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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선 May 13. 2024

아르수아에서 카미노가 되다


'치즈의 땅' 이라 불린다는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위치해 있다는데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열쇠 보관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주인에게 연락해

뚱한 표정으로 나타난 주인집 아들의 도움으로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깔끔히 정리된 집기, 식탁 위 호두와 바나나를 담아 놓은 바구니,

화장실 휴지 끝에  환영 인사말 스티커를 보는 순간 

주인의 반짝이는 센스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걸었다.

내일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 카미노 길을 걷기로 해 특별한 저녁을 위해

슈퍼에서 홍합과 야채 등을 구입해 저녁을 준비한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을 차려 낸 동생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으로 맛나게 먹는데

밥맛이 없다며 제대로 식사를 못하던 친구는 약국을 다녀오겠다 해서 동생이 따라나섰다.

2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아 걱정이 쌓여 갈 즈음에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며 친구가 치료받는 사진을 보내온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식은 밥상을 정리하고도 한참이 지나 숙소로 돌아 온 친구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공립병원에서 심전도검사를 하고 높은 혈압을 떨어뜨리려고 세 번의 알약을 먹고......

친구 본인도 놀랄 정도로 높이 오른 혈압이 떨어졌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여행 와서 병원이라니......

찾아 들어간 병원이 공립병원이었고 

순례자는 무료로 진료를 해 줬다 하니 그것 또한 다행이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영양제를 털어 넣고 

아르수아에서의 첫날밤을 긴장 속에서 보낸다.


새벽이 천천히 열리고 있다.

긴장과 걱정으로 지 샌 그 밤은 온데간데없고 

햇살의 따스함과 맑고 시린 푸른 하늘이 아침 인사를 한다.

다소 핼쑥해진 모습으로 같이 걷겠다고 나서는 친구가 살짝 걱정이 된다.

스틱을 챙겨 마을 한복판을 지나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은 천천히 내리막은 더 천천히, 

아르수아 마을 구경도 하고, 동네 어르신이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있는 야채가

우거지 수프에 들어갔던 야채라는 것도 알아 가며,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대자연이 주는 경치에 감탄하며 행복한 걸음을 한다.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지친 걸음에 힘을 내어 걸어가는 순례자들,

번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달리는 사람들의 빠른 걸음이 앞서고 나면

텅 빈 고요로 행복한 길, 

바람의 냄새로 들숨 날숨 평안하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는 그 길 위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차올라 옴을 느낀다.

남달리 배려심이 깊은 친구는 혹여 자신이 짐이 될까 싶어서인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저널 북을 챙겨 온 나는 멈추어 선 채 아름다운 숲길을 빠르게 그려본다.

꼭 해보고 싶었던 걸 하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 식당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다 만난 식당은 씨에스타시간이라 문을 닫은 상태였다. 

우리는 점점 지쳐갔고 걷기를 중단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친구의 건강도 걱정이 되었다.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도착 29km 전 지점에서 우리는 걷기를 중단하고

동네 청년에게 택시를 불러 줄 것을 부탁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아주머니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림을 그렸다. 

후에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본 동생은 그날의 이 광경이 인상적이었고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만드는 카미노 길의 마력이 아닐까.

이 길을 걷기 전과 후의 내가 같을 수 없다는 얘기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다름이 주는 가치를 깨닫는 진정한 순례길, 

이 길을 다시 걷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차오른다.

온전히 걷고 난 후에 예전의 내가 아닌 달라진 나를 만나고 싶다.

다 잘될 거야. 모든 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주문을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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