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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9.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열여덟 걸음

 유성과 은오는 계속 뛰어 한강공원에 다다랐다. 먼 동네까지 나와 놀다가 도둑으로 몰려 쫓기고 있었다. 둘은 이제 못 쫓아오겠다고 생각하며 성산대교 난간에 몸을 엎드리고 숨을 골랐다.


 “저건 이제 공사 안 하나?”


 은오가 짓다 말아 물 위로 튀어나와 있는 월드컵대교 교각을 보며 말했다.


 “뭐? 월드컵대교?”


 “응. 십 년 안에 다시 못 짓는다에 한 표.”


 “난 짓는다에 한 표.”


 “뭔 근거로?”


 “몰라. 그냥 그럴 거 같아.”


 “백만 원 빵 할래?”


 “야, 너무 승산 없잖아.”


 “방금은 지어질 거라며.”


 “하는 소리지.”


 “그래도 해. 백만 원 받게.”


 “그래.”


 “아! 피아노 치면서 살기 싫다. 학원 가기 싫다!”


 은오가 소리쳤다.


 “그럼 뭐 하고 싶은데?”


 “글 쓰고 싶어.”


 “니 실력으론 어렵겠던데.”


 “아, 진짜. 그거 좀 잊으라고. 제발.”


 유성은 집 장판 밑에 있는 소설을 떠올리며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만해라, 진짜.”


 “아...아, 웃겨. 글 써. 피아노 박살 내고.”


 “엄마 설득 못 해. 이러면 안 되는데 나 가끔 생각한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그날 사고현장에 있었으면 더 나았을 걸 그런 생각해. 아, 이러면 안 되는데…미안, 엄마.”


 “아빠 돌아가셨어?”


 유성이 토끼 눈을 하고 되물었다.


 “어. 아는 사람 보러 갔다가. 내가 가지 말랬는데.”


 은오가 난간에 걸친 팔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팔에 물이 묻어있었다. 유성이 물었다.


 “엄마가 왜 그렇게 피아노에 집착하는데?”


 은오는 잠시 후에 대답했다.


 “우리 엄마 피아노 엄청 잘 쳐. 신동이야.”


 “그럼 자기가 하지 왜 너한테 그러냐.”


 “몰라, 망했대. 뭐래더라, 방문 잠그고 아무것도 안 먹고 삼 일 밤낮을 울었대. 마지막에 손목 그으려는데 우리 아빠가 방문 따고 들어와서 밥부터 먹고 죽자 그러더래. 그래서 안 죽었대.”

 

 둘은 낄낄 웃었다.


 “지금도 가끔 피아노 멍하니 쳐다보다가 혼자 한숨 쉬어. 근데 난 싫어.”


 유성이 말했다.


 “나중에 막 작가 돼서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그래가지고 엄마 팍 인정하게 만들고, 막. 너는 뭔가 연예인 돼서 유명해질 거 같아. 넌 돈 많이 벌면 뭐부터 할거야?”


 “엄마아빠 집 사주고 나 차 사고 너 옷 사줄게.”


 “왜 내 게 제일 싸?”


 둘은 벌써 그렇게 된 듯 신나게 웃었다. 유성이 말했다.


 “야, 유명해지면 내 얘기로 글 써줘.”


 “안 유명해져도 써줄게. 뭔 얘기?”


 “내 첫사랑 얘기.”


 “너 첫사랑이 누군데?”


 “너지 누구냐? <간절한 사랑>처럼 쓰지는 마라.”


 마침내 은오가 퍽퍽 때리자 유성은 깍깍 웃었다. 웃다가 유성이 말없이 다리 너머 짓다 만 월드컵대교 교각을 쳐다보고 말했다.


 “있잖아, 저거 십 년 안에 지어지면,”


 은오가 유성을 따라 월드컵대교 교각을 쳐다봤다.


 “그렇게 글 써줘.”


 “백만 원 말고?”


 “어. 나중에 내 얼굴 가물가물할 만큼 나 잊어버리면 써줘.”


 은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쳤다. 유성이 이어 말했다.


 “처음 시작은 너가 가장 기억나는  시작하는 거야. , 재밌겠다.”


 “벌써 재미없다.”


 “너가 생각하기에 제일 기억에 남는 날.”


 “그냥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돼?”


 “안 돼.”


 “왜?”


 “내가 주인공인 내 이야기니까.”


 은오는 쿡쿡 비웃었다.               




 “야, 들었냐? 팽소연 누나가 오늘 우리 다 오래.”


 현수가 말했다. 이지원 형 집에서 모여 논다는 얘기를 유성도 들었다.


 “김은오 데리고 오라는데. 그냥 한번 보여주고 말아.”


 “싫어. 그리고 어차피 걔 성격에 절대 안 가.”


 유성은 말을 뱉자마자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음을 알았다. 백삼십은 갈 확률이 높다. 지형이를 좋아하니까.


 “에이, 설마 가겠어.”

  유성이 작게 덧붙였다.


 그날 오후, 유성은 이지원 형 집으로 간 은오를 찾으러 갔다. 유성이 소연과 대판 하려는데 은오가 현관 앞 발 매트 위에 신발을 베고 누웠다.


 “야!”


 소리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유성은 은오를 들쳐업었다.


 “야, 가게? 있다가 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집을 나왔다.


 은오를 업고 걸어갔다. 해가 저물어가 가로수길이 온화하게 빛났다. 초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한창 걸어가는데 은오가 꿈틀거리더니 팔로 유성 목을 감았다.


 “깼냐?”


 “아빠! 아빠가 어떻게 알고 왔어?”


 은오가 해맑게 묻자 가슴 모퉁이가 시릿했다.


 “걔가 전화했어?”


 노을이 하늘과 늘어선 나무들을 붉게 비췄다.


 “걔 있잖아! 걔. 내가 저번에 얘기해줬잖아. 내가 좋아하는 애라고.”


 “아, 누구.”      


 지형인지, 난지.     


 “걔가 뭐래? 걔 목소리 좋지.”


 확 씨 버리고 갈까, 유성은 지형 목소리가 어떤지를 떠올렸다. 여름 초저녁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머리칼을 휘감았다. 은오 머리에서 나는 꽃냄새가 바람에 풍겨왔다.


 “근데 왜 노래는 못할까. 얼굴은 더 대박이야. 엄청 잘생겼어.”      


 나인가…?     


 “세상에서 걔가 제일 좋아. 엄마보다 좋아. 아빠보다 좋은지는 또 꿈 나와주면 말해줄게.”


 그날 은오 아빠를 앗아간 사고가 없었다면 은오 얼굴에 그림자가 없었을 거라고 유성은 생각했다.


 “아빠. 보고싶어. 너무 보고싶어. 진짜 너무 보고싶어.”


 유성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걔 엄청 착해. 너무 좋은 애야.”


 “걔 좋아?”


 유성이 물었다. 아무 증거 없지만 왠지 유성 자신인 것 같았다. 은오가 유성 목을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 내 첫사랑이야.”           




  롯데월드, 열기구에서 내린 지형, 은새, 세훈, 재원, 하영은 혼자 미간을 찌푸리고 선 유성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김은오는?”


 “야, 망했다.”


 유성이 망연자실하게 지형을 봤다.


 “뭐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왜?”


 재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뽀뽀했거든. 울면서 도망갔어.”


 “니가 잘못했네.” 은새가 말했다.


 “한다고 예고했어!” 유성이 항변했다.


 “김은오 반응이 좀 과한 거 같은데?” 하영이 말했다.


 “어떡하지? 나 어떡하지, 진짜?” 유성이 울먹이며 쪼그려 앉았다.


 “무릎 꿇고 싹싹 빌어.” 지형이 킥킥거렸다.


 “어, 왔다.”


 은새가 유성 너머로 다가오는 은오를 보며 말했다. 유성이 벌떡 일어나 보더니 은오에게 다가갔다. 지형, 은새, 하영, 세훈, 재원은 조용히 주목했다. 잠시 후 유성이 진짜로 은오 앞에 털썩 꿇어앉을 때 다섯은 일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야, 야. 찍어. 찍어.” 세훈이 숨을 허어억 들이쉬었다.


 “오졌다.” 지형이 폰을 꺼내 찍으며 깔깔 웃었다.


 “죽을 때까지 이불킥 각이다.” 은새가 지형 뒤에서 카메라 화면을 확대했다.


 “쟤 진짜 김은오한테 눈 돌았네.” 하영이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개학식 날 오전, 복도에서 유성과 성혁 친구가 걷고있었다.


 “아니 그니까, 김장미 걔가 있지도 않은 소리를 성혁이한테 한 거야.”


 “뭔 소리를?”


 “엄지은이 성혁이 몰래 바람 피웠다고. 뭐 지 딴엔 오해를 했나보지. 엄지은이 오해 받은거 열 받아서 짜증난다고 헤어지자고 했대. 성혁이 완전 개빡쳤던데.”                  


 5반 교실, 장미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앞자리 시은이 뒤돌았다.


 “야, 어제 장난 아니었어. 니 큰일났어.”


 “뭐가.”


 “전성혁이 어제 니 조퇴하고 나서 애들 끌고 와가지고 니 책상 뒤집어엎고 욕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니 오면 가만 안 둘거래.”


 “꼴값 떨고 있네.”


 장미가 혀를 쯧 차며 책상에 엎드렸다.


 “아니, 근데 김은오가.”


 시은이 풉 웃었다. 장미가 고개를 들었다.


 “개웃겼다. 김은오가 갑자기 나타나선 전성혁 면상에 대고 뭐랬는 줄 아냐?”


 시은이 킥킥댔다.


 “뭐래더라, 야! 니 소심하게 굴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라! 막 이러면서 고래고래 소리질렀잖아.”


 “걔 괜찮을까?”


 “지 남친 빽 믿고 졸라 나대.”


 “하긴 정유성 있어서 괜찮을 수도 있겠다. 아니…그래도 이건 개오반데.”


 “이건 정유성 걔도 쉴드 못 쳐줌. 전성혁 어쩌면 걔한테 빡돌아서 니는 잊었을수도.”


 쉬는 시간에 앞문이 열렸다.


 “야, 김장미.”


 전성혁이었다. 교실 앞에서 말했다.


 “니 이따 밥 먹지 말고 매점 뒤로 와라.”


 장미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쫄리기 시작했다.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다리를 들들 떨며 생각했다. 태권도 7단, 전국복싱우승권대회 금메달, 전국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 메달. 주짓수는 하다 말았다. 웬만한 성인 둘쯤 한 대도 안 맞고 쓰러트릴 수 있었다. 전성혁은 180에 육박하는 장미보다 10센치 가까이 컸지만 허세 부리는 것과 달리 둔하고 느렸다. 문제는 성혁이 끌고 올 숫자였다.


 “아, 몰라. 짜증나.”


 엎드리는데 누가 어깨를 콕콕 두드렸다. 고개를 들었다. 은오였다. 성혁이 뭐라고 했는지 물었고 장미는 대답해주었다.


 “같이 가자.” 은오가 말했다.


 “뭐?”


 “같이 가자. 나랑.”


 “니가 뭐 어쩌게?”


 “같이 싸워줄게.”


 “뭐?”


 장미가 150도 안 되는 키에 꼬챙이처럼 마른 은오를 보며 되물었다.


 “나 이따 종 치자마자 온다? 기다려?”


 은오가 나갔다. 픽, 웃음이 나왔다. 자기랑 내가 그렇게 친했나? 순수한 거야, 친한 척 하는 거야? 장미에게 은오는 어쩌다 친구 없을 때 같이 밥 먹는 애였다. 있으나 마나 한 친구. 하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유성은 종이 치자마자 뒤를 돌아본 곳에 이미 은오가 없는 걸 봤다.


 “후들겨 맞으려고 환장을 했네.” 유성이 중얼거렸다.


 “왜?” 재원이 물었다.


 “백삼십 매점 뒤에 싸움판 감. 김장미 따라.”


 “왜?” 재원이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들었잖아. 성혁이랑 맞짱 깐다고.”


 “왜?” 재원 언성이 높아졌다.


 “엄지은 때문에! 아…씨.”


 유성이 일어났다.


 “어디가?” 재원이 물었다.


 “가서 끌고 와야지.”


 “야! 야, 잠깐만. 김장미는?”


 “숫자가 얼만데 처맞겠지.” 유성이 교실을 나갔다. 재원이 따라 나갔다.


 “누가 엄지은이랑 바람 피웠는지 알아내서 데리고 가면 끝나는거네?”


 “누군지 모르잖아.”


 “일단 나라고 하자.”


 유성이 정신 나갔냐는 듯 쳐다봤다.


 “너도 김은오처럼 죽으려고 환장했냐?”


 재원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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