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러닝머신이 지겨워요

10년 차 운동강사 겸 명배우 지망생, 왜 나는 산으로 갔는가

by 시현


"... 헉... 흐허어억..."


체력이 말도 안 되게 부족하다는 걸 느낀 건

바로 액션 아카데미에서였다.


배우로서 살릴 수 있는 특기가 뭐가 있을까

고심 끝에 액션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특기가 되긴 애매하고,

이미지도 어느 정도 그런 쪽으로 잘 맞으니

액션 연기를 배워놓으면 쓸데가 많으리라.


한 대 맞고 화나서 발 걸어버리기


액션 아카데미 본 수업 시작 전 몸풀기는 달리기였다.

간단한 전신 스트레칭 후에

10바퀴를 무조건 뛰고 시작했다.


말이 10바퀴지, 대학생 자취방 정도 되는

넓지 않은 크기라 사실 다해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 근데 진짜 너무 힘들었다. 목에서 피맛이나…


‘체력이 일단 있어야 한다’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느낀 건

그 이후에 있었던 넷플릭스 영화 촬영날이다.

생애 첫 출장 촬영은

지방의 대형 스튜디오에서 4일간 진행됐다.


주조연급 배우는 아니지만 늘 배경처럼 존재해야 하는 역할인지라 콜타임이 아주 빨랐다.


에이전시에서 제공해 주는 모텔 숙소 입구에서 새벽 다섯 시 반쯤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새벽부터 아침을 먹고, 메이크업도 받고 의상도 갈아입고 언제든 부르면 준비 완료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언제 내가 필요할지 모르니

대기실에 늘어져서 쉴 수도 없는 환경이었고,

그날의 촬영 종료 시간도 알 수 없었다.


비타민을 메가도스로 열심히 챙겨 먹으면서

나름 꽤나 노력했지만, 결국 출장이 끝나고

나는 며칠간 목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


목감기는 배우로서도, 트레이너로서도

꽤나 치명적이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러닝머신과의 사투


이제는 진짜 체력도 키우고

슬슬 늘어가는 나잇살도 뺄 겸

유산소 운동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직업 특성도 그렇거니와,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을 극복하고자

10년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은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유산소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유산소성 운동이라고 하면 킥복싱이나 수영 정도?


그리고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만큼

지방도 쉽게 붙지 않는 편이라

웨이트 트레이닝과 식단만으로도 어느 정도 체중이 유지가 됐다.


근데 어째 요즘 들어 아주 조금씩 뱃살이 늘어가고, 입으면 뭔가 애매하게 불편한 바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일 가는 게 헬스장이니 일단 러닝머신부터 시작해 보자. 호기롭게 올라갔지만 정말 너무 지루하기 짝이 없다. 쳇바퀴 도는 다람쥐도 아니고. (회원들에겐 그렇게 열심히 시켰으면서…)


내가 뛰는건지 뜀을 당하는 건지


그나마 일반 러닝머신보다는

마이마운틴(경사도가 가파르게 올라가지는 러닝머신 종류)이 할 만했고, <최애의 아이>와 각종 드라마 및 예능 시리즈로 어떻게든 버텨봤지만…


유산소 하는 날은 집에서 "악! 가기 싫어"를

삼세번 외치곤 했다.



러닝이 대세라고?


누군가 러닝머신이 지겨워서 한강변을 뛰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러닝 크루 같은 것도 많이들 한다더라.


근데 나는 일할 때 빼고는 I (아이) 중의 I 여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시간 맞춰 어딘가로 나가는 것도 선호하지 않아서 러닝 크루 합류는 탈락.


(게다가 왕초보는 잘 안 껴줄 거다. 당연하지… 크루원들 꽁무니도 못 따라가는 정도의 실력은 도저히 같이 달릴 수가 없다 허허)



가까운 공원을 혼자 뛰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따릉이 7분 거리에 꽤 큰 공원이 있다.


일단 발볼러로서 발이 편하기로 유명한 뉴발란스 러닝화를 열심히 검색해서 하나 장만하고, 급한 대로 쿠팡에서 저렴이 러닝벨트도 사서 뛰쳐나갔다.

4월 중순에서 말로 넘어가던 때라 날도 적당히 좋았다.


하…


겨우 8분 뛰었는데 죽을 것 같이 숨이 차오른다.

러닝 머신은 속도나 경사도가 숫자로 바로 보이지만

야외에선 스스로 페이스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러닝 메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조금만 뛰어도 숨이 훅 가빠올라서

흔히 쓰는 런데이나, NRC 같은 러닝 어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의 첫 러닝이었다.

첫 러닝 터닝포인트 한강뷰 - 네 지금 지쳤어요

빵트레일런이라니, 그게 대체 뭔데?


“이왕 뛰기 시작한 거 목표를 정해보자!

그러면 더 열심히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마라톤 대회를 찾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영어 공부를 할 때도 토익이나 토플 같은 시험 접수를 먼저 해두고 시작해야 능률이 팍팍 올라갔던 나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비대면 마라톤도 있고, 집에서 멀지 않은 여의도 또는 경기도 등 다양한 곳에서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중 단연코 눈에 띄는 타이틀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빵트레일런 BBANG TRAIL RUN


열심히 뛰고 나면 빵을 준다는 귀여운 마라톤 대회가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빵빵런”이 아니라 “트레일런”이라니?!


트레일런이 대체 뭔지 궁금해서 일단 여기저기 찾아봤다.


아… 트레일 trail - 산길을 뛰는 거란다.

음 나 산 안 좋아하는데… 힘들잖아 그것도…


근데 산이라는 키워드를 들으니,

문득 하나뿐인 딸이랑 함께 여행 한번 가고 싶다던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열심히 현생을 살고 꿈도 좇느라 엄마와의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이 없었으니까,

산 좋아하는 우리 엄마랑 여행 가듯 같이 가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산을 뛰는 대회에 대해 설명하며 (어차피 우리 엄마는 등산하면 내리막길은 오도도 뛰어내려 가신다… 별명은 북한산 날다람쥐. 60년생 무릎이 뭐 이리 튼튼해?)


“20k 와 12k가 있는데 뭘로 갈까? “ 물었더니

자신 있는 말투로 “아무거나 딸이 원하는 거” 고르라신다.


그래요?

그럼 이왕이면 여장부답게 20k로 신청 완료!!



트레일러닝은 어나더레벨이세요 손님


대회를 신청하고 보니 준비물에 트레일러닝화

그리고 트레일러닝 조끼라는 것이 있다.


대체 나의 취미 생활에는 필요한 장비가 왜 이렇게 많은가 싶다가도, (최근에 테니스 몇 년 쳤음)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곤란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첫 번째 그 공원 말고 챗지피티가 추천해 준 또 다른 러닝 루트인 야트막한 뒷산에 다녀왔는데,

지난번에 구입한 일반 러닝화를 신고 갔다가 축축한 흙길에서 아주 곤란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슨 스포츠를 하더라도 신발은 매우 중요한 걸 잘 알기에…

이번에도 아주 열심히 검색을 마치고 트레일러닝화를 장만했다. 원래는 쇼핑을 거의 안 하는 편인데 러닝화랑 트레일러닝화를 일주일 간격으로 구입해 버린 것이다. 하하하… 내 카드값… ^^*


진흙길 뛰고 만신창이가 된 이제는 내 최애템


그렇게 며칠간 검색을 마치고 나에게 온

트레일러닝화, 트레일러닝 조끼 + 흐늘거리는 물통을 장착하고 뒷산 둘레길부터 정복하기 시작하며, 나의 트레일러닝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평지 러닝도 못하는데 산은 어떻게 뛰냐고?

사실 여긴 숨겨진 비밀이 있다.


트레일러닝은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계속 뛰는 게 아니라 걷뛰(걷다 뛰다)가 기본이고,

기록이나 순위보다는 본인 페이스를 유지하며

완주하는 것이 목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리고 흙길을 선택하면 발이 폭신해서 충격이 덜하고, 주변 나무들이 산소를 계속 공급해주고 있어서인지 회복도 빠르다.


게다가 뛰는 중간중간 귀여운 동물친구들을 볼 수 있는 건 무시 못할 큰 장점 중 하나.


여기까지가 유산소 싫어 인간이

왜 트레일러너가 되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한 줄 요약하자면,


체력과 체지방 때문에 유산소는 해야겠는데

그냥 러닝은 싫어서 탈출한 곳이 산이고,

어쩌다 보니 그 매력에 홀딱 젖었다는 그런 이야기.


뭐야 예뻐





그래서 신발이랑 조끼는 대체 뭘 샀냐면 말이죠!?

다음 편은 바로 장비소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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