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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Nov 01. 2024

대표이사의 포커페이스

Chapter1. Chasing the Big Break #9

나는 포커페이스에 굉장히 약한 편이다. 


감정이 얼굴표정에 그대로 드러날 때가 많다. 좋게 보면 사람이 솔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즈니스를 할 때 이 점은 상당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첫번째 투자를 받으려고 할 때의 일이다. 당시 풍부했던 유동성 상황 때문에 여러 곳에서 투자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우리는 투자사의 소개로 한 세컨 티어 건설사와 미팅을 하게 되었다. 


본사에 도착해서 미팅룸에 들어가니 정말 국내 대기업 미팅에서 볼 법한 자리배치가 느껴졌다. 연배가 있으신 사장님 이하 전무, 상무, 본부장 등 오십대 어르신들(?)부터 실무 과장급까지 회의실 테이블 양 옆으로 열을 갖춰 앉은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벤처투자 미팅과는 다르게 사뭇 권위적인 배치였다.


“그럼 어디 한번 시장과 제품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 우리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처음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안 그래도 대기업들이 신생기업들의 정보를 빼가서 직접 사업부를 차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진짜로 투자의사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이 전에도 유통 대기업들이 제휴를 목적으로 찾아왔다가 카피제품을 만들어 출시했던 것에 치를 떨었던 적이 있어 내 머릿 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평소 표정을 잘 못 숨기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자, 아마추어처럼 굴면 안돼.’ 

하지만 건설사 사장은 중간에 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대표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뿔싸. 표정을 숨긴다고 속으로 되뇌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물론, 옆에 있던 공동창업자도 나보고 대체 왜 그랬냐며 나를 나무랐다. 미팅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내 표정은 돌처럼 굳은 채 와르르 무너졌다. 




무조건적인 포커페이스가 중요하다기보단, 포커페이스처럼 보일 정도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세계에선 무엇보다 필요하다. 특히나 대표이사직처럼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인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2020년 두번째 투자를 유치할 때의 일이다. 첫번째 투자 유치에서의 성공을 발판삼아 의기양양하게 두번째 투자 라운딩(투자 유치)을 시작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코로나가 터졌다. 


2020년 3월 당시 코로나는 공포 그 자체였고, 한번 감염되면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말들이 오가던 시기였다. 당연히 모든 경제활동이 마비되었고 투자 의사결정도 그러했다. 나는 3월에 시작한 투자 유치활동(그 당시에 좀 더 어울리는 말로는 앵벌이)을 무려 12월까지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첫번째 투자에서의 성공이 당연히 두번째에서도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나는 투자받은 현금을 사업에 모조리 써버렸다. 자연히 통장의 잔고가 메말라가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이 때는 회사 내에서 한창 악의적인 정치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쿠데타: 대표님은 가만히 계세요 참조)  


돌이켜보면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항상 업&다운이 있었는데, 이때가 최악의 시기 중 하나였다. 당연히 내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한번은 HR팀장이 나한테 이렇게 물었다. 


"대표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너무 화가 난 표정이세요!"


난 돌로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모니터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내 자아 속 불안감이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나보다. 이건 좋지 않은 시그널이었다. 




문제는 대표이사직은 가장 주목받는 자리라는 것이다. 


스타트업처럼 작은 조직일수록 창업자나 대표이사의 의사결정 비중이 크다. 그래서 모든 직원들이 대표의 표정을 살핀다. 표정이 좋은 것이면 회사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표정이 나쁜 것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마치 내가 전지전능한 신인 것처럼 내 표정에 따라 사무실 분위기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래서 난 무던히도 노력했다. 내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때 내 노력은 아둥바둥하는 초등학생의 몸부림 정도였던 것 같다. 위기가 생겨도 담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표정관리를 잘 해서가 아니라, 위기를 휘어잡을 정도의 내면의 침착한 배포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부족함에 많이 부끄러웠다. 회사원일 때는 똑똑한 척, 센 척 다 했는데 막상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자 기본적인 경영자의 마인드도 없었던 것이다. 나의 내공은 평민도 아닌 노예 수준이었다. 




한번은 투자사와 미팅을 하면서 놀란 적이 있다. 당시 국내의 벤처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창 잘 나가던 공유오피스 모델로 입지를 굳건히 하던 회사가 있었는데, 투자를 업으로 하는 그 회사의 모회사를 만났다.


난 제안받은 회사의 가치(밸류에이션)가 기대치보다 낮았기에 활활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대표 앞에서 회사의 강점을 설명하며 회사가치를 더 높게 쳐달라고 침을 튀기며 주장했다. 나의 뜨거운 열정이 그에게 닫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싸늘했다. 한껏 상기된 나에게 화가 날 정도로 냉정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어차피 당신 회사와 우리 회사는 시너지가 나지 않아요. 더 이상은 협의가 불가능합니다.'라고 결론을 냈다. 모찌떡 같이 새하얀 그의 얼굴에서 한기마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어떻게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지?"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껏 봤던 어떤 포커페이스보다도 잔인한 포커페이스였다. 당시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생각으로 미팅룸을 나왔었는데, 돌이켜보면 진정한 경영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좀 더 침착하게 이끌었을 것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되자 배우는게 참 많다. 10년의 직장생활보다 3년간의 대표생활이 더욱 많은 것을 알게 해줬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배움들이 있겠지. 


기업 운영 8년차가 된 지금도 나는 포커페이스에는 자신이 없다. 못나게도 여전히 내 감정은 표정에 다 드러난다. 하지만 이제는 내공이 다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고 경영자로서의 담대한 배포는 위기를 비틀어 기회로 쳐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결국 포커페이스를 잘 하게 된 게 아니라, 표정에 드러날 부정적인 것들이 없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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