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원의 단순함 vs 무거움
내 나이 마흔다섯.
나는 지금껏 내가 해 왔던 일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준비 중이었다.
구직사이트를 뒤지며, 단순한 일들을 찾았다.
여자 나이 마흔다섯에 그동안의 경력을 버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순한 일들은 정말 많았다.
그때까지 나는 정말 그 일들이 단순하다고 믿고 있었다.
약국 전산 실장님 구함
약국?
뭔가 단순하면서도 전문적으로 보였다.
그전까지 나는 '약국 전산원'이란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약국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인 줄만 알았으니까.
나는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그 약국에 호기롭게 지원서를 제출했다.
초보자이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싶다며 면접을 봤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음을 강조했다.
경력자가 아닌 초보자라 매우 난감해했지만, 약사님은 늦은 오후 나에게 전화해서 출근일자를 조율했다.
약국 전산원은, 고객들이 병원진료를 마치고 수납 후 받아오는 '처방전'을 전산에 입력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처방전을 전산에 입력하면 제조해야 할 약 리스트 조제실 안에 있는 약사에게 전달되고, 그걸 통해 처방약이 완성된다.
고객이 처방전을 전달해 주면, 앉아서 QR코드를 찍어 약 정보와 고객 정보 등을 입력해 주고,
약 리스트가 조제실로 전달되면, 나도 함께 조제실로 들어가야 한다.
앉아서 컴퓨터만 다루는 단순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조제실은 맨날 전쟁통이었다.
약사에 따라 환경은 다를 터지만, 내가 만난 약사는 손님이 오시면 멘털이 탈탈 나가는 분이었다.
차분히 대응해도 되련만, 약사는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손님을 응대하고 마무리 지어야 할 책임감으로 본인을 옥죄는 듯했다.
전산자료 입력하고, 조제실에서 처방약 완성 하고, 약봉투 출력해서 손님에게 약 설명하고, 수납하고...
어찌 보면 단순한 이 일을 '빨리' 끝내려는 욕심 때문에 때론 더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중간에 하나라도 꼬이면 약사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화는 여지없이 내게 쏟아졌다.
약국은, 주변 병원의 진료과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소아과라면 어린아이들을 위한 약이 대부분일 테니, 각종 시럽 등을 따로 보관용기에 넣어야 하고 가루 약도 일반 약과는 다른 봉투를 사용해야 하고 , 손이 많이 간다.
안과라면 인공눈물이 나 눈에 사용하는 각종 안약들이 많아 세심하게 관리해야 했고,
대량으로 처방받아야 하는 인공누액 박스들이 아침저녁 입고 되어 산더미처럼 쌓여 바로바로 정리해야 했다. 약국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병원 앞 약국은 전산원들이 기피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쏟아지는 손님들, 방대한 양의 약품들... 초보자가 갔다가 학을 떼고 나오는 곳이라고 하니 그 힘듦의 강도가 얼마나 셀지 짐작이 간다.
반면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등은 쓰는 약들이 거의 일정하다.
그래서 처방전을 입력하면, 미리 설정해 놓은 자동분류 약품 기계에 의해 조제된다.
약국에 가면 조제실에서 들리던 기계음들은, 미리 세팅되어 있는 약품들이 조제되고 있다는 소리다.
문제는,
이 과정을 약사가 하는 줄 알았는데, 전산원과 함께 하는 거였다. 처방전을 컴퓨터에 입력한 후, 빠르게 조제실로 튀어가야 한다.
이 약사는 지금, 약국 안에 있는 다섯 명의 고객들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응한 후 보내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다.
급한 성격 탓에 약을 조제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배합을 잘 못하기도 하고,
용량을 안 맞게 설정하기도 하고...
다시 봉투를 모두 뜯어 만들어야 할 땐 약사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조차 내 탓이었다. 그냥 뭐든 화를 쏟아낼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했던 것 같다.
성격 급한 사람들... 그중 본인 성에 차지 않으면 감정이 엉키는 사람들...
그들은 그런 당연한 일상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안다.
외길 인생, 외길 직업인들이 가장 무섭다는 걸.
그들의 고집은 꺾을자가 없다는 걸.
그들은 자신의 사소한 습관 행동이 모두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걸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까지 참 많이 힘들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약국문을 열자 아침에 배달된 수많은 약 박스들이 약국 가득 빼곡했다.
빨리 외투를 벗고, 테이크아웃한 커피 한 모금 빨아들이 새 없이 정리해야 한다.
곧 손님이 들이닥칠 텐데, 약국에 들어올 고객에 온 세포가 맞춰진 약사는
속사포처럼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은 걸 보며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걸 실감했다.
여유도 가져보지 못하고 아침이 지날 무렵,
정형외과에 다녀오신 어르신들 고객님들이 몰렸다.
처방전을 빠르게 입력하고, 조제실에 들어가 도울 참이었는데 약사가 밖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내 손등을 때렸다.
빨리 조제실로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거였다.
처방전을 입력해야 안으로 들어가죠!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쳤다.
키보드에 올려 있던 내 손등을 때리며 밀치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눈빛으로, 말로 들었던 상처는 그런대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손까지 데다니...
그래도, 이대로 뭔가 내 감정을 쏟아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내 딸, 내 아들... 그리고 우리 남편 얼굴까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욱 했던 그 당시, 연관성도 없는 내 가족들이 왜 때문에 떠올랐는지 -.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오전 내내 화장실도 못 가서 그제야 밖으로 나가 상가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거 내 의지로 안 멈추겠다 싶을 만큼 서러운 눈물이 폭발했다.
자기야. 너무 미안해.
어떻게 해서든 버텨보려고 했어.
우리 딸 학원비라도 보태보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고, 너무 재밌었는데
나 여기서 일하면 자꾸 자존감이 낮아져.
미친놈랑 일하다가 내가 미친놈이 되겠어.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는데... 나 그만둬야 할 것 같아.
너무 미안해.
어휴, 뭔 소리야!
당장 때려치워.
거기에 단 일분도 더 있지 마. 당장 때려치워!
한참을 울며 남편과 문자를 한 뒤, 그대로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약사님,
저 그만둘게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반 정도만 했다.
안 하긴 싫었다. 이왕 그만 둘 마당에 너의 잘못이나마 제대로 지적하고 사과받고 싶었다.
본인도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서 (그녀의 남편이나 식구들도) 굉장히 많이 지적하고 있던 문제들이었기에
뭐가 잘못됐는지는 알고 있어서 말하긴 편했다.
한 달 반을 일했으니, 참 나답지 않게 잘 버텼구나 싶었다.
언제 단순해질까 한 달 동안 적응해 보려고 노력했고,
그 나머지는 내쪽의 문제도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지내보자는 마음에서 버텼다.
하지만, 200만 원짜리 약국 전산원은 너무 단순하지 않았다.
열 평 남짓 공간 안에서 약사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야 했던 그날들은
여러 날이 지나서야 나를 내 자리로 데려다 놓을만큼 버거웠다.
진상 고객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
함께 일하는 약사가 킬포였다.
가끔 약국 전산원 구인글을 본다.
절레절레...
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