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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골길에서 경험해 본 변화된 세상 그리고 나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셨나요

by 세반하별

“길도 낯선데 정말 운전하려고?”

“아테네 시내만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리스가 인구가 많은 나라는 아니거든.”


가끔은 이 남자의 뜻 모를 자신감이 부럽다. 길도 낯설고 운전도 내가 사는 영국처럼 좌측통행이 아니라 그 반대 우측인데, 사고든 스크래치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기질의 나와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듣던 대로 아테네 시내 아크로 폴리스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아름다웠고, 사람도 많아 북적인다. 3박 4일간 사람이 좀 덜 붐비는 아침시간, 좀 이른 저녁식사 등으로 피크타임들을 피해 보지만 역시나 그리스 신화의 낭만보다는 관광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오늘은 아테네를 떠나 그리스인들이 좋아하는 휴양지, 나플리오(Nafplio)로 출발할 예정이다. 며칠간 렌터카 회사들의 견적을 받아보았는데, 역시나 이 사업도 규모의 경제인지라 대형 프랜차이즈가 제시하는 가격을 그리스 로컬회사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결국 대형 렌터카 회사의 계약서에 사고보험까지 꼼꼼히 챙겨 서류를 작성한다. 하얀색 아반떼 정도 중소형차 키가 손에 쥐어진다. 렌트 업체 사무원은 친절하게 "기름값은 아테네 시내가 싸니 가득 채워 나가라", "아테네는 교통이 혼잡하고 사고 위험이 높으나 시외로 나가면 괜찮아진다." 아는 선에서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남편이 말은 안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차에 새로운 도로를 달리려니 긴장하긴 했나 보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잘하네 잘하네' 칭찬하며 고래를 춤추게 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풀어준다.


예상대로 교통이 복잡한 아테네는 어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 조금씩 시외로 벗어날수록 눈에 띄게 차량수가 줄어들고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그리스 산세도 보이고 푸른 하늘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의 국가 면적은 대한민국보다 1.3배 넓지만 인구는 1/5 수준이다. 지역을 달려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굽이굽이 산이 많다. 구릉지뿐, 유난히 평평한 영국 남서부에 사는 우리 가족이 보기에는 산세가 험해 보일 때도 많다. 세상 모든 결과에는 인과 관계가 있다. 도로에 차량도 많지 않고 무슨 계획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지라 풍광이 좋은 곳에서는 잠깐 정차하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운전 속도를 낮추어 파노라마 필름처럼 이미지를 머릿속에 저장하기도 한다. 여행은 이 맛이다.



아테네에서 나플리오까지 두 시간쯤 운전거리. 나플리오 도착 30분 전쯤부터 한국 자기 계발 프로그램의 줌 강의가 예정되어 있다. 평소 같았으면 “여행에 집중해야지” 말했을 남편은 원하면 참여하라며 양해해 준다. 시그널이 끊기거나 접속이 어려우리라 짐작하지만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한다. 모바일 데이터를 켜고 이어폰 장착하고 나름 부산을 떤 후 줌 링크에 접속한다. 그날 무슨 주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산세가 제법 높은 그리스 지방도로를 달리면서 참여하는데 95% 이상 수업 참여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한국과 그리스는 6시간의 시차가 나니 다른 분들은 저녁 8시, 나는 오후 2시.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다. 새로운 세상을 살면서 나의 생각은 재외 동포 친척어르신들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었구나 반성하는 계기였다.



나는 원래 집안에 이민한 가족이 많은 배경에서 성장했다. 오래간만에 고국 방문하신 어르신들을 뵈면 고국에서는 지키지도 않는 명절들을 꼬박꼬박 챙기시고 그 뿌리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무용담을 듣지만, 내 눈에는 그저 외국인이 한국말하는 것처럼 말 표현이 어눌하고 그냥 한국을 아는 외국인 느낌이었다. “나는 다음에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집안 분위기에 따라 나도 해외살이를 하게 되려니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e-book으로 다운로드하여 한국책을 얼마든지 읽어 볼 수 있고 한류가 퍼지면서 넷플릭스를 켜면 따끈한 한국 드라마나 영화 시청도 문제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 그 옛날 70-80년대 재외국민들은 가지지 못한 문명의 혜택이다.


한 시간 동안 한국에서의 줌 미팅에 잘 참여하고 새로운 실크로드를 발견한 듯 신이 나 있는 동안 우리 차는 나플리오 시내에 도착한다. 저만치 해변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관광지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멀리 산을 배경으로 해변가에는 야자수와 함께 널찍한 거리가 굽이굽이 이어진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그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한가득 묻어난다. 레스토랑과 바 들이 죽 늘어서 있고 쪽빛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요트들 까지 더해 이곳이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도시 아테네에서 한국을 지나 나플리오 휴양지에 단 한 번에 도착한 묘한 기분이다.


이후 2주간에 걸쳐 유명 도시 스파르타, 그리스 신화 유적지 델피 등을 여행했다. 우리의 하얀 렌터카는 길가에 서 있던 오토바이에 긁히면서 검은색 얼룩말 마냥 몇 가닥 줄이 그어졌지만, 대형 렌터카에 차량보험을 들어놓은 덕분에 추가 비용 없이 잘 해결됐다.


아테네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 이제 공항에 데려다줄 택시를 타면 여행이 마무리되는 상황, 차 열쇠를 렌터카 회사에 반납하고 한 커피숍에 앉아 쉬는 시간을 갖는다. 무엇이 제일 좋았는지,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는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는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더한다. '디지털노매드'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개안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고. 한국과 영국의 물리적 거리는 이미 아무 문제가 없어졌는데, 내 마음이 그 담장을 그대로 높여 놓고 있던 것일 뿐이었다고. 시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대한민국 온라인 세상과 내가 연결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해외살이 10년이 넘어가고 있는 나는 이 문명의 이기를 더 잘 활용해야겠다 다짐했다. 한국말로 대화할 때는 최대한 영어 단어를 배제하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새로운 다짐도 생겼다. 가족들과 대화 중에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버벅거릴지언정 말이다. 왜 인터넷 쓰고 이메일이나 무선 통화를 나누면서도 이것이 내 삶에 얼마만큼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내가 속한 땅에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하루하루 눈에 보이는 일상에만 집중해 있었다. 옆도 보고 앞도 보는 융통성이 없었구나 깨달았다.


불혹의 나이, 점점 관심을 자극하는 그 무엇 없이 일상에 안주하려던 이때. 말할 수 있는 방법도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도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이다. 이런 교훈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의 그리스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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