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도시 베르가모(Bergamo)는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높고 험한 산새로 유명한 알프스 산맥의 시작점이고, 스위스가 당시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운 좋게 2차 세계대전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덕분에 16세기 유산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 귀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 조그마한 도시에 모여든다.
올해 상반기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집안의 중심이던 내 짝꿍의 아버지, 내 시 아버지를 잃었다. 외아들이던 고인은 항상 대가족을 꿈꾸셨다고 한다. 살아생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넷을 키워냈고, 19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가족은 고인의가장 큰 자랑이었고, 누구하나 빠짐 없이 아끼고 사랑을 표현하셨다. 이제는 대장을 잃었지만, 네 명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가족 행사마다 챙기고 아끼느라 바쁘다.
내 남편의 친할아버지가2차 대전 당시 전쟁 포로로 생활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 베르가모에 있다고 한다. 그저 쉬고 놀기 위해 계획한 여행길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시조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혼자 가보겠다는 남편에게, 애들은 증손들 아니고 나는 손녀 며느리 아니나며 우겨 따라나선다.
아름다운 여행지 한복판에 숙소를 정했던 우리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 포로수용소터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5마일이니 8킬로미터 정도인데, 딸들은 차를 타고 가자고 조른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차를 타면 알 수 없는, 걸으면 보이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릉지를 빙 둘러싼 구 도심에서 천천히 신 도심쪽으로 내려간다. 경사 덕분에 시야가 넓게 확보되고 중력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의 진행을 도와준다. 신 도심 전망에 눈이 즐겁다.
넓은 광장을 지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도 여럿 나온다. 고래등 같이 크고 넓은 부잣집들이 보이는가 하면, 발코니 다닥다닥 붙은 서민 아파트도 보인다. 오전 잠깐 비 소식이 있어 걱정했더니, 역시나 가는 길 중간쯤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열려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보고 싶지만, 이른 아침이라 문 연 곳이 거의 없어 난감하다. 평소 같았으면 들어갈 생각도 않았을 듯한 어설픈 카페에 들어선다. 장대비를 피할 공간을 내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침 꼬질꼬질함을 체 다 벗지 못한 젊은이가, 오늘 아침 나의 첫 카푸치노를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핫초코를 한잔 씩 한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소나기를 맞고 나니 으슬으슬 한기가 돈다. 다행히 30분여 지나자 비가 멈춘다. 다시 차를 타고 갔으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만, 살살달래 다시 걷기 시작한다.
구릉지를 벗어나 이제는 평야길이다. 모던한 도심 한복판을 지나 시내 변두리로 진입한다. 차량 정비소, 아웃렛 가구 매장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시를 벗어나는 간선도로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이 ‘땅 임대’ 피켓이 꽂혀 있는 지역도 지나친다. 방금 온 비로 땅은 질척이고, 끊임없이 조잘대던 딸들도 조용히 걷는데만 집중한다. 전쟁포로로 조심스레 허허벌판을 걸었을 20대의 해리(Harry)를 상상해본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제 길에는 간선도로를 타러 달려가는 차량들만 계속될 뿐,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자들은 낯선 아시아 여인이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하는 눈빛으로 힐끗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 왜 제가 이 외진 길을 걷고 있나 궁금하시지요? 저도 운명이 어떻게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이랍니다.”
드디어 여기쯤이라고 한다. 둘러보니 공동묘지 터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들 답게 천사와 십자가로 떠나신 조상들의 자리를 꾸며 놓았다. 지상의 죄를 사함 받고 저 세상 천국으로 가시라는 남은 자들의 염원이다.
막상 도착한 전쟁포로수용소 터는 그 공동 묘지 옆, 그저 수풀이 무성한 작은 동네 공원 같다. 이 곳의 어두운 역사를 설명하는 기념비가 있어 우리 모두 한발짝 다가선다. 그 순간 새까만 모기떼가 달려들어 피를 빨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모기에 물리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은 찬찬히 그 비석의 글귀를 읽는다.
2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잘못된 리더십으로 지역 패권을 잃어가던 시기였다. 반면 그들의 우방이던 나치 독일은 야욕으로 전 유럽을 흔들던 중이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까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이제 섬나라 영국으로도 나치군이 공격을 준비하던 때였다.
무솔리니는 나치에 의해 유럽 강대국들이 고전하고 있는 틈을 타, 유럽제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욕심 낸다. 영국 식민지였던 리비아로 무솔리니 군이 침공하고, 그 당시 윈스턴 처칠 수상은 본토 방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리비아로 지상군 소대를 투입한다. 나의 시조부 해리는 그때 리비아로 파병된 영국 육군 중 한명이었다.
소수의 영국군이 리비아에서 무솔리니 군대를 몰아내자, 자신감이 충만해진 영국군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이집트까지 쳐들어간다. 무솔리니 정권의 우방인 나치 정부는 그를 방관할 수 없어나치 2개 사단을 파병해 이집트 방어전을 펼치는데, 그때의 사단장이 '사막의 여우'로 유명한 롬웰장군이다.
나치군은 생포한 영국 군인들을 협상카드로 쓰기 위해 이탈리아로 이송한다. 그 당시 포로수용소 중 한 곳인 이곳 베르가모에서 내 시조부는 2년간 수용생활을 한다. 이후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하던 나치가 힘에 부치자 여러 균열이 발생하는데, 어느 날 이 포로수용소에 감독관리자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 틈을 타 중립국인 스위스로 도망을 도모한 그룹이 조직된다. 탈출 과정에서 전쟁포로들을 도와준 이탈리아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다. 나의 시조부는 스위스로의 탈출에 성공했고,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시조부는 결혼을 하고 나의 시 아버지를 고명아들로 낳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조부는 외상 후스트레스(PTSD)로 고통을 받으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가정을 지키기보다는 밖으로 도는 삶을 사셨다고 한다. 이 어린 아이는 어머니에게 남편이자 아들이었다.자신을 키우느라 고생 많았던 어머니를 항상 안쓰러운 마음으로 돌봤다 한다. 반면 아버지의 부재, 어려운 집안 환경 등으로 아이의 마음에는 허한 빈자리가 생겨났다.
에너지가 넘치고 밝은 성격의 내 시어머니는 그 한 청년의 마음 텅 빈자리를 채웠고, 두 사람은 다복한 가정의 꿈을 이룬다. 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네 명의 아들들은 돌아가면서 엄마 챙기기에 바쁘다. 책임에 따른 의무라는 느낌이 없다. 혼자 남아 외로울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들이라 옆에서 보기에 왠만한 딸들보다 낫다 싶은 정도다. 세심하고 애사스럽다.
포로 수용소 기념비 앞에서,모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문 기념사진을 몇 장 남긴다.
“증조할아버지 포로수용소 터를 방문한 증손들은 너희들이 처음이다”라고 추임새를 넣었더니, 따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도 뿌듯함이 어린다.
다시 관광지 한복판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시원하게 씻고나니 다들 배고프다. 주변 맛집을 찾아 나선다. 테이블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있고, 모인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토피아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는 여러 번의 우연과 고비,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 이뤄낸 귀한 존재들이다.
난 일본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우리 할머니 이야기도 자꾸 떠오른다. 전쟁은 비극이다. 그 세월을 살아낸 조상들이 있어, 지금의 나와 가족이 있다. 가족여행을 즐기는 이 복 된 시간도 그렇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