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작고 고독한 시인
나의 엄마가 또다시 감쪽같은 일을 꾸몄다.
아빠도 알고 있었을까? 글쎄, 아빠는 워낙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빌어보면 이렇다.
“세상에 집을 벌써 샀어? 역시 우정 엄마야”
우린 도시로 이사를 준비했다. 서울만큼 완벽하게 답답하거나 없는 것이 없는 그런 도시는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는 군, 에서 시, 란 곳으로 이사를 한다.
우성이가 더 이상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교를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시로 고등학교를 간 우정 언니도 더 이상 불편한 친척 집에서 눈치를 보며 더부살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두 남매의 천국은 시작을 알렸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싸 주는 깨끗하고 맛있고 영양 높고,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
우정이는 그게 제일 바라던 일이다,라고 말하며 손뼉을 치며 우와, 하는 소리를 지르기도, 점프하며 방방, 거리기도 했다. 근래 볼 수없던 우정의 모습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조금 찡하기도 얄밉기도 한 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정말 엄마의 정성 어린, 모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반찬이 잔뜩 들어있는 도시락을 독점해 온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천국은 끝난 것이라는 얘기와 같다.
이제 난 우성이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서 멀미 나는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되는 거리를 다녀야 한다.
고단한 지옥이 내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이런 생각도 해 본다.
가능하지 않을 걸 알지만, 어차피 난 학교에서 고독을 씹으며 고독의 시를 읊으며 다닌다.
그러니까 학교 따위 때려치워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하물며 나의 엄마에게도.
그렇다면, 정말 엄마에게 말이라도 해 볼 까?
또는 무작정 학교를 가지 말아 볼까?
식의 어쨌든 학교를 그만두는 생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 보았다.
학교가 굳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난 공부라는 것에 엄마가 말하는 취미라는 것도 없고 딱히 영혼을 맡길 친구도 이제 없다.
나의 담임이 누구인지 내가 몇 반인지 관심도 없는 엄마는 웬일인지 학교에도 내가 이사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내가 이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를 좋아하는 또래의 아이들은 내가 이사 가면 전학이라도 가는 줄 알고 있었고, 그게 언제 즈음이 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참으로 귀찮다.
솔직히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난 공부를 싫어했고, 언니 우정이가 다니는 학교는 꿈도 못 꿀 것이고 그렇다고 정말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학교, 그러니까 공부를 하지 않는 대신 껌을 씹거나, 담배를 입에 물거나 술을 마시는 아이들이 있는 무서운 학교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우성이의 힘센 도시 아이들이란 타이틀이 내게 아직도 귓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기도 했다.
엄마가 나를 위해 그곳에 알아본 학교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성이처럼 나를 전학 보내 줄 거라는 작은 소망도 가져 보았다. 당연히 적응, 이라는 단어를 또 달고 살아야 하긴 하지만 만약 엄마가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나는 고입 시험을 위해서, 그곳을 가기 위해서,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주눅 들게 했고 나를 슬프게 했다.
“엄마, 나도 그럼, 고등학교 거기서 다녀야 해?”
엄마는 고민도 하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공부를 잘해야 가지”
전학 먼저 가자, 거리가 머니까 거기서 다녀야 해,라는 말을 내게 해줬다면 앞에서 얘기했지만 난 정말 열심히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주 빠르게 나를 몰살시켰다.
난 정확히 눈치채고 말았다.
엄마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명백히 밝혀졌다.
우성이와 우정이에게 넘치는 정성을 쏟고 발이 보이지 않게 뛰어다녔던 나의 엄마가 맞는 건가?
왜 내게는 이렇게 느린 발과 여유를 보여주는 건지 모르겠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포기한다는 것, 그건 부모라는 자리와 맞는 개념의 이야기일까?
나는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고독했고 쓸쓸했다.
그래, 좋다. 통학?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버스를 타고 다녔던 우성이가 있다.
우성이에게 그 일은 미래를 위해 한 단계 나아가는 일이었고 나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생각했다.
그래, 어렵지 않다. 해 볼 거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을 박차고 솟아오를 테니, 두고 보라지.
난 여전히, 아니 점점 더 체육 시간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삐뚤어져 갔고, 삐뚤어진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간혹 나는 선생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내 맘대로 체육 시간을 빼먹었다.
정말 재밌는 건 나 하나 빠졌다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존재 같지 않은 존재였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그만큼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었고 없어져도 될 만한 그런 무존재 따위였다.
내가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쓰고 다니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난 책상에 앉아 선생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해가 밝혀주는 그 부분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도 안 되는 고독의 시를 내 멋대로 읊었다.
아직 겨우 3교시다.
이대로 시간이 더디게 간다면 박차고 일어나 가방을 들고 학교를 뛰어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앗, 그 순간 나는 학용품과 거지 같은 책들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교실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그때 교실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너무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수진이다. 수업 시간에 수진이가 나와 있다니, 그것도 왜 우리 반에서 서성거리는 걸까?
수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너, 저기, 어디 가?”
나는 수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수업 시간인데 넌 왜 그러고 있어?”
수진이가 조금 미소를 지은 것 같다.
난 피해의식이 자리 잡은 탓에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불쾌했다.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나도 자율학습, 화장실 갔다 왔어”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방향을 보았고 수진이가 더 가깝게 나의 자리로 다가왔다.
만약 지금이 내게 희망적인 상황이라 해도 난 지금 수진이와 얼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수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이사 가는 거 맞아?”
나는 수진이의 말을 듣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어 왜?”
수진이가 내게 쪽지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손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책상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쁠 법도 했던 수진이는 한숨을 짧게 내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책상 위에 쪽지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체육 시간이라, 없는 줄 알고 이것 놓고 가려고”
수진이는 그동안 내게 우정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영원을 말하던 내용의 쪽지를 수없이 썼고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하지만 이젠 우린 그렇지가 못하지 않은가.
생각해야만 했다. 이 쪽지가 내게 완벽한 결별 선언의 내용일지를 말이다.
난 겁이 났고, 지금으로도 충분히 난 수진이와 결별한 상태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굳이 이 쪽지를 읽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 기분은 똥물처럼 새카맣게 되고 있었으니까.
이제 막 고독함과 합의하며 그것과 동행하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나의 궁금증은 칠판으로 비추는 아름답고 반짝이는 긴 햇살 덕에 폭발했다.
정말이지 너무 반짝였고 너무 아름다웠다.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빠르게 쪽지를 열었다.
『우재에게
우선 미안하다는 말 먼저 할 게
이 말은 나도, 너도 우리가 서로 꼭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었어
나를 외면하는 네가 미웠어, 그리고 난 배신감에 슬펐어
응, 배신감
아무렇지 않게 널 대할 수가 없었던 거야
넌 물론 이유가 있다고 할 거야
넌 늘 이유 있는 행동을 하는 아이니까
그건 믿고 모르지는 않지만
난, 그랬어
이사 간다고?
그 소식을 듣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라
아침마다 우재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까?』
수진이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쓰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했다.
수진이의 말은 다 맞다. 하지만 난 늘 그렇게 다닐 수는 없었다.
고단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몸을 반으로 쪼개어 나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모두를 모른 척, 하는 것이 나는 나름대로 아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그런데 내가 배신을 한 거라니. 난 그래도 변명하지 않고 수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떡볶이 가게에서 수진이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난 그때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었다. 수진도 그런 기분이었단 말인가,
나는 홀로 고독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냐면 우리들은 내가 네가 아닌 이상 속속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알려하면 안 된다.
때문에, 다르지 않은 기분을 느낀 동지라 한다면 그건 서로 고개를 끄덕여 줄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남아 있는 의리일 것이다.
그렇다 충분한 이유이다.
어떤 이유가 됐건 내 잘못이 없어도 그와 같은 배신감이었다면 난 수진이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오늘 수진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수진의 담임은 꼭, 저렇게 종례를 오랫동안 한다.
말이 많고 걱정이 많기로 소문이 난 선생이다. 그것을 아이들이 곧이곧대로 듣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참으로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요일도 필요 없는 선생이다.
토요일은 좀, 넘어가면 안 되는 건지 지루하고 빡빡하지 않은가.
반장의 인사가 이어지자 열린 문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이런 모습도 난 이제 의미 없게 바라볼 수 있다.
수진이가 밀려 나오며 뒤에서 미는 남자아이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였다면 내가 한마디 했을 텐데, 난 지켜보았다.
수진이가 나를 보며 다시 웃는다.
“가자”
내가 기다릴 것을 알았다는 듯이 수진이는 놀라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가 동맹이었을 때처럼 행동했다. 우린 나란히, 가 아닌 앞뒤, 간격이 아주 조금 벌어진 채 걸었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차례일 것이다.
어쨌든 수진이의 말 대로 우리는 모두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랜만에 착한 아이 가면을 써 보자.
“저기, 나도 미안해”
수진이가 옆으로 와서 나의 팔짱을 낀다.
“나도 미안하고, 그리고 괜찮아”
나는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는 것처럼 그렇게 금방 새까맣던 마음이 괜찮아질 순 없었다.
하지만 수진이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재잘대기 시작했다.
“너 이사 가면 우리 진짜 보기 힘든 거야?
그럼, 전학 가는 거야?”
나는 아주 빠르게 말했다.
“아니, 난 아마 여기...”
수진이는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쳤다.
“뭐? 정말이야?”
수진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마늘과 고춧가루가 잔뜩 들어간 라면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순간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정말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 없는 몸부림을 쳤다. 수진이는 나를 쭉, 동맹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한 그때도 그랬던 모양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의 새까맣고 좁은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수진의 마음은 하얗고 바다 같은 모양이다.
우린 거짓말처럼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았고 뭔가 목에 이물질이 걸려 있는 것처럼 불편했고 기운이 빠졌다.
아마도 정희 때문일 것이다.
정희는 늘 씩씩한 아이였기 때문에 걱정은 안 하지만, 정희가 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희와 수진이는 물과 기름 같았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생각하니 나는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나을 법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 둘은 아주 사소한 일로 완벽하게 틀어졌다.
유치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심각했고 얄팍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폐였다.
사건은 길바닥이었고 우린 창피함도 모르고 서로에게 씩씩거렸다.
나는 사실, 며칠 전부터 정희와 언제 어색함을 갖고 있었냐는 듯, 말 한마디로 그것이 풀린 것처럼 지냈다.
그렇지만 난 정희와 다르게 마음속에는 약간의 응어리는 있었던 것 같다. 수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가와 준, 정희에게 너 그때 왜 그랬어?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어색함을 나누고 싶진 않았다.
정희는 그렇게 나보다 좀 어른스러웠다.
하교하며 여느 때처럼 수진이와 팔짱을 끼며 걸었다.
그때 정희의 목소리가 뒤에서 우리를 불렀다.
“야, 얘들아 같이 가”
수진이와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고, 정희와 해연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수진이와 정희의 겉치레적인 사이는 굉장히 얕은 친밀감을 그래도 유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속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탈로 난 지경이 된 것이다.
나는 정희와 해연을 보자 불안감을 미리 짐작했던 것 같다.
정희가 말했다.
“같이 가자니까?”
내가 말했다.
“어, 어 왔어? 근데 오늘 너희 반 대청소한다 하지 않았어?”
해연이 웃으며 말했다.
“킥, 몰래 나왔어”
정희도 따라 웃었다.
수진이는 쭈뼛거렸고, 정희가 보이는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던가, 벌레가 기어가는 듯 간질거렸다.
그래도 우리의 조합은 몸이 기억하는 대로 비슷한 행동을 하며 비슷한 대화를 하길 바랐던 것 같다.
우리는 우르르,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미리 모은 동전으로 과자 두 봉지를 샀다.
그땐 왜 늘 거리를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입에 집어넣으면 안 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입이 과자를 부르지 않았다면 수진이와 정희가 이런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과자 두 봉지를 나와 해연이 각각 나눠 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린 오물거리며 잘도 씹었다.
갑자기 수진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하지 마”
해연이 말했다.
“장난이야, 큭”
그러고 보니 전부터 수진이가 과자 봉지로 손을 집어넣으면 해연은 과자 봉지 밑 부분을 꽉 움켜쥐며 수진이의 입속으로 들어갈 그것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뭐, 당연히 장난이었다.
우린 그렇게 늘 장난을 치며 쫓고 쫓기는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우리의 이 조합은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고, 서로 간 어색함을 숨기고 또는 서로 간의 미움을 쉬쉬하며 걷고 있지 않은가.
나는 수진이에게 말없이 내가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해연은 수진이 곁에 딱 붙으며 말했다.
“장난이라니까, 왜 그리 인상을 쓰냐?”
수진은 두 번 정도의 참을 인을 입에 머금은 채, 말했다.
“아니야, 알았어”
나의 등줄기에서 흐른 땀은 엉덩이 한쪽과 또 다른 엉덩이 한쪽의 경계로 조르륵 흘러내렸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수진이가 소리쳤다.
“야, 이해연 하지 말라 했지?
너 이게 장난이야?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해연은 다시 한번 수진이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이건 누가 봐도 일부러 그랬다는 티가 너무 났다.
해연이도 지지 않았다.
“야, 니는 장난도 구별 못 해? 와, 성격 진짜”
그때 정희가 해연을 보며 말했다.
“장난이라도 왜 계속해? 싫다는데?”
수진이가 씩씩거리며 정희에게 소리쳤다.
“야, 니 눈엔 장난으로 보여? 장난 아니잖아?”
나는 셋이 붙어 있는 그 공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정희가 말했다.
“왜 소리를 질러? 너 진짜 이상하게 화를 낸다?”
수진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곪았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늘 그렇게 아닌 척, 하지? 다 알면서”
갑자기 수진이의 분노가 정희에게 다다랐다.
정희가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너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냐?
내가 뭐 잘못했어? 지금?”
해연이 갑자기 수진의 얼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야, 그만해라, 장난인데 너 진짜 심한 거 아냐?”
수진이가 말했다.
“너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 거짓말 마
그리고, 너희 둘이 심한 거지? 내가 심해?”
정희가 한풀 꺾인 말투로 뱉었다.
“하, 그래 알았어, 그만하자, 응? 그만해”
수진이 다시 끌었다.
“뭘 그만해? 니들이 시작해 놓고 뭘 그만해?
이번엔 착한 척이냐?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오옷”
나는 그때 가만히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과자 봉지를 떨어뜨린 그 순간 말도 함께 툭, 떨어졌다.
“이해연 네가 사과해, 네가 시작한 거니까 네가 끝내
시작한 사람이 끝내라고”
셋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특히 정희의 눈은 배신자,라고 내게 말하는 듯 큰 눈은 더 커졌다.
수진이가 한 마디를 툭 뱉고, 홀로 앞서 걸었다.
“됐어, 기분 거지 같아”
무방비 상태의 뒤를 보이고 만 수진이는 뛰어간 해연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잡히고 말았다.
“뭐? 거지? 거지라고? 너 말 다 했냐?”
수진이는 이 상황이 거지 같다, 란 말을 해연은 오해했다.
아니, 수진이가 습관적으로 자주 말하는 거지 같다, 란 말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었고, 해연은 그 말을 일부러 오해하고 싶었던 것처럼, 이때다 싶은 것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말려 볼 세 없이 수진이의 가느다란 목이 뒤로 젖혀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나의 목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나는 소리를 쳤다.
“으아악, 너 이 씨”
나는 빠르게 해연이의 손목을 낚아챘고, 정희도 함께 거들었다.
빼빼 마른 수진의 깡다구는 덩치 큰 해연을 감당해 내려 애를 썼다.
어렵게 뻗은 그 나뭇가지 손목으로 덩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이들을 말리며 수진의 팔을 더욱 높이 뻗을 수 있도록 해연이를 더 당겼던 것 같다.
정희가 소리쳤다.
“아씨, 별일도 아닌데, 그만 좀 해에에?”
수진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식적인 네가 더 나쁜 년이야”
순식간에 우리 넷은 서로 엉키며 누가 누구의 머리카락을 잡았는지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썼다. 호빵에서 헤어 나온 지 얼마 안 된 수진이를 이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어, 해연을 밀쳤다.
“그만해”
해연이는 아주 멀리 길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 나는 엄청난 숨을 뿜어 댔다.
“으어억, 허헉헉헉헉”
모든 것이 해결된 줄 알았다.
갑자기 뒤에서 정희가 수진에게 소리쳤다.
“내가 나쁜 년이면 너는? 진짜 나쁜 년이야 알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지랄이야”
맙소사, 믿었던 정희까지, 수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진이도 지지 않고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렇지, 이게 진짜 너지”
정희와 수진이는 서로에게 무슨 말이 오고 가는 건지 내 귀속에는 욕밖에 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역전되었고 해연은 정희를, 나는 수진이를 잡았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이 둘에게 나는 소리쳤다.
“그냥 둘 다 밀어버려”
해연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힘차게 정희를, 나는 수진이를 밀어 버렸다. 아주 세게.
아, 이제 끝난 건가, 수진이의 시뻘건 얼굴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당연히 하늘로 뻗고, 옆으로 뻗어 깊은 산속의 우거진 풀숲과 같았다.
정희는 아직 덜 풀린 분으로 씩씩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발, 그만하자, 좀 봐, 보라 구"
우린 아주 보기 좋게 교복을 입은 아이들 틈에서 마치 씨름 장에 와 있는 것처럼 집중이 되고 있었다.
예전의 얼굴로 돌아온 정희는 빠르게 이성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손을 털고 치맛단을 정리하며 나와 수진이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내게 말했다.
“갈 게”
정희가 내게 뱉은 이 말은 우재, 너와 나는 아직 괜찮은 사이야,라고 정해주는 듯, 여운을 남겼다.
머리카락이 정리가 안 된 정희의 뒷모습을 보니, 너무 속이 상했다.
오늘 싸움의 주범 해연은 수진을 눈알이 귀까지 뻗어 나갈 정도 흘기며 걸었다.
해연은 앞서 걸으며 계속 뒤를 돌아보며 우리를 확인한다.
나는 정말 해연이 미웠다.
아니 해연이 수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챈 저 손가락이 증오스러웠다.
나는 그 누구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내 속으로 못된 아이라고 정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음흉하게 소리 없이 조용히 홀로 그걸 되씹고 다시 못 됐다, 고 정의를 내린다.
수진은 솔직함의 포로라고 할 만큼 솔직한 아이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 따위를 숨기거나,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조금은 비밀리에 붙이는 정희의 성격은 수진이와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수진과 정희를 꼭 화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나를 위한 부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둘이 정말 화해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땐 고독을 씹는 것보다 이중인격자가 되어 살아야 하겠지.
뭐가 이렇게도 복잡하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도 우성이와 우정이처럼 그곳으로 학교를 옮기게 해 달라고 엄마한테 무릎을 꿇고 빌어볼까?
악, 머리 야, 정말 머리가 아프다.
머리와 목의 경계 움푹 파인 그 어디쯤인가, 사악한 누군가가 보이지도 않은 바늘로 계속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나는 수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부탁하듯 말했다.
나의 한쪽 마음은 내가 왜 이렇게 나서야 해? 나서지 마,라고 말하고 있다.
“수진아, 화해하면 안 돼?”
수진이는 나를 정말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뭐? 화해?”
“화해 안 하면 우린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해”
수진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난 이렇게 지내는 게 좋아, 전혀 불편하지 않아”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난 속삭이듯 뒤를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어쩌라는 건지...”
나는 분노를 터트렸다.
이건 수진이에게도 정희에게도 해당되는 분노가 아니다.
인간을 이렇게 복잡한 감정의 동물로 만들어 놓은 저기 높은 곳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구경하고 있는 그분을 원망하는 표현이었다.
“아, 씨”
뛰지도 않은 내 몸은 숨이 가빠졌다.
수진이가 놀랐다.
“아니야, 아니야 미안 너 때문이 아니라...”
수진이가 내 말을 이해할 리 없었고, 또한 그게 맞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수진이가 팔을 뿌리쳤다.
“왜 그래? 너까지?
내가 뭘 잘못했어? 너도 내가 그렇게 만만해?”
수진이도 나도 우린 서로 아주 독한 피해의식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 수진아…”
나는 너무 지쳤다.
나는 놀란 눈, 촉촉한 눈, 두 손을 바들거리는 저 아이를 홀로 두고 앞서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 나의 고독한 시에는 싸움, 그리고 분노, 폭탄, 날카롭게 찢어진 나의 혓바닥, 이란 단어만 튀어나왔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을까, 란 내 생각은 제대로 된 착각이었다.
괜찮아진다고?
개뿔, 우리는 자라날 때마다, 그리고 나이를 사분의 일, 사분의 이, 사분의 삼, 그리고 한 살을 채울 때마다, 남이란 인간에 대한 오해와 분노와 미움을 더 쌓아갔다.
넓은 마음을 갖고 자라기엔 우리의 작은 사회는 가혹했다.
사랑을 쌓는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사랑과 신뢰는 쌓아지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것만 같다.
오해와 분노와 미움은 왜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만 갈까?
과연 왜, 우리는 이것들을 디디고 커 가야만 하는 것일까, 온전히 자라날 수는 없을까.
온, 전, 히, 란 단어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란 말인가
온전하지 않은 시간은 더디게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