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으로 들뜬 한 달을 보낸다. 그와 같은 시기에 러시아 톨스토이 문학상 외국 문학 부문 (야스나야 폴리아나상)에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 작가의 작품 <작은 땅의 야수들>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한국 문학계의 낭보가 아닐 수 없다. 명망 높은 러시아 문학계에서 1,2차 세계대전 당시 한반도를 배경으로 쓴 미국 작가의 소설을 선정했다니 더욱 흥미롭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조선반도 호랑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조선인들의 기백이자 상징적인영물인 호랑이를 일본인들은 단순한 맹수로 폄하하지만, 그 영민함과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의지, 빠르고 강인함을 절대 낮춰봐서는 안 된다. 눈밭에서 죽어가던 한국인이 호랑이의 위험에 빠진 일본 장교를 돕는다. 그에 대한 보은을 약속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긴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작은 땅의 야수들> 교보이북 p.341/377
주인공 옥희는 어린 나이에 허드렛일도우러 찾아간 기방에서 기생이 되는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글을 배우고 문학, 예술 등 교육을 받으며 그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어려운 사정을 알기 때문일까.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정호’에게 친절하다. 인력거를 끄는 ‘한철’에게서 남다른 총명함과 애정을 느끼고 어려운 사정에 있는 그를 돕는다. 뛰어난 춤과 연기실력을 알아본 극제작자에게 스카우트되어 기생에서 무성영화배우이자 연극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다. 삶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와의 사랑과 이별을 반복한다.
식민 시대 조선인들은 핍박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일본은 전세를 확장하며 갈수록 흉폭해진다. 옥희를 중심으로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얼기설기 얽혀가며 각자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묘사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사람, 일본 권력에 아부하며 잇속을 챙기는 사람,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주들, 혼란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부분의 양민들. 격변의 시대, 각자의 자리에서 살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바라본 시베리아 전경 @김명주
내가 경험한 러시아
나는 2019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아이들과 대륙횡단 여행을 했다. 배우자와 함께 오랫동안 생각해 온 꿈이었다. 바이칼 호수로 유명한 이르쿠츠크가 러시아 첫 기착지였다. 4월 중순임에도 아직 흰 눈들이 쌓여 있고 호수는 얼어있다. 스피드해상보트로 호수를 달려보는데 여행가이드가 영하 30도 겨울에는 빙질이 투명하고 참 좋은데 지금은 따뜻해져 그 멋진 모습을 못 보여줘 아쉽다고 한다.
달리는 기차를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은 키 큰 침엽수들과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과 같은 대지가 이어진다. 한 겨울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울지 짐작하기 충분하다. 이 동토에서도 생명이 살아 꽃 피울 것이라 생각하니 풀뿌리 하나에도 그 생명력에 경외감마저 든다.
러시아 정교회의 금빛 돔이 번쩍이고 가는 곳마다 레닌 동상이 서 있다.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 음악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그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 중심가에 머물던 날이었다. 러시아 전승기념일 즈음 이어서일까. 아침 눈을 떠보니 숙소가 속해있는 지역에 보행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전승절 행사를 위해 밤부터 군 탱크와 미사일 그리고 수많은 군인들이 모스크바광장으로 집결 중이었다. 하늘에는 전투기들이 행사예행연습으로 끊임없이 비행 중이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숙소 아래 1층에 내려가본다. 골목마다 경찰들이 서서 통행증여부를 확인하고 통과시키는 모습이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다. 자유로운 듯 하지만 언제든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공산정부를 본 것 같다. 국토가 넓은 나라에서 애국전쟁에 대한 정서를 활용해, 지도력에 대한 지지를 받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통치 방식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소설 속 러시아
소설 속 러시아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이끄는 ‘명보’는 조선반도에 손꼽히는 재력가이자 독립운동가다. 성과 보다는 민족이 상생할 수 있는 큰 그림을 위해 오늘의 희생을 감수하는 인물이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니 몇몇 지식인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과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움을 청하러 직접 나선다.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그들이 조선반도에서 벌이는 일들을 막아달라는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다.
전 세계 식민지들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과는 달리, 미국은 일본과 협의된 이권에 따라 독립투사들의 청을 거절한다. 반면 그들은 러시아 레닌과의 면담에서 환대받고 60만 루블의 지원금도 받는다. 물론 이에도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명보’는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조선이 독립국이자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꿈꾼다. 일제 식민지배와 지배계급의 탐욕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 후 이념 분쟁에서 빨갱이로 몰려 결국 그가 목숨을 잃게 되는, 또 다른 고통을 겪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이후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조화롭게 맞물리게 하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이 수정처럼 또렷한 의식 속에서 그를 압도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 교보이북 p.319/377
김주혜 작가는 6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 속에서 관통하는 핵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처음 나왔던 소재들이 흐지부지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다른 문학들과는 다르다. 작가는 ‘사랑’과 ‘시간’에 대한 소재를 가지고 ‘시간이 가면서 변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에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말한다. 독립투사였던 외할아버지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작성하게 된 배경,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명작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주혜 작가에게 이번 톨스토이상 수상은 작품 선정 이상의 돌고 도는 인생의 필연성의 의미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바이칼호수를 달리던 해상보트 @김명주
그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며 창작 소설 속에 푹 빠져 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최근 북-러 방위조약을 맺었다고 하더니만, 북한군 수 천명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러시아 동토에서 훈련 중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있다. 남북한을 넘어 동북아 그리고 세계 안전에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외화벌이를 위해서 북한 정권이 젊은 군인들을 사지에 몰았다는 사람도 있고, 북한의 불안정한 안보상황에 러시아를 우군삼기 위한 포석이라는 설도 있다. 명분을 떠나서 지금 파병된 것으로 알려진 북한 병사들은 러시아의 영토 확장 야욕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전하기 직전이다. 이 군인들이 전쟁에 자원해서 나갔을 리 없다.
소설 속 러-일 전쟁의 막바지, 총알받이가 필요한 일본군이 조선땅에서 길 가던 청년, 일하고 있던 가장들을 무작위로 끌고 가 징병하는 장면이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수 만명의 북한 군인 현지 파견 소식을 들으면 권력자들에 의해 전쟁에 희생되는 민초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역사는 왜 돌고 도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인가. 작품성과 함께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이 어우러져,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귀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