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 이곳은 다트무어(Dartmoor)라고 하는 영국 남서부 데본 지역의 국립 공원이다. 끝없는 평야와 구릉지로 이뤄진 황무지(Moor).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평야 한가운데 서면 나도 모르게 차분하고 숙연해진다. 나무 한그루 없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도 세찬 비를 피할 수도 없다. 땅에는 온갖 풍파를 이겨낸 단단한 잡초들이 바람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자라 있고, 말, 소, 양들이 싸 놓은 똥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연스럽지 못한 돌무더기를 보면 그 옛날 주술을 믿었을 영국 옛사람들을 상상하게 된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나니 각자 일정들이 생겨 주말마저도 온전한 가족시간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다. 계절마다 이 황무지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함께 보고 싶은 부모와 무작정 3-4시간 걷는 것이 싫고 피곤한 딸들은 아빠 생신 선물로 황무지 두 시간 걷기 이용권을 내밀었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아이들과 함께 황무지를 걷기 시작했다.
10월 초, 이제 막 뜨거운 여름의 기운을 벗고 가을빛이 군데군데 물들어 간다. 기온 10도 정도로 춥지 않은 날씨지만, 바람은 여전히 매섭게 불어댄다. 스무고개 이야기를 하면서 언덕을 오른다. 맞바람이 불어 점점 오르기가 힘들어진다. 얼마 전 무릎을 다친 아빠도 걸어올라 가는데 성인만큼 키가 커진 아이들에게 우는 소리는 소용없다.
우리 집 강아지 코코는 집순이인 줄 알았는데, 황무지에 내려주자 놀이공원에 온 어린이 마냥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우린 그렇게 치어리더 코코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뒤돌아 보니 황무지 전경이 더 멀리까지 눈앞에 펼쳐진다. 힘들어도 오르다 보면 시야가 넓어진다. 맞바람이 춥다고 옷깃을 여미던 우리는 어느덧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평소 같았으면 간단한 음식을 싸와 암벽 끝에 앉아 점심 먹으며 좀 더 걸을 텐데, 아빠 무릎부상 덕에 천천히 하산길에 오른다. 원래 무릎이 아프면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불편한 법이다. 딸 둘이 아빠 양쪽에 서서 나란히 걸으며, 농담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린다. 제 흥에 겨워서인지 아빠를 응원하기 위함인지 애매하지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웃음이 난다.
이 황무지를 가로 짓는 도로 중간쯤 한 농가를 개조한 펍이 있다. 가을 초지만 거센 바람 탓에 귀가 다 얼얼하다. 우리는 따뜻하게 몸도 녹일 겸 그 예스러운 펍에 들어간다. 점심때 즈음이라 하이킹하던 사람들이 제법 많이 들어차 있다. 이미 벽난로 불을 태워 놓아 실내는 따뜻하다 못해 후끈한 열기를 품고 있다.
점심 때라 다들 배가 고팠는지 메뉴 하나씩 고른다. 나는 이런 오랜 펍이면 주로 오늘의 수프를 먹어본다. 신선한 빵과 함께 나오니 양도 딱 적당하고 무엇보다 따뜻하게 몸을 데우기에는 이만한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워터크러스라고 불리는 물냉이 스프라고 한다. 살짝 당황했다. 보통은 고기 육수나 감자를 넣고 크림이나 치즈가 들어간 다소 묵직한 수프들을 서빙하는데, 보통 샐러드에 올려 먹는 여리고 여린 물냉이로 수프를 끓였다니 말이다. 난 먹는 데에 있어서는 제법 용감한 편이다. 생소한 재료의 수프, 오늘은 너다.
서빙된 수프를 보니 정말 푸르디푸른 수프다. 육수도 야채로 맑게 우려냈고 치즈나 크림을 넣지 않았다. 맛을 본 딸들은 역시 피시 앤 칩스나 버거가 옳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첫 수저는 풋내가 나는 듯했는데, 두어 번 더 먹어보니 자극 없이 보드라운 따뜻함이 느껴진다. 곁들여 나온 빵은 오늘 갓 구워낸 듯이 고소하고 폭신해서 안성맞춤이다.
조금 더 밖을 느껴보고 싶어 무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커피 한잔을 들고 앉아본다. 바람이 불어 뜨거웠던 커피는 금방 그 온기를 잃어버렸지만, 따뜻하게 배를 채운덕에 그전만큼 춥지 않다. 가족이 함께 하는 주말다운 주말의 따뜻함이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덕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