. 악에 받쳐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몸을 내던지는 녀석을 따라 숲을 향할 때부터 사라진 자취를 더듬으며 조용히 숨을 고르던 때에도, 줄곧 주머니 속에 감춘 손잡이만 쥐락펴락하며 다스리던 인내가 무참히 찢겨 용호의 목을 그은 때에도, 잘 숨겼다 여긴 순간 드러난 안도의 빛을 잡아채고 거짓으로 점철한 위선을 파악했음에도 물러나던 때에도. 아마도 모든 순간 알고는 있었을 강 씨를.
그래서 바라는 대로 해주잖아, 지금.
대머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 씨는 덧붙이지 않고 고갯짓했다. 정신 팔지 말고 걷기나 하라는 뜻으로 제대로 알아들은 대머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다 순순히 따라갔다. 알고 있는 건 위선뿐이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숨기는 게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가, 대머리는 눈앞의 남자에 비하면 우스울 수준의 짐작은 넣어두기로 했다. 대머리는 머쓱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용호 녀석이 숨기는 비밀이 뭘까. 대머리는 사무실로 돌아가는 즉시 그것부터 캐볼까 생각하다 혹여 강 씨가 숨기는 것의 정체마저 알아낼까 관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 숲은 촌스러운 별명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뭐라더라.
자살 숲?
*
해영은 못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눈을 떴을 때 나이아가 보이지 않았지만 구태여 찾지 않았다. 이름을 알게 된 후로도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요괴는 필요 이상으로 적대를 가지지 않는 데다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보이진 않아도 지켜보고 있는지, 하루의 반 이상을 떨어져 지내는 요괴의 존재는 잠을 자고 있을 때나 숲을 돌아볼 때 가져다 놓는 먹을거리를 통해 가볍게 환기했다. 이름 모를 열매와 나물에 불신 대신 의문이 자리 잡아 기묘한 공존이 익숙해질 때쯤 해영은 해원을 생각했다. 못 안에서 본 해원이 요괴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렸던 것은 생리적인 반응이었으며 이미 죽은 해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걸 알면서도, 후회처럼 기억에 남았다. 임종 후 얼마간 청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일처럼 돌이킬 수 없고 자책으로 얼룩진 감정과 비슷하다. 순식간이었고 놀라 뒤로 넘어간 바람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것이 인식하고 있는 보풀처럼 거슬렸다. 나이아의 말에 떠올린 얼굴이 해원이긴 했으나 감정에 휩쓸려 잘못 판단한 것일 수도 있고, 나이아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해영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장례까지 치렀지만 흐르는 시간을 담은 잔에는 아마 영영 추스르지 못할 마음과 순응을 표하는 인사조차 없이 맞이한 단절에 대한 지속적인 불신, 당장을 살아내기 위한 의식이었다는 변명 같은 이기심이 여과되지 않고 남았다. 보풀이나 손톱 거스러미처럼 거슬려 끝내 완전한 확신은 불가능했기에, 해원이 물속에 있다는 것과 죽음에 확신이 들기 전엔 모른 체하며 지나갈 수 없었다.
해영은 뒤꿈치로 밀어 신발을 벗었다. 함께 벗은 양말은 신발 안에,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방전된 휴대폰은 신발코 위에 두었다. 손을 집어넣어 수온을 확인하고 가슴 부근에 물을 묻혔다. 다행히 치아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차가운 건 아니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요괴가 부재하는 이곳은 너무 고요하고 무료해서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용해진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옷을 벗고 들어가나 입고 들어가나 닦을 수건이 없으니 젖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해영은 옷을 입은 채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발끝부터 시원한 느낌이 빠르게 온몸을 감쌌다. 가슴에 선득한 감각이 스치며 공백을 채우려 물방울이 달려들었다. 잇새로 새어 나온 물거품이 부스러지고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못 안은 맑고 투명한 수면과 달리 생각보다 캄캄하고 깊었다. 해영은 코로 숨을 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줄기가 까마득한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팔을 양쪽으로 휘저으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굵은 줄기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커다란 줄기에서 갈라진 작은 줄기가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다. 놀라 들이켜지 않으려 뱉는 숨에 힘이 실렸다. 깊어질수록 뽀글거리며 시야를 방해하는 물거품을 헤치며 그림자에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실루엣만 겨우 보이던 것이 선명해졌다.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사람의 형태인 것만 겨우 확인할 수 있던 그림자는 석상처럼 굳은 채 줄기가 허리를 휘감고 몸 군데군데 물때가 끼어 있었다.
굳어 발버둥만 치던 해영은 목 안쪽에서 파동을 느끼고 코로 숨을 들이켰다. 코로 넘어간 물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이 올라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헤엄치며 자꾸만 바닥으로 늘어지는 팔다리를 숨을 불어넣듯 따끔거리는 눈에 힘을 주었다. 흐릿한 초점 사이로 연잎이 보였다. 해영은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구역질이 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한계까지 참던 숨을 정신없이 들이켰다. 코끝은 찡하고 차갑게 식은 머리는 지끈거렸다. 귀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이어지고 물을 삼킨 탓에 입과 코 밖으로 물이 흘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만 해원을 떠올렸을 때의 슬픔이나 안타까움 같은 보편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몸에 밴 떨림이 추위와 관계없이 몰려와서 해영은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흙을 움켜쥐며 입 속으로 밀려든 부유물을 토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숲에서 지내며 유리되어 있던 현실이 경종을 울리며 몸속으로 온전히 동화되었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지만 잠시 멀리 갔던 기억이 낡은 LP판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며 뾰족한 바늘이 마모된 부위를 긁었다.
무엇을 봤니, 물 안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해영은 기척도 없이 다가온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갈라진 파편이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뚫고 나간다면 두 번 다시 무모함이나 만용을 이유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자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순수한 물음이었다. 해영은 쫄딱 젖어 우스운 꼴이 된 자신을 조롱하거나 입을 막기 위해 추궁하는 줄로 알았다. 물 안에서 무엇을 보았든 입에 담아선 안 된다고. 해영은 여차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백치처럼 굴어버릴 작정이었다.
정말 용이 있어?
그러나 이어지는 물음에 해영은 경직되어 눈동자를 떨었다.
고래와 인어가 존재하니?
해영은 세 번째 물음이 이어졌을 때야 비로소 나이아가 정말로 물 안을 궁금해한다는 걸 알았다. 굳은 얼굴이 서서히 풀어진 해영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몸에 달라붙은 옷을 손가락으로 집어 당겼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있지. 연꽃 줄기나…… 부유물 같은 것도.
성실한 대답과 달리 여전히 대답해야 하는 물음인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충격을 무마하지 못하고 부쩍 느려진 말에는 약간의 의문과 불신이 묻어있었다. 나이아는 충격을 받거나 정말 그것뿐이냐고 되묻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가만히 물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나이아는 물 위를 걸을 뿐 물 밑으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 물론 그게 반드시 물 밑을 모른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물 아래에 용과 고래와 인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늘 한 걸음 앞서 모든 것을 알고 혹은 계획하면서 머리 위에 군림하던 여자가 물 아래를 모른다는 게 성립되지 않았다.
왜 나를 살려주는 거야?
입 안을 맴돌기만 하던 물음이 부유하던 여자를 잡아챘다.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지만 영영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물음이다. 자답에는 늘 한끝만치의 사심이 포함되어 듣기 좋은 말로 결론이 나곤 했다. 나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특유의 느릿함은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죽지 않았으면 하니까.
여자의 말에 자답으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이 박동에 맞춰 온몸을 휘감았다. 보잘것없는 생애 단 한 번도 이토록,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도돌이표의 굴레 속에 갇혀 살아도 좋을 만큼 빛나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타인의 입술을 빌린 말은 손톱처럼 자라나곤 했다. 뾰족하게 자란 손톱을 보고도 참견을 그친 사람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래도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으로 여과되지 않고 체화되곤 했다. 해영은 따뜻한 풍만에 감겨 짐작하기 어려운 이유를 묻고 싶었다. 유충이 마음 깊숙한 곳 끄트머리를 갉작거리는 중에도 묘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껏 맛보지 못한 산해진미를 입 속에 넣었을 때와 숲속을 헤매다 발견한 나이아의 못처럼 신선하고 특별한 기분에 휩싸여 갈라진 틈을 막고 싶은 감정이었다. 여자는 살며시 미소 짓지도 정확한 정답을 짚어낼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고양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천천히 시간의 리듬에 맞춰진 해영의 가슴이 덜컥 울렁거렸다.
넌 죽이지 않았어.
나무에 이마를 대고 속삭이던 여자를 목도했을 때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정말 해원을 죽였냐는 물음은 절로 노선을 비틀었다. 의미 없는 경탄처럼 튀어나온 말에 정지화면처럼 고요하던 여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죽인 적 없어, 누구도. 맞지?
해영의 말에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자로선 큰 동요였다. 되레 놀란 건 해영이었다.
사람들은 다 제 안위만 좇던데.
흘러가는 시선을 잡을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마주하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허공으로 멀어졌다. 해영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소곤대는 말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부를 원하고 명예를 원하고, 차라리 추해지길 원하던데. 다들 그리 살던데.
해영은 제 말과 이어지지 않는 흐름을 이해하려 머리를 굴렸다. 카세트테이프의 줄 꼬임을 풀 차례인데 어린아이처럼 두서없이 중얼대던 여자는 말하다 말고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침묵은 많은 것을 들려준다. 거절 혹은 암묵적 동의, 무시나 참을성. 여자의 경우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숲에 오는 사람들은 그랬어, 도끼든 칼이든 협박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왔거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언제든 나무를 베고 숲을 태울 수 있도록.
해영은 흐름에 몸을 맡겨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생각나는 대로 물음을 뱉었다간 전에 없이 길어지는 여자의 말을 중단시킬 것이었다. 따라가기 급급해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귀로 듣고 기억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적합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전부.
해영은 처음 숲에 발을 들였던 날을 떠올렸다. 무기는커녕 휴대폰과 선물로 받은 선풍기를 가지고 요괴를 맞닥뜨렸던 날을. 해원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은 자신을 지키기보다 자그마한 사치를 챙겼다. 여자의 말은 그럭저럭 귀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물음과 연관성을 찾지 못한 채 이어졌다.
나를 본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들의 기억에 침범하는 건 불가항력이야.
기억. 해영은 귀를 의심했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어디부터 어디까지? 숲에 찾아온 기억? 요괴를 본 기억? 혹은 요괴에 대한 기억은 전부? 만약 그렇다면 요괴를 찾으러 이 숲에 왔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사실은 요괴를 마주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내 기억은 지우지 않은 것일까, 왜 나를 살린 걸까, 의문과 혼란이 혼재된 시선을 마주한 여자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달랐어. 선풍기를 가져왔잖아. 내게 살려 달라 빌지 않았지. 내가 죽기를 바란다고 했어.
다르지 않다. 해원이 아니었다면 그들과 똑같았을 테니까. 부와 명예를 바라고 차라리 추해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살려달라고 빌었을 테고,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기억이 지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기억을 봤어. 그래서 당신을 이해해.
이제껏 깨달음을 준 말에는 각이 있었으나 여자의 말은 둥글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체념도 없었다. 여자는 진실로 그를 이해했다. 해영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단 것을 알았다.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어물거리는 해영에게 위안을 주듯 부드럽게 풀어진 목소리가 방치된 가구 위 쌓이는 먼지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해원이 사라졌다는 연락은 희미한 희망을 꺼뜨렸고 외면을 직면하게 했으나 불안과 강박과 방향 잃은 울분의 압축 사이에 낀 지속에 대한 의지가 그를 살렸다. 이방인의 생김새는 구별이 어려우니 기억이 지워진 그들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었다.
당신은 늘 죽고 싶어 했지, 그래서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여자는 흐린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물은 오래 들여다보면 안 돼. 뛰어들고 싶어 지니까. 어쩌면 그리움을 투영할 수도 있지.
끊긴 필름처럼 이어지지 않던 이야기가 조각나 부유하다 천천히 짜 맞춰졌다. 수면에 비치는 해원을 보고 무심코 뛰어들 뻔했던 기억과 해원이 느꼈을 부러움의 실체가 빈틈없이 겹쳐 여자의 말을 완성한다. 해영은 정제되지 않은 숨을 시근거렸다. 소원,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완벽히 들어맞아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을 때, 해영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어쩌면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니야, 난 그런 거……
눈가가 거뭇하게 가라앉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엿보았다는 기억이 현재의 생각을 포함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자는 줄곧 귀신같이 제 생각을 맞추곤 했으니까. 그리고 해영은 이제 조금이나마 여자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알았다. 여자는 해영이 잊은 약속을 기억하고 실행할 예정이었다. 해영은 고개를 저으며 뒷말을 듣기 싫어서 제멋대로 말을 끊었다.
바라지 않아, 그런 건…….
목소리가 떨렸다. 나이아의 얼굴은 동요가 없었다.
소원은 무를 수 없어. 명을 걸고 이루어지니까.
여자의 말에는 한 자락의 원망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그럴듯한 변명 따위는 없었다. 그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여자를 향한 증오와 두려움이 허상을 향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왜?
죽음을 바라는 기색은 없었으며 환영을 만들어내는 못은 여자와 별개가 아니고 물 안에서 본 얼굴은 분명히 그들이었다. 이제 와 털어놓는 저의는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해영은 알 수 없었다. 여자의 말은 의문의 일부를 해소해 주었으나 여전히 모호한 것들이 줄을 이루었다. 알을 깬 수백 가지의 물음표가 이계의 언어처럼 꼬부라져 귓가를 맴돌았다. 몸의 떨림과 속에서 용암처럼 울컥울컥 북받치는 감정은 단순한 연민과 죄스러움보다 인간의 형상을 한 여자의 다가올 죽음에 관여한 것을 스포츠형의 죽음과 떼어놓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조차 자책이 섞여 혼탁해졌다. 여자는 해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영의 방향으로 흘렸던 훈풍을 거두며 손끝에 맴도는 향을 문질렀다. 물에 머금어 이마에 달라붙었던 잔머리는 가벼워진 채로 회수되는 바람에 휘날렸다.
내가 가진 당신의 기억도 죽고 나면 사라지겠지. 안심해.
여자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자란 손톱으로 팔을 긁으며 자해하는 해영에게 눈짓했다. 멍하니 흘러가던 초점을 잡고 서서히 팔을 내린 해영이 눈을 찡그리기도 하고 움찔거리다가 바닥에 처박았다.
당신의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속삭임이 짧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뒤늦게 고개를 드니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까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일까. 미결된 답과 애매한 죄책감,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원망과 약간의 달뜬 기분은 네 갈래로 분할된 그림처럼 어색하고 미묘하다.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엉망이다. 해영은 엎지른 물에 그만 눈부터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해영은 도망쳤다. 진실과 시선과 부채감으로부터.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나는 무엇으로 남는가. 다시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숲을 빠져나와야 했다. 비명과 부정이 목에 걸려, 명치에 얹혀 움직이지 않고는 떨칠 수 없었다. 나무뿌리와 돌부리가 발걸음을 늦췄다. 지면을 곧게 박차지 못하는 다리가 넘어져 구르지 않을 정도로만 후들거렸으나 달려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사라진 자리를 더듬다간 못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비관은 삶을 붙들 수 있는데 왜 체념은 삶을 붙들 수 없는가. 여자의 말은 누구도 해치지 않고 다정했다.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눈은 원래 그런 걸까. 아무런 원망도 분노도 담기지 않고 까맣게 비워진, 공백. 정말로 죽으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여자가 죽지 않는 선택은 없는 걸까.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물었어야 했다.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왜 용서와 순응은 죽은 눈을 하지 않는지. 비관과 복수심과 울분은 왜 곧 죽어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살게 하는지. 죽지 마, 머릿속을 장악한 낯선 언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파동이 될까 구역감을 매달고 쫓기듯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