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D-23
4시 30분에 일어났는데 또, 또, 또 이렇다. 어제 저녁 시작된 두통이 밤새 이어졌다. 아주 지긋지긋해, 정말.
뇌혈관에 염증이 있는 데다 뇌혈류 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2배 넘게 빠른 탓에 일반 진통제로는 두통을 잡을 수가 없다. 병원에서 처방받아 조제한 약을 재빠르게 삼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매주 (주차하기 너무 어려운) 병원에 가 똑같은 약을 받아오는 게 번거롭고 귀찮아 '제가 세 달 동안 외국에 나가 있을 거라서요'라고 뻥을 치고 넉넉히 약을 받아왔는데 석 달을 채우기엔 아직 멀었고 남은 약은 얼마 없어 '자고 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그냥 잤는데, 이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두통 같으니라고. 하!
머리도 아픈데 뛰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하는 독서모임 주제책도 아직 안 읽었고, '어제 5km 뛰는 데도 힘들었잖아? 이제 새벽엔 쌀쌀하기도 하고 말이야' 같은 합당한 이유들을 생각하면서도 양치질을 했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고 몸을 쭉쭉 늘이며 준비운동을 한 다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아, 시원해.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오늘 좋은데?
다리가 가벼웠다. 발은 사뿐사뿐했고. 허리와 등도 자연스럽게 쭉 펴졌다. 시계를 보니 힘들이지 않고 달리는데도 페이스가 6분 30초대였다. 반가워라. 오늘은 8km 뛰는 날이네!
신호등도 초록불 대잔치였다. 횡단보도에 도착할 때마다 웰컴!
뛰는 도중에 멈추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안 달려본 사람은 아마 모를걸. 온 세상이 나를 환영해 주는 기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까?
한바탕 뛴 다음 샤워를 하고 생각해 보니 머리도 안 아팠다. 두통이 오면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뇌가 쏟아질 거 같은데 55분을 쉼 없이 콩콩거리며 달렸는데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이거네. 회사에서 머리 아프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 막 달려야겠네.
그래서 오늘의 달리기가 내게 가르쳐준 것.
1) 해보지 않고 변명하지 마라.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큰 세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2) 어제 힘들었다고 해서 오늘도 힘든 거 아니다. 고난이 이어질 논리가 빈약한 것만큼 반전의 가능성 또한 크다.
3) 세상을 오해하지 마라. 간절한 당신 앞에서 팔짱 끼고 모로 고개 돌리는 곳이 세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웰컴. 지금껏 온갖 방법으로 당신을 환영해 왔다. 가만히 생각해 볼 것.
4) 운동하자. 아프다고 인상 쓰지 말고 운동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