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D-51
물욕 없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살고 있지만 내 방에는 열 칸짜리 손목시계 보관함이 있다. 흠흠.
그래도 비싼 시계들은 아니고 5년 전쯤 '시계 쇼핑으로 분노 조절하기'를 끊었으니 이 정도면 욕심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달라).
더이상 시계를 사지 않기로 한 후에도 스마트 워치에는 몇 번 흔들렸다. 시판되기 시작했을 때 블랙홀에 빨려들 듯 스마트 워치의 세계에 함빡 몰입했었다. 엑셀에 표를 만들어 제품마다의 사양과 규격, 장단점을 적어 비교했다. 힘들게 후보군을 추렸지만 초기 모델들이라 내 손목에는 모두 너무 크고 무거워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던 본질적인 질문, 운동하지 않는 내게 스마트 워치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에서 이미 결론은 나있었다.
몇 년 전, 하루에 백보 단위로 걷는 비인간적 삶은 살지 말자는 다짐으로 가장 싼 스마트워치, 샤오미 밴드를 샀다. 손목엔 그 날 그 날 마음에 맞는 시계를 차야 흡족하니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발목에 차고 다녔다.
만보기 용도로만 사용하던 그 밴드를 요즘 달릴 때는 손목으로 옮겨 찬다. 핸드폰 어플과 연동해 스마트 워치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달린 거리, 시간, 페이스를 알 수 있어서 좋다. 45분을 뛰는 동안 몇 번이나 밴드를 확인할까. 기력 다 떨어진 마지막 즈음엔 아마도 30초마다?
오늘도 밴드와 핸드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어플에서 'GO'를 누른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편의점을 지나고(얼음물 먹고 싶어!), 세탁소를 지나고(러닝화는 어떻게 빨지?),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고(나 채식해서... ㅜㅜ), 유치원을 지난 다음 밴드를 확인했다. 앗! 작동을 안 하고 있어!
당황했다. 달리기 일지 써야 하는데? 오늘 기록 없다고? 악!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다행히 어플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휴.
하지만, 핸드폰을 들고 뛰는 것이 집중에도 방해되고 무겁기도 하고 팔치기 균형도 안 맞을 것 같아서 며칠 전부터 힙색에 전화기를 넣고 달리고 있다. 고로, 샤오미 밴드가 작동하지 않는 지금, 달리고 있는 상황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알 수 있는 건 오직 현재 시각뿐.
오늘의 달리기는 이러했다. 설렘 > 즐거움 > 당황 > 좌절 > 마음정리 > 적응 > 편안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며 잠에서 깼고,
팔을 흔들고 땅을 딛는 느낌이 좋아 즐거웠다가,
밴드가 작동을 안 해 당황했고,
몇 킬로를 뛰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좌절했다가,
어차피 동네니까 평소 마무리하던 시각에 맞게 집에 도착하면 된다고 훌륭하게 정리 끝!
달리면서 수없이 밴드를 확인하는 대신 이런저런 생각들에 집중하는 달리기에 적응했고,
그 영속성이 편안했다.
지금 내가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를 자꾸만 재촉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과 때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오늘은 달리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굿.
아, 그런데... 요즘 스마트 워치들은 작고 가볍게... 나오더라고...? 나는 운동을 시작했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