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 한 번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볼 때입니다.
인생 2막 4050 시작을 위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알아갑니다
“인생의 최초 40년은 내가 텍스트를 부여하고, 나머지 30년은 그에 대한 주석을 부여해 준다 – 쇼펜하우어”
40대가 된 지금, 갑자기 목적지를 잃어버린 달리는 열차 마냥 지금까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뒤죽박죽인 채 허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열심히 산다고 살았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나 스스로 부여한 내 인생의 텍스트는 무엇이 있었더라. 그것부터 찾아야겠다. 그 방법이 나에게는 글쓰기다.
나의 20대는 어머니를 암으로 잃어 하늘을 잃어버린 상실감, 반드시 목표하면 이뤄내겠다는 집요함, 더 발전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20대의 치기 어린 열정으로 무던히도 애쓰던 시절이었다. 대신 신경이 예민했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너무 뾰족하다 보니 큰 그림을 잘 볼 줄 몰랐다. 그저 빠르게 아웃풋을 낼 생각에 바빴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동생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고, 다른 가족들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나에게 이기적이라고 하셨다. 난 그 말씀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나 살기도 너무 바쁜데 말이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아는 나의 친한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네가 통학 지하철 안에서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등 세우며 책 읽는 모습 보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 난 네가 사람들에게 들이는 공에 비해 그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참 다행이야”라는 말을 했었다. 유난히 잘 웃었고 농담도 많아 보이지만, 평소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친구의 조언이자 격려였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 얘기, 사회 얘기. 이런 주제로 오랫동안 얘기해도 지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내 연봉, 내 가치 올리기. 온전히 그 세상만 보고 달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하는 행동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고 당연한 거라고 인정해 주면서도, 너무 달리기만 하면 부러진다며 종종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중 가장 크게 내 관점을 변화시킨 주제는 여행이었다. 이 사람은 세상에 두려운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고 언젠 가는 세게 배신할 수도 있다고 바라보는 내 세상과는 달랐고, 얼마든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더 확실하게 인생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들 넷 중 셋째. 딸이기를 더 바랐던 이 아들은 잘하던 못 하던 그것은 모두 너의 몫이라는 방임 육아의 산물이었고, 누군가에 기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방향 만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것에 칭찬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 그만큼의 성과 기대치도 있었기에 나중에는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족할까 봐 항상 조마조마하던 내 성장기와 딱 반대인 사람이었다.
데이트로 드는 시간, 비용, 같이 만들어가는 삶의 깊이 모두 다 아까우니 이제 결혼 생각해 보자 데이트 일 년 만에 내가 제안했고, 2년 만에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결혼 이후에도 주중에는 각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놀러 다니는 일상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결혼 후 그는 요란하지 않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가족들을 대하는 법을 보여줬다. 덕분에 가족 간의 관계도 훨씬 화목해졌고, 부부 사이에 예쁜 두 딸도 태어났다.
첫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 3개월이 끝나 복직을 눈앞에 둔 시점, 아이가 갑자기 열 경련을 일으켰다.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가게 됐고 그 이후로도 크고 작게 계속 병원 다닐 일이 생겼다.
시부모님은 저 멀리 외국에, 친정엄마의 부재 속에서 '그냥 앉아만 계시더라도 엄마가 계시면 좋겠다'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남편과 나는 결국 내가 일을 그만두고 당분간 아이를 전적으로 키우는데 동의했다.
아이가 인생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지만, 속에서는 불이 일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는 삼복더위고 겨울 추위고 아랑곳하지 않고 두세 시간씩은 기본으로 걸어 다녔던 것 같다. 전업주부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프로가 되겠다며 무척이나 열심히 살았던 기억이 난다. 만 세 돌까지 두 아이는 끊임없이 잔병치레를 했고 특히 둘째 아이는 호흡기 문제를 항상 달고 있었다.
그즈음 남편은 싱가포르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 시장 관련 업무제안을 받았고, 휴가를 갔던 말레이시아에서 제2의 삶의 터전을 발견하게 된다. 첫 아이 네 살, 둘째 아이 두 살.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세상으로 용감하게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내가 살 집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은 종합 병원 도보 거리 내였다. 남편이 출장을 가고 없어도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보로 혼자 갈 수 있는 위치여야 했다. 내가 얼마나 안전 문제에 걱정이 많았는지 나중에 돌아보니 참 가여운 지경이었다.
말레이시아, 중국, 인도 문화가 혼재되어 함께 공존하는 말레이시아는 뜨겁고 끈적한 공기만큼이나 이질적이면서 새로웠다. 새벽 다섯 시가 되면 무슬림 사원에서 특유의 기도 낭송이 울린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몇 번을 놀래 깨어났는지 모른다. 힌두사원 앞은 온갖 채도 높은 꽃들과 사모사 카레 냄새가 진동하고, 불교 사원 앞을 지날 때면 그 특유의 향 냄새와 뭔가 태우는 탄내가 진동을 한다.
내가 사는 곳은 세계 각지에서 일 때문에 온 주재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대부분 어린아이들을 대동한 가족단위가 많았다. 어느 날 콘도 내 수영장에 누워서 주위를 보니, 내 또래 엄마들이 아이들과 놀고 있다. 멀리서 보면 편안하고 안락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들 남편 따라 아이들 데리고 이역만리 땅에서 근원적인 외로움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남편과 이야기하며 나는 이번에 이런저런 문화를 다 경험해 볼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 학부모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일로 복귀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여기서 아이들 잘 보살피면서 문화경험을 많이 하자 공감대를 가진 엄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문화 특성상 무슬림, 불교, 힌두교 축일은 다 챙겼고, 동남아시아 열대 기후와 자연환경, 동남아 과일, 음식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물가가 싸다 보니 이 엄마들은 시간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었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사오기 전 사업가, 교직원, 박사과정 모두 한 열정들로 자신의 이력을 쌓아가던 엄마들 답게 자선 바자회, 실향민 학교 건립 모금 운동 등 끊임없이 사회활동 이벤트들을 만들어갔고, 무엇보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들만의 나이트아웃은 정말 재미있었다. 역시 열심히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행사의 일종이었다.
몇 해를 이렇게 재미있게 지내며 가족과 같이 지내던 친구와 그 가족들은 각자 2-3년의 해외 근무 기간을 끝마치고 나면 대부분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느 순간 '인생의 거품' 속에 사는 느낌을 받았다. 보내온 시간들은 추억으로 소중하지만, 주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가지 않았고,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내 이력서에 올릴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영국 시부모님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나는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멀리 가지 않겠다 농담처럼 얘기했었는데, 아버지도 그즈음 오랜 투병 끝, 소천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5년간의 말레이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영국행을 결정하게 된다. 딱 내 나이 마흔이 되는 시점이었다.
나의 여행 얘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를 글로 꼭 남기고 싶었던 진짜 이유를 글을 쓰면서 찾아냈다. 찾고 보니 저 깊이 숨어 있던 내면의 자아를 찾고 싶었고, 인생 후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더 얻고 싶었던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어떤 재주든 사용하라. 노래를 가장 잘하는 새들만 지저귀면 숲은 너무도 적막할 것이다 – 헨리 반 다이크”
물론 유수의 많은 작가님들과 비교하면 소곤거리는 작은 소리에 테도 잘 나지 않는 작은 새 일지라도 숲 속에서 노래해보고 싶다.
앞으로 브런치 채널을 통해 4050이 공감할만한 소재, 자발적 이민 1세대로써의 고민과 생각들을 함께 나눠가고 싶다. 글을 통해 나는 누군가에게서는 그럴 수도 있지 공감을 받기도 하고, 어쩜 저래하지 말아야겠다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으며, 나도 저 사람처럼 조금 더 힘내봐야겠다 에너지 드링크가 되어 보고도 싶다. 지금 내가 독자로써 브런치 글들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들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난 내 생각을 잘 정리해 가며, 건강하고 씩씩하게 4050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