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수박주스 한잔
"어라, 쌤! 눈이 퀭해요."
평소에도 꽤나 세심한 편이신 회원님이
수업에 오자마자 나를 보고 건넨 첫마디.
"아, 사실 오늘 오랜만에 잠깐 밖에 뛰고 왔거든요.
그 이후로 머리가 조금 띵하긴 하네요. 하하..."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웃어넘겼지만,
사실 평소에 두통이 잦지 않은 나는
점심부터 시작되어 저녁 시간대까지 이어진 두통에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오랜만에 오전에 동네 뒷산을 잠깐 뛰고 왔다.
연일 무더위가 기승인지라
30도가 되기 전에 얼른 나갔다 와야지!
라는 생각으로 아침도 안 먹고 서둘러 다녀왔다.
원래 3-40분의 짧은 러닝은
물을 아예 안 가지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동네 뒷산은 그늘이 워낙 많으니
땀이 아주 많이 나진 않아서
다녀오자마자 이온음료 가득 한 컵, 그리고
샤워 후에 다시 물을 조금씩 마시면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여름이니까 혹시 몰라. 조심해야지.' 하며
소프트 플라스크에 400ml 정도 물을 채웠다.
러닝벨트 뒷주머니에 물통을 가로로 꽂아 넣고
최대한 시원하게 입고 집을 나섰다.
어, 아직 30도는 분명 아닌데...
뒷산 입구까지 가는 아스팔트 길,
고작 5분 거리인데 벌써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여름의 태양은 역시 뜨거웠다.
그래도 막상 산에 들어서니 그늘이 많아서 시원했다.
중간중간 목마르기 전에 미리 물통을 꺼내서
물도 한 모금씩 마셨다.
"뭐야, 이 정도면 트레일 러닝은
여름에도 할만한 거네. 괜히 겁먹었잖아."
나름 전략적으로 조금씩 물을 나눠마시고
집에 오자마자는 평소처럼
무가당 이온음료 한 알을 물에 타서 마셨다.
샤워도 하고, 가뿐하게 하루를 시작해 볼까.
그런데
점심을 단백질 위주로 간단하게 먹고
약 두세 시간 뒤부터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기 시작했다.
엥 뭐지?
수분 보충도, 전해질 보충도
나름 잘해준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유는 바로 뒤늦게 찾아온 탈수 증상
달릴 때와 달리고 난 직후에는
아드레날린이 그야말로 뿜뿜 쏟아져 나와서
흥분 상태인 뇌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안정을 되찾은 후에야 에너지(포도당)를
다 쓴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제야 뇌가 정신을 차리고
에너지원을 거의 다 썼는데 이거 어떻게 하냐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이 통증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그야말로 SOS 구조 신호일 수 있으니 쉽게 무시하고 넘어가지 말 것!!)
그날 나는 점심에도 하필이면 가볍게,
간을 적게 한 단백질 중심의 식사를 해서
물을 잘 마셨다고 해도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다.
머리가 띵한 상태로 오후에 출근을 하는데,
출근길에 평소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1층 카페의 수박주스 입간판.
평소 같았으면 가격도 가격인 데다
당분이 너무 많은 음료는 잘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오늘은 먹어야겠다!!"라는 강력한 욕구를
참지 않고 바로 카페로 들어가 주문을 했다.
수박주스를 중간중간 마셔가며 수업을 끝내자
섬세한 그 회원님이 또 한마디 해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지신 거 같은데요! 눈빛이 돌아왔어요."
실제로 머리가 띵한 증상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박에는 천연당뿐만 아니라,
혈관 확장 및 혈액 순환 개선에도 도움을 주는
다양한 아미노산이 들어있다고 한다.
수박을 향한 나의 본능... 잘했어 (뿌듯)
여름 트레일러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햇빛도 옷차림도 아닌
수분, 전해질, 당을 모두 다
잘 챙겨야 한다는 것
공복이 아니라 에너지젤이라도 먹고 출발했다면,
또는 이온음료를 마시고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꿀물이라도 마셨다면...
그날의 두통은 아주 금방 해결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직접 배운
왕초보의 여름 트레일러닝 주의사항
1. 새벽~아침(지표면 온도가 낮은) 시간을 선택하고,
그 시간에도 30도가 넘으면 과감히 쉴 것
2. 수분, 전해질, 당을 모두 확실히 챙길 것
요즘 유행하는 제로 이온음료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3. 그래도 정 불안하면 시원한 실내에서 달리자
마이마운틴 또는 경사도 있는 러닝머신에서 인터벌 트레이닝하기
4. 달리기도 좋지만, 사실 산이 좋은 거라면?
좀 느리게 가더라도 괜찮은 등산을 해보자
대신, 등산하는 재미가 있는 새로운 곳을 가보자!
달릴 땐 미처 보이지 않았던 멋진 경치,
에너지젤만 급하게 까먹는 러닝이 아닌
앉아서 즐기는 평화로운 간식 타임.
그리고 하산 후의 계곡까지!
왕초보 트레일러너가
여름을 즐기는 방법, 다음 편:
"너무 더울 땐 좀 천천히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