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황현산
이런 어른이 있었구나.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한 생각입니다. 배울만한 어른, 믿어도 될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요. 이미 서른 즈음이었던 그때, 멋진 어른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도 잘 자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황현산 선생은 번역가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열심이었습니다.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같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시인들의 시는 물론이고 제목부터 어려워 보이는 작품들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까지 폭넓은 프랑스 작품을 우리 문학의 품으로 끌어안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많은 독자와 대중으로부터 사랑 받은 이유는 단지 그가 전한 프랑스 문학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을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옳지 못한 것이 옳지 못한 이유를 정확히 제시할 수 있었고, 나쁜 사람들에게 주저없이 쓴소리 하는,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멋짐이 그리워 그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남긴 트윗들을 모은 책,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를 읽었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 몰두해왔음에도 여전히 더 정확한 번역을 고민했습니다. 원문에 없는 한 글자를 덧붙여 번역가의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하는 것보다 본 문장대로 충실히 전달하며 독자를 믿는 편을 택하겠다 말한 트윗에서는 저자-번역가-독자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신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 셰익스피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영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대체 텍스트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없던 한국어 '안'에 셰익스피어를 있게 하는 일이라는, 고로 셰익스피어를 번역하기 전과 후의 한국어는 다르다는 트윗에선 번역의 역할과 힘에 대한 그의 폭넓은 사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공자, 지성인으로서 그가 고수했던 책임의식이 나의 직업태도를 돌아보게 했다면, '인간 황현산'이 남긴 트윗들은 '이 문장을 읽었으니 이제 나는 전과 같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가 확고히 가지고 있던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은 나의 불안과 혼란을 다독여주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느 곳을 바라보고,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면 되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에게서 대답을 들었으니 전과 같을 수 없겠지요. 큰 위로와 용기를 얻은 트윗을 옮겨 봅니다.
2014. 11. 25.
이러다 유신 시대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어느 젊은 문인이 말했다. 애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한번 일어선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기지 않는다. 무릎이 자주 다치긴 하지만.
2014. 11. 26.
기어가다 일어서는 아이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생명의 이치를 빌려 낙관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설 만큼 성장했다는 것은 무릎이 깨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된다.
3년 7개월간의 트윗들은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편안한 하이쿠를 읽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일평생 골똘히 고민하고 겪어내 이룬 통찰과 지혜를 이렇게 쉽게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저는 황현산 선생을 흉내내려 애쓰는 팬으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가 떠난 이 세상에서, 그가 사랑했던 동료 시민들을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