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을 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그대에게
2023년 11월, -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고
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말의 동의어. 그리고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것 아닐까 싶다. 나의 고민을 나눌 수 있고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그 말의 유통기한은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곁에, 믿을 수 있는 사람보다 믿었던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유다.
그 속에서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에 끌렸던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20대 탈북민 한영의 서울 정착기를 담았다. 중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 통역사로 일하기 위해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여자. 그러나 서울은 한영을 신뢰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마저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탈북민인 한영을 받아줄 리 없었다. 그렇게 휴전선 너머 북에서도, 현재의 삶이 있는 남에서도 속하지 못한 한영, 그 속에서 한영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탈북민인 친구 정미뿐이다.
그런 정미가 한영에게 이런 위로를 건넨다. “이제 너를 위해 살아라”. 한영은 그 위로에 뭐라고 답했을까. 이 말이 뭐라고, 스크린 너머의 나는 상처를 받은 것일까. 누군가에겐 나를 위해 산다는 결심이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삶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한영은 서울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중국과의 외교 갈등으로 직장을 잃었을 때에도 생존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영에겐 외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같이 탈북했다가 연락이 끊긴 동생을 찾아야 했고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낼 생활비도 마련해야했다. 그렇게 관광 통역사 일 대신 호프집 서빙을 하던 어느 날, 가족을 위해 가불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사장은 한영에게 ‘뭘 믿고 월급을 다 주느냐’ 고 반문한다. 그의 말이 틀린 것 없어 보인다. 한영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 반절의 월급을 받아내고, 그 돈은 고스란히 가족에게로 보내진다.
한영이 아무리 애를 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위기,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정미가 남자친구와 함께 이민을 가게 된다. 한영은 믿음을 주지도, 믿음을 받지도 못한 채 서울이라는 외딴 도시에 남겨진다. 그토록 속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속한 적 없는 그 땅에, 스스로도 자신을 믿어주지 못하는 그 땅에.
갈 길을 잃는 한영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누군가의 길을 항상 가이드 해온 한영. 이제 한영은 스스로의 인생을 가이드 해야한다.
한영은 자신에게 가이드를 맡길 수 있을까?
숨 쉴 때 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과거로 멀어지는 요즘, 가끔은 나의 존재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하는 순간이 많다. 그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절박하게 내 자신을 믿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분명 그랬는데 이제는 매일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며 애꿎은 세상에 야속함을 토로하고 만다. 그리하야 오늘,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그대와 또 한 번 안녕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