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처음 영국 시댁을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저녁 정찬 식사를 하기 전, 식구들이 근처 펍으로 향한다. 그 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어이 형님’, ‘형수님 잘 지냈어요?” 아버님을 알아본 사람들 여럿이 인사를 건넨다. 아버님은 “내 며느리야” 그분들께 내 소개를 하신다. ‘이 이방인은 누구인고’ 하던 표정들이 금방 걷히고 ‘반가워요, 앞으로 자주 봐요’ 다정한 눈빛으로 변한다. 펍은 일종의 마을회관 같은 느낌이었다. 소박한 저녁의 여유가 느껴지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영국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 슈퍼마켓에 갔던 날, 마트 물품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서 신이 났다. 그중에서도 맥주 가격은 정말 저렴했다. 브랜드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 라거 병맥주 가격이 콜라 가격과 비교해서 별 차이 없는 정도였다. 맥주 이외에 술 종류도 다양하고 대부분 한국에서 사 먹던 가격보다 싸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가격 따라 천차만별, 영국 펍(Pub) 시장
옛 교회가 펍(Pub)으로 탈바꿈한 한 곳
웨더스푼(Wetherspoon)이라는 대형 펍 체인 브랜드가 있다. 이 회사의 소유주는 지역을 돌면서 버려지거나 값싸게 나온 건물들을 매입해서 펍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이 펍 체인점 두 곳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은 예전 교회였다. 목사님이 설교하셨을 교단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은 다른 지역 펍에 비해 20~30% 정도 가격이 저렴하다. 요즘 살림살이 팍팍한 서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식을 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가 되고 있다.
고급 펍도 많다. 매장 내 양조장을 구비하고는 직접 만든 맥주를 파는 곳, 지역마다 유명 양조장들에서 만든 다양한 맥주를 소믈리에가 직접 시음하고 모아 파는 곳.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펍들도 있다. 우리 지역에는 찰스 디킨슨이 자주 오던 곳이라는 펍이 있는데, 로만시대 벽난로와 함께 현대식 고급 인테리어가 공존한다. 이런 때는 맥주 한 잔과 함께 그 문화를 즐기는 재미가 있다.
가격 경쟁력이 있거나 고급화된 펍이 아니라면 영세 동네 작은 펍들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근래 생활물가(Cost of Living)가 가파르게 오르더니, 이제는 펍에서 마시는 좋은 맥주라면 한 잔에 만오천 원 정도 가격이다. 집에서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지역 펍들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처음 시댁 식구들과 함께 갔던 그 동네 펍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영국에는 없는 안주 문화
한국 술문화는 음식에 곁들여지는 주류 문화라면, 영국은 안주 없이 맥주 자체를 즐기는 문화다. 안주 없이 마시는 맥주는 그 향과 맛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 그 재미를 즐기다 보면 얼마지 않아 금방 취기가 올라온다. 지역 맥주의 경우 도수 5~6% 또는 그 이상을 가진 경우가 많다. 펍에서 아예 식사를 주문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감자칩, 돼지껍데기 과자나 땅콩 같은 간식류들을 가볍게 겸해 맥주를 즐긴다.
영국 펍에서는 사람들이 바에 직접 가서 주문한다. 그런데 이 줄이 오는 순서대로 서는 한 줄이 아니라 그냥 바 아무 데나 기대 서는 줄이다. 처음에는 어디에 서야 하나 당황하기도 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서 눈치껏 먼저 온 사람이 주문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맥주 주문하고 서빙받는 동안 서버 바텐더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오고 가며 사람들과 짧고 가벼운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다.
한국의 경우 펍에 들어서면 자기 테이블에 앉아 술을 즐기기 때문에 다른 테이블 사람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다. 영국은 음식 없이 맥주 마시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서서 마시거나 자리에 앉더라도 바에 주문한 맥주 나르느라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눌 일이 많다. 혼자서 맥주 한잔 놓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혼자도 외롭지 않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은 좋은 것 같다.
자체 양조장을 함께 운영하는 펍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맥주 시장
1516년 윌리엄 4세는 Reinheitsgebot(순수법)을 채택했다. 맥주의 재료를 물, 보리, 홉으로 제한하도록 규정한 법인데, 지금도 그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양조장이 많다.
요즘 유럽인들의 맥주 소비량이 줄고 있다는 기사를 본다. 맥주 대신 고를 수 있는 알코올음료가 많다. 가볍게 마시기에는 맥주 가격도 많이 올랐다. 칼로리가 높고 무 알코올 음료를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지역 양조장들은 다양한 맛을 시도하고 있다. 지역 과일을 같이 발효시키거나 과일즙을 섞어 헤이지 페일 에일(Hazy Pale Ale)을 만들기도 하고, 초콜릿, 커피, 바닐라와 같은 디저트 같이 진한 맛을 첨가하는 흑맥주도 있다. 시대에 맞게 무알콜이나 칼로리를 낮춘 맥주가 다양하다.
먹을 것이 흔해진 요즘, 애써 만든 시판 빵 중 44%가 그냥 버려진다고 한다. Toast Brewing이라는 양조장은 그렇게 버려질 빵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어 수익금은 자선단체에 기부한다고 한다. 음식 낭비를 줄이고 환경을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도 많아지도 있다.
그 옛날 살균한 물을 먹고자 물 대신 마시기 시작했다는 맥주. 맥주에 진심인 영국에서 그 맛을 즐기는 재미는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