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린 화초가 자라는 데에는 '적정한 햇볕과 물 그리고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날, 어여쁜 꽃을 피우기도 한다. 벌레가 방해한들 이겨 낼 힘이 있다. 생명은 그렇게 세상 에너지를 먹고 살아간다. 사람이라고 다를 쏘냐. 생태계의 굴레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또한 이 화초와 다를 바 없다.
말레이시아 살던 시절, 나는 웬만하면 가장 뜨거운 때를 피해 새벽이나 저녁때 야외활동을 했다. 새벽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저녁에 조깅을 하는 식이었다. 이곳은 휴양지다 보니 관광객들이 많았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의 백인 관광객들이 휴가를 오고는 했는데, 아침이면 제일 먼저 썬베드에 누워 자리 잡았다. 우리끼리 키득거리며 독일사람 아니면 영국사람이라고 짐작했고, 거의 십중 팔구는 맞췄다.
불과 하루 이틀사이 하얗던 피부는 발갛게 익어, 보는 것만으로 그 아릿함이 전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 내내 그들의 일상은 똑같이 반복됐다. 이리저리 햇살에 델까 피해 다니던 나는, 저들은 왜 그토록 태닝에 목숨을 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말로 들어 아는 것과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이 얼마나 다르던지. 영국 날씨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많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사 오고 현실이 되니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영국 섬 옆 대서양은 끊임없이 바다 바람과 습기를 밀어 올리고 햇볕이 쬐는 날이 귀하디 귀하다.
태양의 뜨거운 기운을 받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즐기던 나는,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인들 하면 떠오르는 알듯 모를 듯한 감정이 절제된 표정의 근원이 날씨임을 알아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햇볕에 빨래가 마르지 않아 에어컨 대신 빨래 건조기를 사야 했고, 웬만하면 영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음에도 으스스 뼈를 에는 추위에 온풍기를 마련해야 했다.
인도태평양계 영국인들은 겨울이면 비타민 D영양 보조제를 챙겨 먹는다고 한다. 햇볕에 익숙한 사람들이 영국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하루라도 해가 짱짱하게 뜨면 모두들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은 공원 잔디밭, 해변가 야외에 누워 웃옷을 벗어젖히고는 햇볕을 쬔다. 최대한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는 마음들이다. 해가 질 때까지 그 행렬은 계속된다.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로 2주간의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우선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모아 본다. 네 사람 모두 만장일치로 우선 뜨거운 바닷가를 손꼽았다. 사는 곳에서 직항이 있단 이유로, 포르투갈 남단 라고스(Lagos)를 첫 방문지로 정한다. 해안선을 따라 멋진 협곡들이 자리하고 있고, 오래되고 고즈넉한 어촌 마을이 있다. 여행객들이 여유 있게 바다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첫날 눈 뜨자마자 부산하게 물놀이 준비를 하고 바닷가로 향한다. 해변 모래는 보드랍고 시야가 탁 트이는 풍경을 자랑한다. 불과 오전 10시임에도 뜨거울 하루를 예상할 만큼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썬베드와 파라솔이다.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는 썬베드 방향과 햇볕의 조도를 잘 고려해 배치해서 눕는다.
남편과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바다로 먼저 뛰어든다. 아무리 뜨거운 여름 날씨라도 나에게 대서양 바닷물은 차다. 햇볕으로 몸을 충분히 데우지 않으면 물에 뛰어들 수가 없다. 그릴에 고기 굽듯 몸의 앞면과 뒷면을 고루 태운다. 책을 읽다가 까르륵 잠이 들기도 한다.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베이기 시작한다.
이제 슬슬 바다 입수를 해볼까 발끝을 대서양물에 살짝 담가본다. 차갑다. 머리만 물 밖으로 동동 띄운 딸들은 바닷물로 풍덩 뛰어들면 괜찮다고 어정쩡히 서 있는 나를 응원한다. 난 발목 그리고 무릎, 다음은 배꼽까지 살금살금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간신히 배꼽까지 물에 몸을 담그고 덜덜 떨고 있던 그때, 크게 한번 바다너울이 인다. '그만 꾸물대고 어서 내 품으로 들어오렴.' 대서양 바다가 무심히 툭 내 어깨를 두드린 듯하다. 꼼짝없이 머리끝부터 홀딱 다 젖어버린 나는, 더 이상 저항할 이유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춥다 너무 춥다. 이럴 때는 움직여야 한다. 개 수영 마냥 고개만 빼꼼히 물 밖으로 내어 놓고는 정신없이 팔다리를 움직여 저 멀리 신나게 놀고 있던 가족들에게로 다가간다. 그 사이 너울도 몇 번 더 지나가고 나는 버둥거리느라 춥다는 감각을 잃는다. 대서양 바닷물에 익숙해진다. 조금 있으니 바닷물에서 기분 좋은 청량감이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뜨거운 햇볕과 맑은 공기 그리고 대서양 바닷물의 품에 포옥 안긴다. 집 떠나기 전, 마당에 꽃몽오리를 품고 있던 빗 속 화초를 떠올린다. 나의 모든 감각을 이 세상에 맡긴다. 움추렸던 몸의 긴장을 풀고, 나는 이제 활짝 핀 꽃망울처럼 그렇게 만개하는 모습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