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궁금해할,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몰래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던 2년이 끝나고, 부모님께 울먹이며 진실을 토해냈던 시간도 지났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난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그 3개월 사이에도 많은 일은 있었지만, '오늘' '지금' '당장은' 무사하다. 무사히 살아남았단 뜻이다. 2025년 새해가 밝고 나는 내게 물었다. "다사다난한 2024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야?"라고. KTX 안에서 바깥 창문을 바라보며 찾은 답은 이거였다.
"살아있기로 한 거."
글과 글 사이 생략된 많은 하루들을 나는 매 번 결정해냈다. 그리고 견뎌냈다. '오늘 하루 죽지 않고 살아있자.'고. 그건 큰 변화였다. 죽지 못해 살던 사람이 질질 끌던 삶이 아니다. 살기로 결정한 사람의 24시간 연장전이다. 분명히 이 삶의 변화에 '부모님께 내 정신병 이력을 고백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음은 확실하고. 내 글을 어떤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혹여나 내 자식이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부모가 읽게 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절대로 자녀에게 '내가 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하지 말기를.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본인이 다 잘못했다는 한 문장으로 그간 내 촘촘히 쌓인 슬픔의 장면들을 뭉뚱그리겠다는 게 어찌나 화가 나던지. 뭉뚱그린 사과는 내게 알량한 수준의 마법 주문 같았다. 본인들이 언제,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다는 건 알 생각도 않고 본인들의 죄책감만 덜겠다는- 그런 어둠의 마법 말이다.
나는 아팠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뚫지 말아야 할 비밀의 문 안에 몰래 잠입해 어둠에 삼켜진 채로 살았다. 그렇게 제대로 세상을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내가 다 잘못했으니 이리 와서 내게 안겨라'는 사랑은 통할 수가 없다. 정말로, 진심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는 걸 알게 됐을 때 올바른 부모님의 대응은 '어떻게 우리 애가...!', '엄마가 다 미안해.'가 아니고 '그렇게 힘든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어 고맙다. 이제 같이 네 슬픔 앞에서 어떻게 제대로 울어주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보자.'이다.
어제 새해를 맞아 부모님 댁에 잠시 다녀왔다. 엄마는 여전히 내게 묻는다. 요새 잠은 잘 자냐고, 약은 얼만큼 먹고 있냐고. 요새 힘들게 하는 건 없냐고. 엄마가 뭘 도와주면 되냐고. 나는 어떨 땐 그런 관심마저 짜증이 난다. 그럼 말한다. 질문이 부담스러우니, 나중에 물어달라고. 어떨 때에는 내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화가 난다. 그럼 말한다. 엄마는 내가 요새 어떤지 궁금하지도 않냐고. 맞다, 그야말로 뒤죽박죽- 이런 변덕이 죽 끓을 수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말한다'는 거다.
내가, 부모님께. 그리고 부모님이, 내게.
서로 말한다는 것. 서로 소통한다는 것.
내 아픔을 그저 나 하나의 탓이 아니라고 모두들 함께 들어주는 것.
난 또 저 땅 밑으로 푹 들어가 영혼을 갉아먹고 절망의 늪에 뒹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내 슬픔을 나는 담지 않는다.
내 슬픔을 나는 네게 건넨다.
나는 슬픔을 부모님께 말한다.
부모님도 내 슬픔을 받는다.
내 슬픔은 보라색이 되어 내게 다시 건네진다.
우린 괜찮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