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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청춘

by 황마담
큰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목공소 앞에서 -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이던

1941년에 일본 미야자키에서 태어나,


5살에 8.15 해방을 맞으면서 현해탄을 건너오고,
10살에 6.25 전쟁을 겪었던 우리 아버지는
평생 감자와 옥수수, 수제비를 안 드셨다.


전쟁통에 하도 지겹게 먹어서,

쳐다보기도 싫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럴 만도 한 것이, 6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홀로 무려 7남매를 키워냈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북 경산군 자인면 동부리 95.


이 본적지를 근거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아버지는 이미 10대 때에 양계장과 술도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주린 배를 막걸리 지게미로 채우다

취해서 비틀거린 적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학하여, 개천에서 용 나듯이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셨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그것도 서울로

상경 했으니, 가문의 영광(?!) 이긴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어서,

군밤, 군고구마 장사를 비롯하여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학비를 벌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온갖 궂은 일 -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도 했다.




내 어린 시절,

이런 이야기들을 아버지로부터 들을 때는
맨날 똑같은 소리에, 지겨운 레파토리라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시끄러운 잔소리들이
듣기 싫다고, 짜증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 나이도 반백년을 훌쩍 넘기고,
살면서 이런저런 세상사를 경험하고 난 뒤에-


다시 되새겨보게 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로 가슴 뭉클해지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맞물리면서-


정말로 청춘을 다 바쳐,
무수한 고난에 맞설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우리네 아버지들.


오늘은 조용히 다가가서,
가만히 손이라도 한번 꼬옥~ 잡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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