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태양은 뜨겁고 사람들은 분주히 광장을 오고 간다. 그 광장의 한편에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콘체르토를 들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오래된 팝송을 흥겹게 연주하고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의 공연을 즐기는 사람, 그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아이도 보인다. 우리 가족은 아침 일찍 관광지를 돌아보고 뜨거운 햇볕을 잠시 피하고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싱그러운 웃음을 띤 젊은 여인이 나에게 팸플릿 한 장을 전한다.
“내일 저녁 8시 우리 밴드의 무료 공연이 있답니다. 함께 해요. 여기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공연장이 있어요”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다 내 딸 같아 보인다. “고마워요” 인사하며 종이를 받았지만 바로 내 가방 어느 구석에 쑤셔 넣어졌다. 이후 다음 일정을 따라다니고 즐기느라 팸플릿 따위는 기억에서 사라진다.
다음 날은 우리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오늘이 끝이라고 하면 뭐든 아쉽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막내딸은 내일 돌아갈 채비를 하겠다며 숙소로 돌아간다. 큰 딸과 나는 아쉬운 마음에 이미 다 마시고 바닥이 드러난 잔을 들여다보면서도 밍그적거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가방 밑 팸플릿이 손에 잡힌다. 30분 후면 공연 시작이었고, 무료공연이었으며 공연장과 숙소는 멀지 않았다. 아쉬워 무엇이든 더 하고 싶던 차에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계획이었다.
얼른 남편에게 공연에 다녀오겠다며 행방을 알리고, 딸과 둘이 가 본 적 없는 길을 손 내비게이션 하나 믿고 따라 걷기 시작한다. 처음 5분은 사람이 많은 번화가라 괜찮았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어쩐 일로 점점 외진 길로 이끈다. 아무리 휴대폰이 있다지만, 이탈리아말을 할 줄 모르고 길이 어둑하니 숙소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싶다.
돌아서려 할 때쯤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슬쩍 그 철문을 여니 찾고 있던 공연장이다. 그런데 공연장 정문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왔나 보다. 공연관계자가 이 쪽으로 출입할 수 없다고 손을 내젓지만, 무료 팸플릿을 들고 누가 봐도 여행자의 모습인 우리 모녀를 그냥 돌려보내기는 어려웠는지 입장을 허가해 준다. 무대 뒤로 들어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공연장의 첫 관객이 되었다.
공연장은 천장이 뚫려있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다. 지난 낮, 재기 발랄하게 연주하던 음악도들은 검은색으로 의상을 맞춰 입고 공연장 정중앙에 앉아 엄숙하게 관객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장하는 관객들 중 그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관객석은 잔디밭 위 매트다. 여기저기 쿠션들이 놓여 있는데 좌식이 불편한 이들을 나름 배려한 모양새다.
딸은 이런 분위기의 공연장은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작은 벨소리가 울리자 주변이 어두워지고 중앙 공연장에만 밝은 핀셋 조명이 비춘다.
낮 시간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더운 밤이었다. 지휘자는 검은 지휘복을 차려입고 조명을 등지고 무대 중앙에 선다. 10여 명으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단은 각자의 파트에 맞춰 정성을 다해 연주한다. 서로 눈 맞추며 박자와 리듬을 구성해 가는 모습이 그간 연습해 온 시간을 짐작케 한다. 그저 잠깐 들러 보려 온 사람들도 예상외의 진지하고 수준 높은 공연에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리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음악의 몸체를 구성한다. 콘트라베이스, 드럼은 음악의 변주를, 클라리넷과 오보에는 음률을 더욱 다채롭게 표현하며 모든 악기가 조화롭게 공연을 채워간다. 이번 공연에서 트럼펫은 확성기나 변성기를 두세 개 바꿔가며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느라 연주자가 무척 분주하다. 유려한 공연에는 주인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인공을 빛날 수 있게 뒤를 받치고 메워가는 여러 협주자들이 있다.
관객석 잔디밭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나고, 관객과 오케스트라단은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악기의 울림이 소리뿐만 아니라 피부감각으로도 느껴질 정도다. 공연이 진행되는 50분간 아티스트와 관객은 서로의 리듬을 맞춰간다.
음악소리과 함께 공연장을 둘러보던 나의 시선은 분위기에 반한 듯한 딸의 옆모습에 닿는다. 이렇게 멋진 선물 같은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귀한 추억꺼리가 주어졌다.
“엄마, 어쩜 여러 악기 소리가 저렇게 멋지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물음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이야기를 하는 딸과 함께 숙소로 향한다. 우리 사는 영국에도 이런 저렴한 공연이 많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물론 영국 런던은 세계적인 공연들이 무수히 열리지만,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다. 부담 없이 즐기기는 어렵다. 지역 극장 무대 공연도 있고, 대학도시다 보니 학생들의 졸업공연들이 저렴하게 나오기는 한다. 이번 공연처럼 무료 관람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공연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2박 3일간 중앙광장에서 여러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도 있었고 어느 날은 바이올린 연주가, 다른 날에는 하프 연주가도 있었다. 그들이 작은 의자를 마련하고 두 시간 세 시간 공연을 해도 주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누구나 표현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공통된 함의가 느껴진다. 예술가와 관객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탈리아가 문화강국인 이유는 이런 풀뿌리 장이 자유롭게 열려 있어서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광장 옆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 10시까지 시간마다 숙소 바로 옆 성당의 종소리는 웅장하게 울려 퍼졌고, 레스토랑에서는 새벽 4시까지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숙소에는 에어컨이 없어, 나는 밤새 땀 흘리는 대신 창문을 열어 소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새벽 6시에 택시가 우리를 공항으로 데려다줄 예정이다. 떠나는 아쉬운 마음에 돌아본 광장은 언제나처럼 관광객들로 붐비고, 그 밤은 또 그렇게 깊어져만 간다.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심심하거나 피곤하지 않은 밤이 될 것 같다. 며칠 동안 경험한 선물 같은 날들의 추억과 내일이면 나의 조용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쉴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