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해야 하는 것들도 넘쳐난다.
매일, 매달, 분기별, 명절, 경조사,
시간을 계획한다.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당장의 시간을 모두 투자한다.
갑작스럽게 시간을 내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아껴두었던 시간까지 탈탈 털어 쓴다.
시간을 아무리 계획하고 저축해도 잔고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시간은 '마지막 보루'다.
내게 혹은 내가 시간을 내어 준다는 건 '최고의 선'이다.
잉여 시간으로 귀한 시간을 취하려는 크고 작은 제스처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시간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잉여 시간이 아닌 당신의 시간을 좀 내어 주시길,
내비치는 간절한 우리의 바람은,
그분의 또 다른 간절한 바람에 조용히 묻힌다.
머리가 아파온다.
아이들 여름 방학이 끝났다. 모닝빵 군과 찐빵 양을 학교로 유치원으로 보내고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이모님이 옥수수를 사 온 모양이다. 여탕 유리문을 여니 달큼하고 구수한 옥수수 삶는 냄새에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옷가지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안경을 벗고 디지털 와치와 핸드폰을 차례로 내려놓는다. 하나씩 내려놓을 때마다 묘한 해방감이 든다. 간소하게 담아 온 목욕 바구니를 챙긴다. 홑몸일 땐 마사지 용품이며 향기 좋은 입욕 제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셀프 테라피에 충실했다면, 지금은 본연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이가 들수록 취향이 간소해져 좋다.
뜨거운 탕 안에 들어앉아 일렁이는 물결을 잠자코 본다. 살들이 흩어진다. 뚝 떨어져 나갔으면 좋으련만. 따뜻한 물결이 몸 이곳저곳 빈틈없이 살핀다. 따뜻한 엄마의 품속을 파고들듯 탕 깊이 파고든다. 엄마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 굳어 있는 몸이 풀어지며 엉킨 머리의 타래도 느슨해진다. 함께 일렁이던 타일들이 정사각형 격자무늬로 반듯해진다. 한 타일을 응시하며 생각이 가는 대로 둔다. 칸칸마다 그날그날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더듬어 보면 그날의 기억은 형체로만 남았을 뿐, 감정은 닳았고 희미해졌다.
자연스레 물을 찾고, 흙을 밟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숲의 냄새를 찾는 건 아마도 내가 그곳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은 생명이라 했다. 바다에서 잉태된 생명은 훗날 우리가 되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뒤에는 물이 흐르는 산이, 앞으로는 너른 잔디와 숲을 품은 큰 공원이 있었다. 입구가 마르고 닳도록 들락날락, 도시에 태어났지만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옳게 보고 느끼게 된 건 그 덕분이다. 결혼해서 집을 나오기 전까지 사계절 넉넉한 자연 속에서 부지런히 산도 타고 공원에서 뛰었더랬다. 나를 키운 건 우리 부모님과 곁에 있던 자연이 8할이었다.
JB가 직장을 옮기며 온 이곳엔 안타깝게도 가까이에 그런 공원이나 숲이 없다. 당시에는 장롱면허라 혼자서는 멀리 나갈 수도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여서 간 곳이 동네 한 목욕탕 이었다. 커다란 탕 안에 앉아 따뜻한 물길에 몸이 동하니 그제야 동네에 정이 갔다. 썩음 한 목욕탕이었지만 집 가까운 곳에 정 붙일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코로나와 함께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 하나는 목욕탕을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 욕조의 폭과 온도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코로나가 길어지며 많은 목욕탕들이 문을 닫았지만 이곳만은 살아남았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정 같은 곳, 작은 네모난 바다가 있는 곳.
고개를 드니 환풍기 틈 사이로 하늘의 색깔이 날아든다. 습기와 열기로 가득한 이곳에서 빨간 테두리의 시계와 환풍기 틈새만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땀이 송글 송글 열기를 식히러 반대편 냉탕으로 가 두어 바가지 연거푸 시원하게 끼얹는다. 살며시 냉탕으로 빨려 들어가 물이 튀지 않도록 개구리헤엄으로 몇 바퀴 돌고, 낮은 벽에 매달려 굽은 어깻죽지를 펴준다. 냉탕에서 모두 으레 하는 짬짬이 운동. 온탕에 다시 몸을 담그니 발끝부터 찌릿찌릿 혈기가 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운동이 치유와 단련에 좀 더 가깝다면 목욕은 치유와 회복 쪽이다. 어느 쪽이던 나에겐 언제나 옳다.
오전 10시, 윗 층 헬스장 줌바 수업이 끝난 시각. 유리문을 열고 활기찬 그녀들이 들어온다. 파이팅 넘치는 인사가 오고 간다.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할머니, 며느리, 혹은 언니나 동생일 그녀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같다. 간혹 귀에, 목에, 손가락에 붙어있는 금은보석만이 취향을 짐작케 할 뿐이다. 그녀들의 깊게 파인 주름에 물이 고인다. 주름이 지워진다. 세월이 스민 피부 위로 물이 부서진다. 물방울 다이아처럼 방울방울 머리부터 시작해 어깨에 등에 쇄골에 차례로 아래로 내려앉는다. 반사된 빛이 그녀들의 보석들과 함께 아름답게 빛난다. 굽은 몸이던, 늘어진 몸이던 여기선 다 같은 몸이다.
큰 언니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동네 작은 목욕탕, 자주 오다 보니 얼굴이 눈에 익고 자연스레 그렇게 인사를 하게 됐다. 이제 내 표정만 봐도 어떤지 안다. 얼음이 산처럼 쌓인 이모님 특제 빙산 커피가 녹아 다 비워질 때까지 온탕, 냉탕을 오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 한분이 옥수수를 돌린다. 이모님 솜씨 때문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끝물이라던 옥수수가 맛이 좋다. 나누는 게 몸에 밴 어르신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 몫까지 챙기신다. 찐빵양을 데리고 올 때면, 음료수며 간식이며 잊지 않고 양손에 가득 쥐어주신다. 이렇게 목욕탕 팬 한 명이 늘었다. 혼자 있으면 혼자 있는 대로, 같이 있으면 같이 있는 대로 의미가 있다.
큰 언니와 난 서로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약속을 하고 오는 것도 아니다. 아는 거라곤 우리의 이름과 아이들 이름뿐이다. 셀프 관리도 열심히 하는 큰 언니는 오이나 감자를 챙겨 다니는데 내가 오면 살뜰히 갈아 얼굴에 붙이라며 내어준다. 그러고는 때수건을 집어든다.
"내가 해줄게 등 밀어주는 거밖에 없네"
라던 언니는 모든 걸 내어 주었다.
항상 내 등을 밀어주던 사람은 엄마였는데
지금 내 등을 밀어주는 유일한 사람.
타지에서 그런 언니가 생겼다.
시간을 내어준다는 건,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다.
"또 온나"
짧은 인사로 다음을 기약한다.
머리를 말리고 간단한 화장을 하고 옷의 매무새를 살피며 나갈 준비를 마치니
그사이 나의 몸과 마음도 차분히 정렬되어 있다.
목욕 바구니에 소지품을 빠짐없이 챙겨
옥수수 네 개가 담긴 검은 봉지까지 사들고
뽀얀 얼굴로 목욕탕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