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 살던 나의 이웃들은 북유럽사람들이 많았다. 직장 때문에 2-3년 발령받아 온 가족들이었는데 그중 몇몇은 이곳 생활 방식이 너무 좋아 기한을 연장하거나 비자를 바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MM2H(My Malaysia 2nd Home)이라는 은퇴이민비자가 있어 가능했다.
중년이 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없어지기도 한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가까이에서 돌볼 필요가 있다거나,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니 입시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는 경우 등이다. 그중에는 가족들과 가까운 유럽이기는 하나 본국이 아닌 포르투갈에 안착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이유를 물으면 사는 환경이 말레이시아처럼 따뜻해서라든가, 생활비가 저렴해서 좋다는 답들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에는 골든비자(Golden Visa) 투자이민이나 IAS비자(매년 갱신해서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비자) 방법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비와 구름으로 유명한 영국에서 살고 있다. 맑은 날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영국섬 바로 옆, 대서양 덕분이다. 이 바다는 유난히 기류 변화가 심하고 바닷바람과 비를 영국섬으로 끊임없이 실어 나른다. 여름이면 따뜻한 나라로 휴가 갈 생각에 들뜬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했다. 일 년에 반은 포르투갈, 나머지 반은 영국 가족들과 생활하는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많아 이미 친근한 기분의 나라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커다란 야자수들, 후끈한 공기가 덮쳐온다. 조금 전까지 입고 입던 긴팔 윗옷을 벗고 이제는 뜨거운 남유럽을 즐길 준비를 한다. 남편이 숙소 예약과 함께 공항 픽업을 신청해 놓았다. 공항을 나서니 한 사람이 손을 흔든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기분 좋은 웃음을 띤 여인이 다. 낯선 곳에서 받는 환영은 더 이상 이곳을 낯설지 않게 하는 힘을 가진다.
주변 편의점은 어딘지, 싸고 맛있는 음식점은 어딘지 지역주민만 아는 정보들을 한참 알려준다. 대화 중 딸이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데 포르투갈어랑 많이 다르냐고 묻는다. 어여쁜 기사님은 “우리는 그들 말을 이해하는데, 스페인사람들은 우리말을 이해 못 한다고들 해요. 왠지는 모르지요.”라고 대답한다. 이베리아 반도 내 두 개의 나라, 그중에서도 대국인 스페인 옆 포르투갈을 짐작할 수 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저녁시간이다. 영국에서 포르투갈은 비행기로 두 시간여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여행은 여행이라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더욱 허기지다. 영국은 섬나라임에도 해산물이 비싼 데다 그 종류가 많지 않아 항상 불만이었다. 뭐 영국만이 아니라 북유럽, 서유럽 국가들도 비슷해서 유럽에서 해산물을 즐기는 것은 반 포기 상태였다. 오호라. 해산물의 종류도 많을뿐더러 가격이 영국보다 저렴하다. 포르투갈 음식점들의 차림표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구워 먹기 좋은 등 푸른 생선, 굴, 생새우 등은 싱싱해서 횟감으로 손색이 없다. 삶은 고동을 팔기도 한다. 그냥 뜨거운 물에 삶아 이쑤시개로 내장까지 손목 관절을 이용해 뽑아 먹던 그 추억의 맛이 가능하다. 말린 문어를 팔기도 한다. 큼직한 문어다리 하나면 발코니에서 맥주 몇 캔을 마셔도 끝이 나지 않을 듯하다. 마른오징어 먹어본지도 오랜만인 나는 신이 난다.
첫 끼니를 든든히 먹고 나니 피곤이 몰려온다. 택시를 탄다. 운전기사는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여행객인 우리에게 리스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리스본 주택난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최근 몇 년새 리스본시의 주택 가격 상승이 가팔라 자신의 월급으로 월세내기도 빠듯하다고 한다. 얼마 전 시내에서 주택난에 대한 시민들의 가두시위가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 주요 원인으로 인플레이션과 함께 급속히 늘어난 이민자들을 지목한다. 문득 포르투갈로 이사 간다던 북유럽 친구들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은퇴이민/ 디지털노매드로 불리는 그들은 리스본 경제의 하나의 축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고 비행권부터 숙소, 여행정보까지 한 자리에서 스스로 해결 가능한 시절은 불과 삼십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 이민하면 본국에서 여러 사정으로 고행에 올랐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살고 싶은 나라에 자기 돈 들고 나와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은 천혜의 자연환경에 비교적 저렴한 물가, 안정된 인프라 등이 매력적인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우리 숙소는4층 건물의 맨 위층으로 옥탑층까지 쓸 수 있었다. 그리고보니누군가 주거지로 살 수 있는 집이었을 텐데, 이제는 리뷰 우수한 단기 임대집이 되어있다.
발코니에김 모락모락 나는 차 한잔을 들고 앉는다. 빡빡하게 밀집한 건물들이 보인다. 빨래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것을 보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사는 맛이 한가득하다. 난 환영받는 관광객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