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책을 찾는데 딱히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숨겨둔 비책 마냥 문학상 수상작 리스트를 둘러보곤 한다. 이번에는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을 훑어보는데 <코리안 티처>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문화의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인 내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지만, 제목에서 다분히 내용이 짐작되는 진부한 향이 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2020년 수상작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첫 장을 펼친다.
서수진 작가 소설 <코리안 티처> 표지 사진 @한겨레출판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학원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간제 계약직 강사로 일하는 4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어렵게 취직한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색깔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곧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직업환경과 그 안에 존재하는 여러 차별들을 경험한다.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려면 인사고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한류의 붐을 타고 많은 외국인학생을 유치하려는 학원의 정책에 따라 계약조건에서 벗어나는 감정적, 시간 외 적 노동을 요구받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 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 노동 환경이 그려진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임신과 출산이 직업에 위협요소가 된다. 학원 내에서 인기 있는 여성 강사는 헤픈 사람이 아닐까 의심받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너무 딱딱하다고 손가락질받는다. 강사와 학생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가 발생하면 소통이 아닌 인신공격이나 방어로 풀어가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강사들의 일자리는 학생들로부터의 수업 평가, 학원으로부터의 인사고과에 따라 년마다 아슬아슬하게 연명된다.
우리가 말하는 한류와 같은 세계화가 얼마나 빈약한 학력, 직업, 계급, 국적에 따라 많은 불합리에 노출되어 있는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외국인 영어강사는 폐업하는 학원의 교묘한 술책에 밀린 급여를 떼일 위기다. 어학원 학생들이 집단으로 지정학원을 이탈, 불법 노동자가 된다. 학원은 비즈니스적인 운영에 따라 수용가능 규모를 넘는 외국인 학생을 유치한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는 퇴색한 모습이 그려진다.
What is the 4B Movement @Inside Edition Youtube Channel
얼마 전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낙태 금지법에 반대하던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미국 여성인권에 대한 우려가 높다. 트럼프 대선 승리 이후, 여성의 낙태권을 옹호하던 “내 몸, 내 선택” 슬로건을 비꼬며 “네 몸, 내 선택”이라는 글이 게시물이 엑스, 틱톡, 페이스북, 레딧 등 온라인 여성 혐오 표현의 언급 빈도가 늘어났다고 한다.
대선 이후 여성운동가들이 ‘4B’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한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에 동참하자는 취지다. 4B는 2010년대 중후반 한국 여성운동가 두 사람이 주창한 논리로, ‘비 혼/비 출산/비 연애/비 섹스’ 이 네 가지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다.
4B운동은 자연선택이 아닌 능동적인 개인 선택에 대한 동의, 동조를 원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과연 이를 통해 여성의 행복 기대를 더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양성 간의 교류와 사랑은 조건이기 이전에 여성 행복 본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출산 현상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2023년 기준 여성 1인당 0.72명으로 세계 최저 출산율이다. 저출산의 이유로 주로 주목되는 주택난과 양질의 일자리 부족 등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특히 한국 사회가 남성근로자에 비해 여성이 결혼, 출산을 통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더 높다는데 출산 기피의 원인이 있다.
‘살아남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것, 버텨내는 것, 끝내 살아남는 것.’
<코리안 티처> 서수진 작가의 말 p.197/205 교보이북
작가는 실제 호주에서 한국어강사로 근무하던 중, 코로나 사태로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 답답한 시기에 이 글을 집필했다고 한다. 현장경험이 있기에 각각의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짐작할 수 있다.
장편소설 <코리안티처>는 어학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 불합리와 불평등 특히 여성들이 마주치는 사회문제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운동과 같은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데 많은 시사점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각 주체 간의 협의와 대화가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지, 정보와 사고의 편협함에 빠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 대문사진은 photo or infographic by Kaitlin Burns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