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회의 불안정성
하필 왜 그 시기에, 유독 유럽에서만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까?
다른 문명사회에서는 왜 르네상스 같은 인본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중세 이전의 세계는 지구촌 어느 곳 할 것 없이 전통의 가치와 질서가 절대 규칙으로 여겨지던 사회였다.
중세 이전까지의 사회들은 제각각 오로지 하나의 진리에 의해 사회의 가치와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럽이 그러했고, 아랍세계가 그러했으며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시 유럽과 비유럽 세계는 서로 다른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유럽은 지리적, 영토적 측면에서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권력의 속성 또한 세속의 권력과 신권(神權)이 나누어진 채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획일화가 아닌 다원화되어 있던 이러한 권력의 양상은 사회의 다양성과 활력을 담보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비유럽 세계의 정치 상황은, 유럽보다 획일화된 중앙집권적 경향이 짙었다.
이는 정치적 안정성은 담보할 수 있었지만 사회의 다양성과 활력은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완고하게 작용하던 기존의 질서를 타파할 혁신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유럽은 타 지역에 비해 더욱 특별한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에는 어떤 시대적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또 그것들은 어떻게 르네상스 탄생의 배경으로 작용했을까?
먼저 유럽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다.
14~15세기경의 유럽은 20세기 초의 유럽만큼이나 혼돈과 격동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무력행사를 일삼기 시작했고 유럽의 강대국이던 스페인과 프랑스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던 이탈리아로의 진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 간의 왕위 계승 문제로 촉발된 백년전쟁은 유럽의 서부와 남부로 확대되어 무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게 전쟁의 참화를 치르도록 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강호 오스만 제국은 유럽 지역을 대상으로 한 침략행위를 수시로 일삼았을 뿐 아니라, 급기야 동로마제국의 수도이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에 이른다.
또 바르바리로 불리던 이슬람 해적단의 끊임없는 노략질은 유럽인들의 삶을 공포에 빠뜨리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세 사회의 질서를 담당하던 교회의 추락은 혼돈과 격동의 절정을 불러왔다.
세속 권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왕과
신권의 대명사이던 교황과의 다툼 과정에서 발생한 아비뇽 유수* 사건은 교회의 권위를 한없이 추락시켰다. 또 종교개혁이라 불리던 교회의 분열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하던 서로 간의 학살 행위로, 사람들의 삶을 원초적으로 도탄에 빠뜨렸다.
때마침 발생한 페스트라는 전염병은 가뜩이나 피폐해진 삶의 고단함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는 프랑스왕 필리프 4세가 로마의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강제 이전시킨 것을 말한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68년 동안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재위했다.]
황폐해진 유럽의 사회상은 기존의 전통과 가치, 진리와 권위에 대해 의구심과 회의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회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의식의 발로로까지 귀결되었다.
이러한 회의와 자의식은 절대 무결이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고, 신을 향하던 눈을 인간 자신에게로 돌리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물상(物象)이 있는 만큼
진리 또한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또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신을 예찬하던 노래와 음악과 미술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시작했고,
과학 또한 학문의 한 분야로 당당히 자리 잡으면서 자연현상의 운영원리와 법칙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유럽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과 그것에 연동한 사회적 분위기는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르네상스 들여다보기 04-0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