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도를 달리다 보면 온통 들판에 소, 양, 염소, 말과 같은 가축들입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풀 뜯으며 유유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세상 시름없이 평안해 보입니다. 옛 영국 화가들 작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요. 영국 식문화를 이끌어 온 주역들이기도 합니다.
치즈는 영국인들의 일상 속에 함께 하는 식재료입니다. 한국 부엌에 김치처럼, 영국 부엌에 버터와 치즈가 없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재료만 있으면 음식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대부분 버터, 치즈 들어가면 웬만하면 맛있다고 합니다. 익숙한 맛의 힘이지요.
처음 이민 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한국에서 제게 치즈는 기호식품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디 가나 치즈 세상인 필수식품이 되어버렸지요. 매번 치즈를 먹기에는 그 맛의 묵직함이 버거워서 집에 돌아오면 바로 김치 한 점을 찾고는 했었어요. 그러던 제가 이제는 맛 좋은 치즈 한 점을 보면 입이 침이 먼저 고입니다.
런던 버로우(Borough)마켓 치즈 매장
저는 개인적으로 콤콤한 냄새가 나는 블루치즈나 풍미가 남다른 염소 치즈를 좋아합니다. 얼마 전 런던 버로우 마켓(Bourough Market)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청과물 시장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드럼통 만한 치즈를 덩어리째 가져와서는 주문한 양만큼 잘라 파는 매대가 있기에 평소 좋아하는 블루치즈를 제법 많이 사 왔습니다. 녹여서 파스타 소스로도 먹고 크래커 과자에 올려 안주로도 먹고... 그날 아주 신나게 즐겼지요.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다음날 화장실 고생을 좀 했지요.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탈이 납니다.
진한 풍미를 즐기는 저와는 달리 남편은 다른 음식 재료들과 무난하게 어울리는 체다 치즈를 좋아합니다. 치즈는 빵이나 다른 재료의 맛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풍미여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순전한 그의 사견입니다.) 점심 샌드위치에 치즈 한 조각. 그것으로는 모자라서 소포장된 치즈를 간식으로 챙겨 먹기도 합니다. 토마토와 함께 먹는 가벼운 모차렐라(Mozzarella) 치즈, 구워 먹는 할루미(Halloumi) 치즈를 즐기기도 합니다.
영국 대형 식품점 치즈 매장
평소 샌드위치 안에 치즈를 넣어 간편하게 즐기기도 하지만,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도 치즈는 음식 주 메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멋진 접시에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모습, 처음에는 케이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치즈를 모둠으로 쌓아 올린 것이더군요. 그 옆 과일과 크래커들을 함께 놓아두니 샴페인이나 와인과 어울리는 아주 근사한 안주로 탄생합니다. 처트니(Chutney)라고 하는 과육이 많이 담긴 잼 같은 소스를 치즈에 얹어 같이 먹는데...누가 좀 말려줘요. 맛있습니다.
요즘 영국에서는 가공 식품을 많이 섭취하다 보니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에 지장이 생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인병이 많아지니 그 해결 방안으로 장 건강이 주목받고 있지요. 영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Tim Spector라는 전문가는 최고의 발효식품으로 4K를 명명합니다. 케피르 Kefir(요구르트와 요구르트 중간즈음한 발효 음료), 김치 Kimchi(유산균 가득 김치), 콤부차 Kombucha(유산균 음료) 그리고 크라우트 Kraut(독일 양배추 절임)입니다.
이를 본 영국인들은 “왜 죄다 외국 음식이지?”, “전통적으로 영국에서 먹던 발효식품은 뭐가 있지?”라고 묻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받는 영국 발효식품은 바로 치즈이지요.
치즈는 기원전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양과 염소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만들어 섭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만 시대에는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서 다양하게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고 중세부터는 수도원의 승려들이 치즈를 만들어 팔면서 하나의 산업화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영국 치즈로 유명한 체다(Cheddar) 등이 그 당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각 지역별로 특색 있게 만들어지던 치즈들은 물류가 발달하면서 이제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치즈 매장 in Borough Market
영국 치즈라고 하면 '체다(Chedar) 치즈' 뿐만 아니라 붉은 빛의 '레스터(Leister)', 블루치즈인 '스틸톤(Stilton)', '글로스터(Gloucester)' 치즈 등 한번쯤 이름을 들어봄직한 치즈들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탈리아 모차렐라(Mozzarella), 파마산(Parmasan) 치즈, 프랑스 브뤼(Brie), 까망베르(Camembert), 네덜란드의 구다(Gouda), 그리스 페타(Petta) 등등 유럽은 말 그대로 맛있는 치즈 생산 천국입니다.
성인병 예방차원에서 탄수화물로 줄이고 육식 아닌 채식으로 식생활을 바꾼 친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체지방량이 줄지 않아 걱정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주말이면 치팅데이를 갖는데, 치즈를 그렇게 편안히 그리고 많이 즐겼대요. 치즈는 영양적으로 칼슘이 풍부하고 단백질, 몸에 좋은 지방을 가진 발효식품 입니다. 다만 열량이 높고 포화지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적절한 양을 즐겨야 비로소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요.
무엇이든 '적당하게,균형있게'란 쉽지 않다는 것을, 내 눈앞에 놓여 있는 블루치즈 한 조각을 바라보며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