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지혜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도 깊지도 못했다.
둘째 아이가 이제 혼자서 등하교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나의 낮 시간이 공식적으로 확보되었습니다. 자, 이제 일할 수 있는데... 풀타임도 가능한데...
지금 내 나이 마흔다섯. 나는 영국 남서부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내가 졸업한 번듯한 4년제 대학교는 이곳 채용심사관 눈에는 듣도 보도 못한 학교였고, 경력 단절 10년이 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취업 컨설팅도 받아보고, 지역 취업사이트를 둘러보는데 초등학교 몇 군데에서 보조교사를 찾습니다. 아이 둘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키워낸 엄마인데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는데 그중 두 군데에서나 연락이 옵니다. 나름 압박 면접을 합니다. 왜 지원하게 되었는지부터 슈퍼마켓에서 학부모를 만났는데 불만을 호소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등. 그중 한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나의 말레이시아 경험에 반색을 표합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말레이시아 국제학교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요. 국제학교에서 학부모로서 자원봉사한 것도 이력으로 봐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의 시댁이 말레이시아인 분이셨더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온 다음날, 그 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하며 최종 근무 의사를 묻습니다. 당연히 'Yes”입니다.
우리 옆집에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살고 있습니다. 아내인 E는 김치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제게 레시피를 물어보며 친근하게 지내는 이웃사촌입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신나 하던 그 주말, 지난번 우리 집 저녁초대의 감사의 의미로 이번에는 E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는 날이었습니다. 마당에 작은 화덕이 있어서 손 반죽한 도우에 자신이 원하는 재료 올려서 순서대로 구워 먹습니다. 중학생인 두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 옆 집 두 아이들과 마당에서 놀고 어른 넷은 와인 한잔씩 손에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알고 보니 E의 남편은 지역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더군요. “어, 그 학교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럽니다. 제가 합격해서 출근하기로 한 그 학교가 재단은 괜찮은데, 학교 주변지역이 우범 지역이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노출된 아이들이 많고 행실이 거칠다는 소문이라고 합니다. 그 초등학교 옆 고등학교는 다들 근무 기피하는 학교라고 합니다. 기분이 세하지만, 이미 합격 확정도 되었고 학교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들을 도우면 좋은 거지 생각했습니다.
출근을 시작하고 단 3일 만에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반 25명 중에 사연이 없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ADHD나 불안함과 같은 정신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는 아이, 재활이 필요한 신체적 문제를 가진 아이,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그것을 속으로 쌓아 병이 되었거나 반대로 같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이. 우크라이나, 아프가 니스탄에서 온 피난민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고운 세상만 보고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다행히 관계 형성이 잘 되어가고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들도 생겨 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물론 호의도 준비된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호의를 잘 못 이해해서 선생님을 자기 요구를 들어주는 직원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하나씩 일상을 바꿔나가는데, 처음 학교 출근을 시작했을 때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다 느꼈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깨닫습니다.
전체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소규모 교실에서 보충 수업을 도와주기도 하고,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은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꾸준한 학습을 도와줍니다. 영어가 제2 외국어인 아이들 중에서도 학습 보조가 필요한 아이들의 과제를 봐주기도 했습니다. 보조 교사의 주 업무는 내가 짐작한 일들이었고 비교적 안정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조용히 따로 얘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전날 밤 오빠 친구가 아이 집에 와서 차 사이드 미러를 부수고 오빠를 때려 피를 흘렸다며, 싱글맘인 엄마가 보호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며 웁니다. 너무 무서워서 집에 가기 두렵다고요. 그런 경우에는 학교와 경찰이 연계된 시스템에 등록을 하면, 하교 시간에 경찰에서 안전 귀가를 위한 인원을 배치하고 지역 방범을 강화합니다. 아이의 안전 귀가를 확인하고 나니 제대로 도움이 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무엇이든 이렇게 하나씩 해결하고 개선되면 좋을 텐데, 대부분의 문제는 악순환의 반복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뛰어나가 다른 급우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아이가 있었는데,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대하는 학교 측의 대응방안을 그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원할 때마다 화장실도 예외로 보내주고, 갑자기 배고프다고 하면 비치해 둔 에너지바도 챙겨주고 다른 급우들에 비해 특혜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이가 폭발할 때마다 어르고 달래 결국에는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이 상황을 이용하고 있는 듯한데, 선생님들마다 집안 상황이 불우하니 이해하라고 합니다. 전 그냥 넘길 수가 없어 “너만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 쉬는 시간에 하자” 했더니 이 아이가 제 정강이를 발로 찹니다. 선생님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며 리포트도 써내고 하지만, 또 한 시간쯤 후면 이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교실로 돌아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학교 재활 프로그램 선생님 다리에 금이 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나는 요가 강사 자격증을 내밀며 내가 대신 맡아주마 자원합니다. 운영 책임자인 교장선생님과 고 학년반 매니저는 좋아하시지요. 관계 형성 전에는 재활 훈련에 띄엄띄엄 따라 하던 아이들이 “오늘은 PT 안 가요?” 먼저 와서 물어보기도 합니다. 하는 일에 의미는 내가 만들어가는 거야 다짐하며 힘을 내봅니다.
감정적으로 지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경험했습니다. 대부분 아이들이 가정에서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끌어 그 부족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저 와서 얘기하면서 풀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올라가지 말라는 나무에 기어 올라가거나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몸에 상해를 입혀서 관심을 유도하는 위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끊임없이 튀어나가려는 아이들을 단속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하는 과정들을 반복하는데, 정말 체력 소모도 많고 심적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쉽지 않은 도전의 시간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특수 교육이 무엇일까 궁금했었습니다.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지 싶어, 동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공포심을 필요 이상으로 느껴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 등교를 독려하기 위해 보조교사인 나와 특수교육 담당 선생님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 심리 안정을 위해 키우는 개까지 동원하여 가정 방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아이 방 창문에 대고 한참을 어르고 달래 보지만, 결국은 내일 학교에 오겠다는 약속을 겨우 받아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아이가 등교하는 날이면 특별히 더 챙기고 보살피지만, 그 아이의 공포심리에는 계기나 패턴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도움이 아닌 아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라 안타까웠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혼이 쏙 빠진 기분입니다. 집에 오면 거의 실신 수준이었는데, 퇴근하면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집안의 좋은 기운을 채워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지요. 어느 날, 출근길에 내 입에서 “가기 싫어”라는 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최소한 1년은 해봐야지가 신조인데, 옆에서 내 일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남편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라는 조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학교 생활은 발전 없이 그저 악순환의 무한 반복인 듯하고, 내 가정생활에 내실이 떨어지는 듯하니 마음속에서 불이 나기를 반복했습니다. 나는 급기야 대상포진이 걸리고 맙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고 제 경우는 그 정도가 좀 심해서 한 달간 의사 소견서를 첨부해 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일반보다 회복이 느리고 더뎌지자 결국 사직서 제출을 결정합니다.
재직할 때는 학교 측의 문제 개선보다는 현상 유지에 맞춰진 운영 방식이 답답했습니다. 쉬면서 생각해 보면 그 학교 선생님들이 미온적으로 느껴졌던 반응들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마저도 학교가 없다면 위험한 사각지대에 놓이게 될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소수 학생의 성적을 올리는 목적인 학원은 적성에 맞았지만, 시스템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반 교육 시스템은 저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은 내렸습니다. 특수 교육은 애당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음도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감정 노동의 강도가 굉장히 높은 직업입니다. 방학 기간에 쉴 수 있는 강점은 있지만, 노동 강도에 비해 급여 수준이 낮습니다. 영국 물가가 오르자 제일 먼저 급여인상 시위를 시작한 그룹도 교육 연합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학교 선생님에게 좋은 대우를 하는 나라'로 조명되던 곳이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대한민국 고속성장의 견인으로 불리면서 말이지요. 요즘 '선생님 사망사건', '악성민원스트레스' 등의 꼭지 기사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아픕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먹으면 영국땅에서도 취직할 수 있다는 경험을 했고, 현실 속에는 각자의 무게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체감했습니다. 어린아이 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인생 중반부부터 좀 더 긴 안목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세반하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