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트레일러너의 등산 이야기
알레 Alle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한 잡지의 등산 관련 글을 통해서였다.
알레는 여행사 같은 곳이다.
근데 이제 사람 현장 가이드가 없는.
혼자 훌쩍 떠나기엔 조금 먼 지역에 있는
산으로 갈 수 있는 왕복 버스,
그리고 등산 코스와 각종 정보를 제공한다.
처음 가는 산이여도 혼자서도 충분히
지도를 보면서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다.
혼자 오는 20-40대 여성들도 많고,
이동 중 버스에서도 취식과 대화는 금지되어
조용하고 편안한 이동을 지향한다.
와, 이거 진짜 딱이다.
사람, 그리고 특히 대화에 조금은 지쳐있던 나에게
그야말로 맞춤인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라는 직업으로 온전히 먹고살기 힘드니,
10년째 하고 있는 운동 강사 (트레이너)
일을 틈나는 대로 하고 있다.
근데 그 "틈나는 대로"가 요즘 많이 바빠져서
온전히 쉬는 날이 일주일 중 단 하루도 없는 요즘이다.
언제 갑자기 오디션이나 촬영이 생겨서 일을 쉬어야 할지 모르니까 시간이 있을 때 일을 많이 해서 벌어놔야 한다.
운동강사는 사실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연구하고, 그걸 말하는 사람에 가깝다.
진짜로 하루 종일 말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파이팅 넘치게.
여담이지만...
대학 시절, 통역 알바를 이틀동안 하다가
"엄마, 나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혼이 빠져나가는 거 같아요"라며
친구에게 SOS 요청을 보냈던 나는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는 게
가끔은 신기할 지경이다.
이게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정말 가끔은 이렇게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진다.
그것도 아주 온전히.
평소 같았으면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하자."하고 포기했겠지만,
그나마 시간이 나는 낮시간엔 너무 뜨거워서
동네 뒷산도 못 가는 상황이니
초록초록에 대한 갈증이 쌓여갔다.
알레 앱을 켜고 코스를 구경하다가
어느 산속 계곡 사진을 보고
이건 꼭 가고 싶다!! 마음이 외쳤다.
그래, 여름휴가 대신 하루만 산에 다녀오자.
그나마 수업이 많지 않은 토요일,
기존 수업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알레에서 코스를 하나 정해서 예약을 마쳤다.
토요일 7시 10분 사당역 6번 출구 집합.
집에서 세수만 하고 나가도
오전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전날엔 오후 10시까지 수업이 있다.
그래도 오랜만에 산에 갈 생각에 들떠
행복하기만 했다.
산행 후 갈아입을 옷가지, 간식, 샤워 티슈 등
일주일 전부터 준비물을 메모장에
체크리스트로 쭉 나열하며
하나씩 등산 가방에 챙겨두었다.
드디어 당일 아침 5시 반이 되었다.
소풍 가기 전날 들떠서 잠을 설쳤던 어린 날의 언젠가,
딱 그때가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푹 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피곤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드립커피와 위트빅스로 아침 식사를 하고
전날 챙겨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토요일 오전 6시에도 지하철은 사람이 많았다.
공부하는 학생,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여느 평일 아침 풍경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게
아주 큰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사당역에 가까워질수록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이분도, 저분도? 내가 타는 버스를 타는 건가??
집합 장소 앞에 도착하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하, 여기가 등산 가는 버스 출발 장소 핫플이었구나!
알레에서 미리 보내준 차량 넘버와
버스 앞 전광판을 확인하고
차량에 올라타 내가 예약한 자리에 앉았다.
세상 세심하게 각 자리에는 알레에서 주는 선물,
식염 포도당이 있었다.
알약처럼 꿀꺽 삼키면 되는
여름 등산에는 꽤나 큰 도움이 되는 필수템이다.
센스 만점 알레!
곧이어 담당자분의 간단한 안내 이후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한번 들른 김에
맥스봉 하나를 사 먹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졸다 보니
버스가 등산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오늘의 코스는 충북 칠보산.
시작은 떡바위 분기점이다.
전체코스 약 7km 정도를
넉넉히 4-5시간 안에만 들어오면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여유롭게 탈 수 있다.
힘들면 천천히 올라가고
잠시 앉아 쉬어가며
여유를 부려도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트레일 러닝으로 산을 배운 이는,
그런 게 없다.
내 주변의 유일한 등산 고수, 엄마랑 산에 가면
서로 페이스를 맞춰가며
한 명이 힘들면 잠깐 서있다 가고
같이 얘기도 하면서 가니 적당한 속도가 맞춰졌다.
근데 혼자 가니까 러너의 직진 본능을 막을 수가 없었다.
등산이 아니라 업힐 훈련을 하듯이
나보다 앞서 출발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제쳐가며
나는 야생마처럼 정상으로 돌진했다.
"흐억... 헉..."
숨이 턱까지 찼다.
심박수 180 bpm도 족히 넘을 만큼.
그래도 멈추진 않았다.
꾸준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떡바위 분기점에서 정상까지는 2.8km.
알레의 안내문에 따르면
약 1시간 50분 소요되는 코스를
결국 약 1시간 만에 올라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코스가 전반적으로
그늘이 많은 데다 바로 옆이 계곡이었고,
구름 낀 하늘에 약간의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여름 산행치고 매우 시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에 에너지젤, 이온음료,
그리고 알레에서 준 식염 포도당도 챙겨 먹어서
비록 정신없이 온통 땀으로 젖어
도착한 정상이었지만 컨디션은 좋았다.
정상에 올라서는 막상 사람이 너무 많아서
뿌듯하거나 해냈다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그냥 이 사람 많은 곳을 어서 벗어나야지 싶었다.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바로 하산길에 올랐다.
차분히 내려가기 시작하니
그제야 비로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막 개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아, 이거 이 맛에 등산하는구나.
조금 더 내려가서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을 찾아 잠시 앉았다.
등산을 시작하고 한 시간 반정도만에 처음으로 앉아서
집에서부터 가져온 간식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비에 촉촉하게 젖은 풀냄새가 났다.
하산길은 돌이 많아 좀 미끄러웠지만
든든한 트레일러닝화 덕에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점점 계곡물소리가 가까워졌다.
덕분에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두근두근!
시원한 계곡 물놀이를 기대하며 내려왔다.
드디어 쌍곡계곡에 도착!
갈아입을 옷도 가져왔겠다
아주 풍덩 들어가 볼까 잠시 생각했다.
일단은 바위에 앉아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계곡물에 두 발을 살포시 넣었다.
선선한 날씨 덕에 산행이 생각보다 뜨겁지 않아서인지
발만 담가도 시원함이 온몸으로 싸르르 퍼졌다.
그렇게 혼자 앉아서
꺅꺅거리며 물놀이를 즐기는 가족들을 구경했다.
이게 얼마 만에 와보는 산속 계곡인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코스의 도착 지점이자 서울행 버스를 다시 타는 곳인
쌍곡휴게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조명이 없어 문을 닫으면 캄캄해지고
잠금장치가 없지만 그래도
남녀 구분이 되어 있는 탈의실이 있어서
그곳을 이용했다.
간이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게 아니라 감지덕지.
계곡에서 한참 앉아있다 왔는데도
여유로운 등산이 아니라...
절반은 트레일 러닝에 가까운 질주를 해서 그런지
버스 탑승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쌍곡 휴게소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고 (꽤 맛있다),
바로 앞 쌍곡다방에서 카페모카로 당충전까지 마쳤다.
평소엔 관리한다고 잘 안 먹는 메뉴들이지만,
등산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나름의 길티 플레저이다.
그렇게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버스를 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다시
하루 종일 말해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회원들 앞에서 에너지 넘치는 쌤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오늘 맑은 물소리,
그리고 높은 하늘과 함께 보낸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이
당분간 나를 버티게 해 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로 천천히 걸을 날이 오겠지.
하지만 역시,
아직 나는 뛰어야 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