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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낯설었던 나의 고향 서울 방문기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나도 너도 변하고, 기회의 순간도 주는구나

by 세반하별

올해 3월, 코비드 락다운이라는 전 세계적 초유의 사태 이후 처음으로 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동안 몸에 맞지 않던 직장 생활에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연초에 대상포진을 앓게 되었고 그 회복 속도가 더디고 심신이 지쳐가자 남편이 용단을 내렸다. 3주간 아이들은 내가 돌볼 테니 너는 한국에 혼자 가서 좀 쉬고 오라고 말이다.


3년 만에 고향 방문, 그것도 혼자 하는 첫 여행에 설렐 법도 한데, 아무리 직항이라고 해도 내 집 대문에서 서울 친정집 대문까지 24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 몸이 힘드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집에 있겠다고 하는 나를, 신랑이 거의 등 떠다밀듯이 배웅했다.


내가 사는 데본에서 런던 히스로 공항까지 기차를 타고 도착. 아시아나 항공에 탑승하기 위해 비행기 출구로 향하는데 하나둘씩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참고로 나는 한국인 가족들이라고 해봐야 열 가족 미만,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대학 연수하러 오며 가는 한국인들만 사는 동네에 살고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간 비행인 데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몸으로 신경이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내가 바란 것은 오직 하나,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막상 탑승해서 창가 쪽에 앉았는데, 내 옆에 열한두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앉는다. 혼자 여행하는 것인지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뭐 그리 썩 반기는 얼굴도 아니었을 텐데, 이 아이가 나한테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태어난 동생을 포함 두 형제는 엄마랑 서울에 남겨두고, 아버지랑 단둘이서 로마, 파리, 런던 찍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도착한 당일 아침이 중학교 입학 날이라고 하는데, 괜찮겠니 엄마 마음으로 우리 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똑같은 몸매에 몸집만 더 크신 아이 앞자리 남자분이 그 애의 아버지셨다. 둘이서만 한동안 여행을 다녀 서로에게 좀 지루했던 걸까. 두 부자는 인천공항까지 무려 17시간 동안의 비행에서 (내 기억으로는) 서로 안부나 안녕 체크 한번 하지 않고 여행하는 시크한 부자였다. 대신 이 아이는 아버지 대신 나를 이야기 파트너로 낙점한 듯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활주로를 향하는 동안 창가로 보이는 비행기 기종들을 줄줄 외우고, 그 특징들을 설명하는데 보통 관심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들이다. 알고 보니 이 아이는 비행기가 좋아서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겨우 열한두 살짜리 아이인데 포부가 크고 명확하다. 원래 컨디션 대로라면 좀 조용히 해주었으면 싶어야 정상인데, 이 아이는 완급조절을 잘했고, 슬쩍 의사를 물어보며 딱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다. 나는 한국에 방문하러 가는 영국 거주자라고 했더니, 얼마 만에 한국에 가는 거냐, 요즘은 이 드라마가 인기다. 딸내미같이 차근차근 한참을 얘기한다. 저녁 식사가 서빙되고 이제 좀 잘까 하는데 정신이 말똥말똥하니 잠이 안 온다. 와인이라도 한잔 부탁해야 하나 하던 참이었는데, “아줌마, 잠 안 오지요. 저랑 테트리스 게임하실래요?” 물어온다. 급기야 둘은 테트리스부터 시작해서 카드 게임까지 항공기에서 제공하는 거의 모든 게임을 섭렵하기에 이른다. 역시 아무리 어려도 젊은 아이한테 게임을 도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완전한 나의 패배였다.


“난 이제 좀 자보련다. 너도 눈 좀 붙이렴.” 했더니 어설프게 자면 당일 입학식에 못 갈 수 있다며 아줌마 잘 주무시란다. 중간에 잠깐 깨어 뒤척이니 “아줌마, 이제 아프가니스탄 지나가요. 아직 멀었으니 더 주무세요” 그런다. 이건 뭐 이 아이가 내 보호자 같다.


아침 서빙이 시작된다고 불이 환하게 켜지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밤 꼴딱 새우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아이는 말 그대로 실신한 상태로 잠이 들어 있다. 아이 앞자리 아버지는 뒤도 안 돌아보시고 아침식사 맞이 준비를 하신다. “얘야, 아침 식사 나눠준다는데 안 일어날래?” 하니 “아니 아니에요” 비몽사몽 말하는데, 내가 봐도 밥보다는 잠이 더 필요해 보인다.


길고 길던 비행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춰 하강을 시작한다. 인천 작은 섬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조금 지나자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안다. 내국인들이 보면 유난하다 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나는 인천 공항에 가까워질 때쯤 보이는 그 대형 태극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돌아왔구나 하는...”


랜딩 직전에 옆 아이를 깨웠다 “얘야, 저 일몰을 좀 봐. 너무 멋지지 않니?”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이가 툭 던지는 말. “아줌마 여기는 이제 아침이니까 일출이에요.” 비몽사몽 간에도 시간 감각 확실한 아이이다. 활주로에 떨어지자마자 이 아이는 다시 창밖을 보느라 바쁘다. 저 대한항공 xxx는 점보기여서 탑승객이 얼마까지 가능하다는 둥, 몇 마일을 주유 없이 갈 수 있다는 둥.... 분명히 이 아이는 대한민국 항공업계에 큰 인물이 될 인재다.


비행기 기체에서 내리는 중에도 조잘조잘 수다를 떨더니 “아줌마 오래간만에 한국 오신 거 환영해요. 안녕” 쿨하게 앞장서 가던 아빠를 따라간다. 그 아버지는 나에게 짧은 목례를 하신다. 정말 예의 바르고 쿨한 부자간의다.


심신이 지친 마음으로 요양차 방문한 대한민국의 첫인상은, 이 재미있는 부자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며 친숙하면서 스마트하고, 익숙한 듯하지만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항버스 버스표를 사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건다 “나 인천공항 도착했어” 수화기 너머 반가운 목소리, 얼른 뛰어오라는 농담들이 들린다. 내 반쪽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며칠간 시차 적응이 어려울 테니 아예 첫날은 술을 좀 마시고 밤을 새운 후 현지 시간에 맞게 잠을 청하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하루하루가 소중한데 집에서만 뭉개고 있을 수는 없어서 다음날 점심시간 미용실을 예약했다. 3월 초 아직 쌀쌀한 날씨에 동생 옷을 빌려 입고 집 앞 미용실로 향한다. 그런데 이 기시감은 무엇인지. 동생에게 빌린 옷은 올겨울 대히트였다는 무지사 경량 압축 코트였는데, 여기도 한 분, 저기도 한 분 나랑 똑같거나 색상만 다른 옷을 입고 지나가는 분들이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옷도 옷이지만, 서양 사람들과 살다가 나랑 똑같이 생긴 분들이 옷까지 같이 입으니 군복 입으면 느끼는 소속감이 이런 느낌이려나 싶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시차 때문인지 오래간만에 마신 소주의 숙취인지 알 수 없지만, 영국에는 없는 열펌을 한다고 우주비행선 같은 스팀기를 머리에 씌워주시는데 따뜻하니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기분 좋게 머리 손질을 마치고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옆을 지나가는 사람한테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을 맞췄다. “얘 왜 이래” 표정이다. 아차 이것은 영국 사람들 하는 생활 패턴이다. 바쁜 서울에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인사법이었다.


자각하고 횡단보도 앞에 선다. 양방향 아무 차도 없기에 건너려고 보니 근접해 오던 차가 클랙슨을 빵 울린다. 아차 여기는 서울이다. 참고로 영국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보자가 있으면 차량은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 내가 처음 영국에서 운전할 때 횡단보도 건너면서 옆 보지도 않고 툭툭 끼어드는 보행자들 때문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 룰에 익숙해져서 그냥 건너려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길을 건널 때 좌측이 아닌 우측 차량을 체크한다는 것이었다. 우측통행 국가에서 십 년 넘게 운전하며 살다 보니 몸이 체득한 방향감각이 서울에서는 큰 일 날 위험한 습관이었다. 동생이랑 만나서 어른분들 뵈러 식당에 가는 길, 동생이 몇 번을 지적한다. “초록 신호등 보고 건너라고!!!”


오래간만에 방문한 서울은 건널목에 번쩍번쩍한 등이 비치되어 있어서 사실 정신 조금만 차리면 사고가 날 수 없도록 시스템이 잘 갖춰진 도시였다. 오래간만에 방문해 보면 다 아는 듯싶다가도 항상 무엇인가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다. 이번에 고속도로에서 보니 진입로나 개찰 도로를 핑크색으로 강조해 놓아 노선을 정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할 일은 없어 보였다. 어느 분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지만 정말 신박했고, 그런 아이디어를 바로 적용해서 활용하는 서울시의 행정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가보면 얼마나 스마트하고 빠르게 일 처리들을 하시는지 놀라 손뼉 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점은 또 얼마나 많은지. 위가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다. 아무래도 보양식을 먹으러 주로 다녔는데, 음식점들이 다들 고급 지다. 물론 그만큼 물가가 비싸기도 했다.


고국 방문할 때마다 나의 희망 리스트 1번은 언제나 대형 서점에서 시간제한 없이 책 보기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오래간만에 방문이다 보니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아 막상 서점 짬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담긴 종로 교보문고에서 엉덩이 뻐근할 정도로 책을 읽어보는 귀한 시간도 가져봤다. 글자의 목마름이라는 것이 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ebook이라는 좋은 매체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책 몇 권을 들고 오려고 하면 무게가 많이 나가다 보니 항상 마지막에 마지못해 포기하는 품목이 바로 책인 경우가 많다.


먹을 만큼 먹고, 만날 만큼 사람들 만나보고... 이제 영국으로 귀국하는 날. 미련 한 자락 남겨놓는 마음으로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등록을 한다. 줌 미팅을 새벽 6시에 여는 것을 보니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등록하는 그 순간에도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선 글쓰기를 시작한 점이 가장 큰 변화이고, 열심히 사시는 여러분들을 교훈 삼아 나의 마음 자세도 매일매일 단단하게 다져지고 있다.


인생은 어떤 예상치 못한 계기로 발전의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항상 주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에 머뭇거리지 말고 도전해 보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써서 브런치에 기고하게 될 줄은 영국으로 귀국하는 길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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