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트레일러닝 20km 첫 대회 출전 (상)

“엄마, 산 뛰는 대회 같이 갈까?”

by 시현


나는 트레일러닝을 접한 계기가 좀 특이하다.


보통은 러닝을 하다가 더워서 그늘이 있는 곳을 찾거나

색다른 도전을 하고 싶어서 뛰는 장소를

산으로 바꾼 케이스,


또는 원래 산을 좋아해서 등산을 하다가

산에서 달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입문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러닝도, 산도 싫어했다.



체력을 길러야 함과 동시에 체지방 감소도 해야 하는

"건강미 넘치는" 준비된 배우가 되기 위해서

유산소 운동은 필수였지만,

러닝은 아무래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할 때마다 발이 너무 아프고,

그 긴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각한 runningsiro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

첫 동네 공원 러닝을 꾸역꾸역 마친 이후,

해결책을 적극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걸 꾸준히 할 수가 없어!



마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하며

다음 달의 토익 시험을 접수하는 것처럼

일단 러닝 대회부터 신청하면 어떨까 생각하며

적당한 대회를 찾기 시작했다.


이건 상암, 이건 여의도, 이건... 인천...

5km도 겨우 뛰고 오는데

10km 이상의 대회를 나가자니

준비 기간이 너무 촉박하거나 마감된 대회들이 많았다.


그때 눈에 띈 게 트레일런 대회였다.



"살찌는 건 싫지만, 빵은 먹고 싶어!"

어, 이 슬로건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SNS에서 본 적이 있는 빵빵런이라는 대회에서

주최하는 빵트레일런 대회였다.


트레일런이 뭔지도 모르고!

경험도 없고, 주변에 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지만

왠지 조금은 덜 진지한 대회인 것만 같아

나 같은 쪼렙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빵을 들고 가뿐히 산을 오르고 있는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크게 한몫했다)





신청을 앞두고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산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니 제주도 오름에 같이 가면

날 두고 먼저 휙 올라갔다가

다다다 뛰어내려 갔던 엄마인데.

트레일러닝도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2016년 어느 겨울날, 나를 두고 가는 엄마


빵트레일런 상세 페이지를 켜두고

화면 스크롤을 내리며,

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엉 딸~

나: 엄마! 산 뛰는 대회가 있다는데 같이 갈까?

엄마: 산? 산은 좋지. 안 그래도 지금 이모랑 산에 가는 중~

나: 오우 역시... 그럼 20k랑 12k 중에 뭘로 할까?

엄마: 딸이 알아서 하셔~

나: 음? 응 알겠어용



내 성격은 사실 모 아니면 도.

역시 난 결국 이번에도 "이왕이면" 병으로 인해

20k를 신청하고 말았다.


그렇다.

트레일런을 한 번도 뛰어보지 않고 결정한 일이다.





자, 이미 러닝화는 하나 사뒀는데

트레일 러닝화가 따로 있어야 한단다.


(생각해 보니 지면이 다르니까 필요하긴 해.

뭘 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님.)


발이 예민한 나는 신발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최근 즐겨 신는 브랜드의 트레일 러닝화를 구입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색상도 공홈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브랜드의 트런화는

상급자들은 거의 안 신는 모양이다.


그럼 뭐 어때.

내 발에, 내가 다니는 코스에 잘 맞으면 그만이다.



신발, 양말, 러닝 조끼, 러닝 앱까지...

장비도 다 마련했겠다 이제 가까운 산부터 뛰면서

대회 준비를 시작해 본다.





동네 뒷산이라고 해도 산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겐

그저 처음 가보는 낯선 숲길이랄까,

미지의 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당장 뛰어가기가 무서웠던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누군가 본인 블로그에 올려둔

우리 동네 뒷산 gpx 파일을 다운로드하였다.


애플 워치에 gpx 파일을 옮긴 뒤에,

지도를 띄워놓고 실시간으로 내 위치와 비교해 가며

동네 뒷산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라, 이렇게 길 찾아가는 게 생각보다 재밌네.



도심에서 각종 건물과 간판을 보며

길을 찾아다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 더 높은 산,

조금 더 긴 둘레길에 가보고 싶어졌다.





트레일 러닝은 우리나라로 치면

그야말로 둘레길 뛰기이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 이후,

지자체들이 앞다퉈 둘레길을 조성하고

그 정보를 접근하기 쉽게 올려두었으며,

실제로 산에 가면 무슨 둘레길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갈림길마다 잘 꽂혀있다.


서울 둘레길, 강서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나의 행동반경에 맞는 둘레길의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았다.



우선은 강서 둘레길 1코스와 2코스를 합쳐서 다녀왔다.


따릉이로 약 30분 달려서 방화근린공원에 도착.

개화산 둘레를 한 바퀴 돌고, 서남물 재생센터까지

약 8km 구간을 지도를 열심히 보며 뛰었다.


한창 테니스에 빠져있을 때

자주 갔던 서남물 재생센터인데,

이렇게 예쁜 곳이 있었다니!?


마침 날씨도 좋고 바람도 솔솔 불어오는 봄 날씨여서

모든 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또 다른 길을 경험해보고 싶다!

일을 하다가도 자꾸 산 생각이 났다.


지도 앱을 켜고 우리 집 주변의 산을 찾아봤다.

(내가?! 자진해서 그런 걸 찾아보다니…)


이 동네에 5년 가까이 살았는데...

바로 근처에 처음 들어보는 산이 있었다.

둘레길도 나름 잘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동네에서,

처음 가보는 새로운 길을 따라 뛰는 것.


그 자체도 트레일 러닝의 재미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 좀처럼 할 기회가 없었던

미지의 탐험.


처음 가보는 길을 누군가의 안내 없이

지도만 보며 헤쳐나가는 건

보통 아주 낯선 동네를 여행해야 가능한 일인데,


트레일 러닝은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에,

그리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이다.





대회 준비를 위해 이렇게 틈나는 대로 산을 달렸지만,

길어봐야 9km 러닝이 전부.


13km 정도의 북한산 둘레길 여정이 있었으나,

엄마와 함께 팀으로서 호흡을 맞춰볼까 싶어

가볍게 다녀온 산행이라

러닝보다는 일반적인 하이킹에 가까운 페이스였다.

(팀워크 및 체력 훈련 정도라고 해두자.)


결국 20km를 온전히 달려볼 기회 없이

대회날이 다가왔다.


나 완주할 수 있을까?


사실 두려웠다. 누구에게도 티 낼 순 없었지만.





엄마와 나는 대회 전날인 금요일에 정선에 도착했다.


대회 참가자들은

정선 하이원리조트에 저렴하게 묵을 수 있어서

출발지와 최대한 가까운 방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도착 후에 짐을 풀고 대회 출발지를 한번 둘러보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각종 행사 부스에는 비닐 천막이 덮여있었다.


비가 오락가락 흐린 날씨의 출발지점 사전 방문 중


대회장을 직접 보니

마치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무언가가

점차 설렘으로 바뀌어가는 기분과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방으로 돌아와 미리 사둔 발수 코팅제 스프레이를

엄마와 내 신발, 그리고 바람막이에 뿌려

베란다에 말려두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날씨요정이니까 괜찮을 거야.

해가 아주 쨍쨍한 것보다 낫잖아?



그때 엄마가 나를 불렀다

"딸, 어디 약 사 올 데 없나?"


알고 보니 엄마는 몸살기운이 있었고,

생각보다 조금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내일, 괜찮을까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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