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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Apr 16. 2024

1.거기 가기 일주일 전

가보자, 제주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수면 보조제를 먹고 누웠다.

시간이 갈수록 또렷한 상상에 대한 나래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보조제는 그냥 비타민 군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영양제인 듯하다.


머릿속에서 나를 옥죄어 수면에 이르지 못하게 했던 상상은 앞으로 펼쳐질 제주도에서의 일상이다.


첫째, 짧은 홀로서기에 대해 공포감은?

머릿속으로 글을 썼다.

아주 짧은 단편 한 권은 적었을 것이다.


우선 그 공포감은 나의 숙소를 잘 알고 있는 그곳의 주민이 숙소 안에 몰래 숨어든 후,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우습게도 몽롱한 상태의 나의 상상 속 범행은 애써 내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모두 처먹고 있는 모습이다.

어떤 죄질 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며 피식거렸다,


둘째, 자동차 탁송은 과연 잘한 일일까?

처음 달려보는 도로를 홀로 운전하며 나의 개와 함께 낭만을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위험도를 생각하며 운전을 해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결코 그리 낭만스럽지 않다.

또한 나의 개는 늘 짖는 개이기 때문에 나의 귀와 눈이 느끼는 스트레스 지수는 최고조일 듯싶다.

나는 최대한 내 개와 나의 안전을 위해 80km 이상 달리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탁송에 관한 생각은 꽤 긍정적인 것이라 보고 내 머리와 주머니를 위로했다.


셋째, 무계획은 내게 어떤 시너지를 줄 것인가?

나는 완벽한 계획형 인간이다. 하지만 이번 길은 계획이 무다.

딱 하나 숙소에 대한 정보를 제외하곤 그 어떤 정보도 없다. 무계획이 나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또는 유쾌하게 또는 이루다,라는 성취감을 선사할지 나름 기대해 본다.

또 하나! 무계획으로 인한 생각지도 못할 집순이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섞어 본다.


넷째, 편리함을 버린 불편함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내 집에서는 다음 날 꼭 사용해야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새벽 배송이라는 편리함이 열린 곳이다.

그곳에서 편리함이란, 미리 쟁여두는 것을 말하는 거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의 숙소는 그렇지 않아도 섬인 곳에서 아주 외진 곳이다.

미리 쟁여두기란 처음 며칠은 편리함으로 적용될 것이다.


상상해 보았다.

당연히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한 와인을 생각하며 열심히 먹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오랜만에 고기도 굽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수프도 끓여 낸다. 그리고 나름 예쁨과 여성스러움을 가장하기 위한 행위도 해본다.

자, 영상통화를 누를 준비를 하며 와인을 꺼내기 일보직전이다.

와인이 없다. 젠장 그 흔한 맥주도 없다.

이 사건은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초행길에 운전대를 잡으며 내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혼비백산한 움직임보다 더 큰 사건이다.

그렇게 우울한 밤을 보내며 아직도 많이 남은 비행기 티켓만 만지작거리겠지.

난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매우 피곤함 속에 눈을 감고 눈동자를 굴렸다.

답은 나왔다. 아주 독한 위스키를 편리함을 위해 미리 차에 넣어 탁송을 할 것이다.

와인이 없다면 독한 위스키 한잔에 물 100ml, 완벽하다.

이로써 편리함의 쾌락에 대한 걱정은 대충 괜찮을 것 같다.


다섯째, 나를 위한 요리를 매일 하기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남을 위해 요리를 했다. 물론 가끔 나를 위한 요리도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전히 나를 위한 요리를 하다니, 홀로 자취하던 때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당연히 누구나 그랬듯 돈을 지불하고 완전한 조리 상태의 음식을 먹는 날이 허다했다. 질리도록 긴 시간을 그렇게 지냈다.

점점 완벽한 꿈을 꾸는 것처럼 장면도 떠올랐다.

배고픔에 낯선 길을 또다시 운전하며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땅한 재료 없이도 뭔가를 만들어 내는 백종원과 같은 신이 내린 능력은 없지만 한 번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오로지 나를 위한 날을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실 오늘 당근 파스타도 만들어 봤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제주 당근으로!

제주당근 파스타 재료


완성된 제주 당근 파스타


여섯째,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기

나는 완벽한 INFJ다. 물론 세월과 함께 달라진 점도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엔 진짜 나는 그 속에서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웃음을 흘리긴 하지만 그 웃음은 아무 내용이 없는 것이다.

다시 상상을 한다.

하루를 정해 놓고 나의 개를 지치게 한다.

몇 시간을 쉬어도 피곤할 정도로 산책과 놀이를 할 것이다. 그리고 택시를 불러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처음 그들을 보자마자 나의 얼굴은 맛있는 제주 당근처럼 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나의 얼굴은 또다시 발개지고 말도 더듬거린다.

그들이 소개한 와인을 조금씩 들이켜며 발개진 얼굴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간다.

내용 없는 웃음을 짓지만 나는 웃고 있지 않은가?


아, 이제 나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쯤 되면 수면 보조제는 보조제가 맞는 걸까?

내가 피곤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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