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봉 Oct 21. 2024

안녕, 나의 작은 사회

24. (완결) 네 곁에는 늘 우리가 있었어



미끄러질 듯한 광택의 대리석 바닥, 어디선가 불어오는 따뜻한 공기, 완벽한 말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꽤 정겨운 사람들의 말소리, 높게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책꽂이, 색색들이 펼쳐져 있는 갖가지 책, 그 속에 작게 자리 잡은 커피 전문점, 전쟁 같은 나의 삶 속에서 휴식을 주는 것들이다. 


나는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 나만의 『데미안』을 무릎에 놓고 높은 책꽂이의 끝을 바라보았다. 

젖힌 뒤통수가 차가운 벽에 달라붙었다.

섬세하게 콧구멍을 밀고 들어오는 커피 냄새에 기분 좋은 아드레날린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내 자존감을 찾는 행위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심장에서 울리는 울음이 금세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조금씩 퍼진 아드레날린으로 나는 또 진정하며 눈을 떴다. 


오늘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날이다. 

내가 벌써? 

어둠과 인간의 모습을 닮은 괴기한 것을 상상하며 두려움으로 몸부림치던 키 작은 내가? 

투표하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나는 아직 체,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에 불과한데 말이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치 뭔가 홀린 듯, 하얀 종이의 이름 석 자를 골랐다. 

붉은 성에서의 투표와는 전혀 다른 아주 민주주의적인 방법의 선거다. 

어쩌면 붉은 성에서 습득한 것들이 아직 내 몸에 배어 무언가를 내 의지대로 골라야 한다는 게, 마치 불법이라도 저지르는 듯한 느낌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내가 뽑는다고 되겠어?”


나는 쉬는 날마다 서점에 온다. 

이곳처럼 나를 평화롭게, 또는 초록색 이파리처럼 맑게 만들어 주는 곳은 없다. 

그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이곳은 외로울 틈이 없다. 

책을 소개하는 작은 화면에 찍힌 날짜를 보았다.


“2003년… 이라니”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어떤 추억을 곱씹을 만한 시간 없이 나는 5년을 닥치는 대로 일만 했다.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의 실력? 아니 나의 이력으로 당연히 꽤 괜찮은 곳에서 사무적인 일을 하기란, 뭐 다들 잘 알지 않을까 싶다. 나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 꽤 능력이 없는 자에 불과했다. 나는 스스로 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낮은 나의 자존감은 책임감을 덜 부릴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일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늘 전전긍긍, 짧은 시간에 한 곳, 또 한 곳, 그렇게 일을 해야만 했다. 

규칙적이지 못한 나의 휴일은 오늘 같은 날이 굉장히 행운이라며 남들처럼 이렇게 여유를 부려 보는 것이다.

 

나는 또, 『데미안』을 손에 들었다. 

서점에 올 때마다 커피 한 잔을 입속에 머금는 대신 나는 이것을 선택한다. 

선택의 갈래에 방황하지 않고 나는 늘 이것을 집었다. 

꼭 같은 출판사 것이어야만 한다. 

얇고 크지 않으며 내 손에 딱 잡힐 만한, 이것은 나의 공간에 몇 권이 머물러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마도 꽤 쌓여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이유, 나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단 하나의 보물이었다.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끝날 수없는 나의 성장통의 진통제라도 되는 냥, 나는 그렇게 데미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현아가 늦는 모양이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아주 좋은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아는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공부, 아르바이트,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자신이 열망했던 항공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현아 자신보다 더 기뻐했다. 

정말이지 너무 기뻐, 늘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전전긍긍하던, 현아가 떠올라 눈물을 찔끔거렸다. 

난 정말 기뻤다. 현아는 앞으로 세계 여러 곳을 누비고 다니는 아주 멋진 여성 승무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다. 지금도 지각을 일삼는 현아가, 취직을 한 후 지각을 한다면? 

그때는 내가 대신 가방을 놓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멀리서 뛰어오는 현아의 숨찬 입 모양이 헉헉거리며 다가왔다.


“헉 허어억, 아, 우재야 미안, 미안”


“그만 좀 미안해라 으이그”


현아는 숨을 몰아쉬며 계속 손부채질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이보다 마치 어제도 보았던 사이처럼, 긴 공백의 시간을 뛰어넘었다. 

서로의 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소속감 같은 감정에 난 또, 왜 울컥하며 지랄, 이라는 것을 행하는 건지 모르겠다. 

현아의 눈치는 마치 비행기와도 같아서 나는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현아를 느낀 후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이것 봐라? 뭐야, 너 울어?”


나는 당연히 아니,라는 답을 담백하게 뱉어 보았다. 

이런, 현아의 코끝도 발개져 있었다.


우리는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어떤 곳이든 발을 디딜 수 있는 자유로움에 처음에는 경이로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적응, 이라는 단어는 따분함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쉽게 문턱을 오를 수 있는 술집, 이라는 곳이 우리에게 이렇게 따분함과 자유를 줄 수 있는 곳이 되리라 누가 생각해 봤을까. 현아와 나는 가장 저렴한 안주를 시켰다. 

술잔에 술이 비워질 때마다 안주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오늘따라 쓴 술은 더 쓰디썼다.


나는 가방을 뒤지며 서점에서 구매한 작은 수첩을 현아에게 내밀었다. 


“뭐야?”


“수첩, 비행기 타고 딴 세상 가면 세상을 여기에 넣어, 잊지 않게...”


현아가 힝, 하는 살집 많은 입술을 내밀며 소리 냈다.


“더 좋은 거 사주고 싶었는데...”


현아가 나의 말을 잘랐다.


“됐다,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거 같잖아”


“흠, 아, 우린 왜 이렇게 눈물이 흔하냐?”


현아가 웃으니 나도 웃음이 났고 현아가 눈물을 찔끔거리니 나도 눈물을 찔끔거렸다.


청주 병이 비워져 갔고,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안주를 두고 한 병을 더 마실까, 말까, 고민했다. 

우리에게 돈, 이란 것은 이렇게 기쁨을 만끽하거나, 슬픔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값싸게 술을 사고 현아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긴 지하도를 걸어 좁은 골목을 맞닥뜨리면 촘촘히 붙어 있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다. 

현아의 자취방은 기숙사처럼 여성들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거실 주방을 중간에 두고 가장자리는 각자의 방문 앞에 노크, 또는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현아의 방문에는 방사능을 표시하는 팻말이 걸려 있었고 나는 비웃듯이 현아를 돌아보며 웃었다. 

현아 말로는 모든 사람이 문을 단단히 잠가 두고 살기는 하지만 혹시, 란 것 때문에 단단히 서로를 견제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붉은 성에서부터 성장해 온 과정을 보면 견제,라는 단어를 당연히 가장 먼저 몸에 익히며 자라오지 않았나, 란 생각에 조금은 씁쓸한 생각을 했다. 


왜냐면 어른이 되어도 견제,라는 단어는 조금 더 단단해져야 하는 행태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이 팍팍하고 건조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현아의 방에서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우리는 방문을 꼭, 꼭 걸어 잠그며 다녔다. 

일 분도 그 방문은 자유롭지 못했다.

현아의 침대는 비좁았다. 

긴 다리의 현아 몸을 덥기에도 모자란 이불을 우리는 칭칭 감고 어둠 속에서 끊임없는 이야기를 했다. 

현아는 내가 마치 가족이 없는 사람 같다, 는 말을 하며 나를 설득하려 애를 썼다. 


사실 나는 나의 세 번째 집과 왕래를 끊은 지 참 오래됐다.

가끔 엄마나 우정이 우성이와 짧은 안부의 전화 통화를 하긴 했지만, 나의 반항이 섞인 분노의 감정은 그곳을 갈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보지 않게 했다.


“그래도 가족이잖아, 엄마가 걱정 많이 하실 거야”


나는 비웃듯 말했다.


“그래야 엄마지, 그건 당연한 거야”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해. 그게 집이잖아”


“언제든지 돌아가면 돼...”


현아가 칫, 하는 소리를 냈다. 

문밖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희미하게 들리는 알 수 없는 음악 소리가 굳게 닫힌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커피숍에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작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11월 대입 시험이 치러지는 그날 나의 세 번째 집을 당당하게 나왔다. 

사실 난, 재시험을 보기 위해 붉은 성을 향했고 나의 담임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유리한 점을 이용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우리들이 늘 해 왔던 벼락치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고 또 풀었다. 

뭔가 열심히 하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결국 너덜너덜한 문제집을 나는 거의 줄줄 외고 있었다. 


특히 함께 살고 있던 가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내가 문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녀도, 문제집을 식탁 위에 잠시 올려 두어도 그 누구도 그것에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작년 아빠의 목소리를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우재 내년에 시험 다시 봐, 가까운 곳으로 가면 돼”


그렇다. 나는 그 말의 기억을 꺼내 놓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꼭 4년제가 아니어도 된다. 

단 일 년이라도 정희나 수진과 대학생 활을 함께 하고 싶었고 장학금을 탈 수 있는 자신도 있었다. 

또한 현아처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모자란 잠이 피곤하다, 는 느낌보다 살아있는 것 같다, 는 느낌을 느끼며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은 자신들이 했던 그 말속의 약속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너덜너덜한 문제집과 나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해 왔다. 

약속의 의미란, 서로가 지켜야 하는 건데 나 홀로의 의미였던 모양이다. 


결국, 난 대입 시험이 치러지는 전날 밤, 밤을 꼬박 새웠고 그만큼 또 울었다. 

너덜너덜한 문제집을 박박 찢어 버렸고, 수험표도 찢어 버렸다. 

엄마와 아빠에게 내가 시험을 치르고 비싼 원서들을 사서 대학에 등록하는 것이 공포였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 나는 알았다.


아니, 나는 알았지만 단 1 프로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 프로의 희망 또한 나 혼자만의 약속이었다. 


목적지는 없었고 짐은 가벼웠으며 나의 발은 쇠고랑을 찬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만약, 가족 중, 누군가가 나를 잡았거나 어디가? 

라는 말을 해 줬더라면 지금 나의 운명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애절하게 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하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이때 현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현아는 집, 이라는 곳이 거의 수면만 하는 곳으로 정해져 있었고 덕분에 나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마음 편히 그곳에 머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운명 같았다, 고 말할 수 있다.


현아의 자취방이 아니었다면 나는 대체 어디에서 떠돌고 있었을까, 또는 갈 곳 없는 두려움에 다시 세 번째 내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나의 자존심과 나의 작은 복수심과 원망이라는 감정에 배신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운명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나는 하루의 반을 구직하는 것에 힘을 썼다.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동안 나는 두 번째 짐을 쌌다. 

그리고 겁 많고 용기 없는 나,라는 자는 처음으로 타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때 나의 심장은 몇 개라도 되었던 것처럼 흥분했다. 

그 흥분은 거의 공포와 같아서 스스로 이겨 내기 위해 정말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나의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높은 건물의 한 층을 모두 점령한 곳, 이곳은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없는 게 없었다. 

처음 이런 곳을 본 나의 눈은 당연히 휘둥그레졌고 위압감에 또다시 심장이 녹아내렸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커피숍 사장을 만난 것처럼 나는 이번에도 아주 운이 좋았다. 

월세가 들어가는 집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들 속에 섞여 나는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사장 부부는 정말 가족보다 더 나를 챙겼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시골에서 상경한 계집아이에게 넓은 방 하나를 떡하니 내어 주다니 참,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꽤 넓은 레스토랑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기가 고되기도 했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겁 많고 용기 없는 내가 진짜 살아있음을 느꼈다. 늘 공포스러운 꿈을 꿨으며 발을 동동거리며 눈물을 찔끔하던 내가 아주 질 좋은 잠을 자기 시작했던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현아가 말했다.


“너무 피곤해서 꿈을 꿀 겨를도 없는 거지”


나는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용기 없는 내가 이제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건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나, 임을 확인하고 확인했다. 

낯선 타지에서 낯선 이들과 친구라는 관계를 맺으며 웃고 의논하고 먹고 또 일했다.


단순하지만 고된 이 일에 나는 점점 자신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더 넓은 곳을 스스로 찾아다녔다. 

조금 모인 이 귀한 돈이라는 것은 보증금이 작은 월세 집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으로 갖게 된 나만의 방, 나 혼자 쓸 수 있는 내 집.


나는 이제 서울 생활이 편해졌다. 

처음 펼쳐 본 지하철 노선도는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수학 공식 같았다. 

덕분에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수도 없이 탔지만, 그 경험은 지하철 종결자를 만들어 냈다. 서울에서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이제 없는 거다.


이 많은 일들을 조금 모자란 듯한 나, 라 늘 말하던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아,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그 생각은 나의 콧소리가 절로 나오게 했다.     


현아의 안전했던 첫 비행의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쯤 일본, 어딘가 머물고 있을 현아가 참 기특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하나둘, 직장이라는 또 다른 사회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정희는 중소기업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진은 호텔에 취직했다. 

해연은 아쉽게도 나와 연락이 닿질 않았다. 

간혹, 결혼한 친구 소식에 나는 놀랐다. 

아직 나,라는 존재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어찌 남자를 이해하며 함께 사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붉은 성의 우리들은 이십 대의 반을 넘어선 지금, 아주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진은 더 이상 내게 영혼을 맡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많은 일들을 마주하는 삶 속에 나의 자존심은 비집고 들어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떠올랐을까?

아주 가끔 오는 연락은 나의 갈증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우린 우정을 다짐하며 미래를 약속하지도 새끼손가락을 걸지도 않았다. 

이런 어른들의 생활을 내가 붉은 성에 있을 때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그들도 고달픈 삶을 사는 중이다, 라 애써 토닥이며 이해하려 노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정희는 달라진 게 없는 친구다. 

아주 묵묵하게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언제나 나는 너를 응원해,라는 메시지를 내 머릿속에 콕, 박아주는 친구다. 붉은 성에서부터 정희에겐 늘 어른 냄새가 났다. 

그때 우린 가끔 그게 가식은 아닐까, 란 의심을 품었고, 따라 할 수도 없던 정희의 이해심을 불신하기도 했다.

정희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가 어릴 적 늘 갈망하던 그 어른은 아니었을까,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가지 않은 발걸음으로 세 번째 집에 방문을 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막차를 타고 거의 밤을 느낄 무렵 도착했고,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서울행 차를 타고 올라왔다. 

엄마, 아빠와의 대화는 거의 없었고, 그들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나의 눈치를 본다, 고 생각하겠지만 그때 나는 그게 맞는 거다, 고 내심 생각했다. 만약 내게 어떤 말이라도 꺼냈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결과였을 것이다. 

사방이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고 더 이상 무서울 것 없이 미쳤었던 나는, 그렇게 또 미쳐버렸을 것이다.


오늘은, 내 생일을 핑계 삼아 며칠을 묶고 갈 작정이다. 

그렇다고 내 생일을 알은척,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건 아니다. 

생일을 핑계 삼아, 정희와 수진이 그리고 해연을 만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해가 뜨기 시작하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역시 집이란 곳은 나의 수면을 늘 방해한다. 

나의 예민한 코가 냄새를 맡더니 뇌의 반응이 눈을 뜨게 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여러 가지 음식 냄새다.


거실에서 우정의 곰살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정이는 언제부터 저렇게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걸까? 

내가 사라진 후부터였을까? 

뭐가 신이 났는지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다시 예전처럼 어깨가 움츠러들고 위축이 되었다. 


괜한 망설임에 거실로 나가는 방 문고리를 잡아당기기가 힘이 들었다.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또다시 왜 위축되고 마는 것일까, 내가 한심했다.


시간은 흘렀고 나의 아랫배는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터지고 말 것이다. 

그때 웃음을 흘려보내며 우정이 방문을 열었다. 

내 얼굴이 샛노랗게 변해 있었나?


“일어났냐?”


웬일로 우정이가 먼저 내게 아는 척이다. 

하긴 유일하게 가족 중, 일상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건네는 건 얘뿐이다. 

나는 우정의 말을 모른 척하며 열린 문 사이로 빠르게 뛰어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빵빵해진 배를 잡고 변기 위에 안착하자마자 나의 방광이 뻐근하다.

분명 거실 한중간에 커다란 상이 펼쳐있었다. 아빠도 앉아있었던 것 같다. 낌새가 이상하다.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서 방까지 들어갈지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몸을 씻었다. 

역시 이 집의 물은 뜨거운 여름에도 날카롭고 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주눅 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당당해야 한다. 

그들에게 달라진, 모두가 동경하는 대상은 아니지만 내 힘으로 자라난 나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쓸데없는 헛기침을 아빠처럼, 해 보았다.


“으흐음 으흠”


씩씩하게 화장실 문을 밀어내듯 걷어차듯 열었다. 

거실을 바라본 순간 나는 당연히 얼음이 되고 말았다. 

대학생 냄새가 나는 풋풋해 보이는 우성이, 그리고 어떤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는 검게 그을린, 고된 일에 절어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아빠, 미간 사이에 내 천, 자가 좀 더 깊게 파여진 엄마, 늘 내게 씩씩대며 고운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우정이가 동그란 상을 중간에 두고 둘러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상 위에 놓인 과일이 잔뜩 올라간 하얀색 케이크, 김이 모락모락 퍼지는 국그릇, 녹색과 갈색, 붉은색의 여러 가지 반찬,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우정이가 말했다.


“야, 김우재 생일 축하해, 얼른 와서 앉아”


우성이가 따라 거들었다.


“오! 누나 오랜만”


나는 순간, 저 모든 것을, 저 무거운 상을 뒤집어엎을까, 란 충동이 일었다. 

심장 박동이 자꾸 나를 채근했다. 

내게 이제 와서 저런 친절한 웃음을 보이다니, 나는 처절했고 슬펐다. 

그때 나의『 데미안』이 불쑥, 나와 내게 진정하라며 너의 칼날을 삼켜,라고 말했다.


내 발바닥에 접착제가 붙어 있었나,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아직도 복수, 원망, 미움,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이런 것으로 이런 가벼움으로 나를 다시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젖은 나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갑자기 엄마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떨어진 수건을 들어 나의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아, 내가 여덟 살이 되던 그때가 엄마의 이 따뜻한 손길이 멈춘 시기였던가, 나는 어색했고 이 단 한 번의 손길로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목이 뜻하지 않게 메어 왔다. 내 의지가 아닌 감정이다.


붙어 있던 나의 발이 엄마를 멀리하며 물러났다. 

엄마는 지지 않고 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엄마의 힘은 마치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은 것처럼 완강했다. 

다시 나의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불이었던가? 물이었던가? 

나는 뱉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는 수건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힘으로 나를 끌었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가장자리에 서서 앉아있는 그들을 살펴보았다.

엄마는 나의 일자로 세워진 뻣뻣한 몸을 앉히려 어깨를 눌렀다. 

참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세차게 엄마를 뿌리쳤다.


“그만, 그만해”


그리고 난, 소리도 없이 울었다. 

아무도 나를 말릴 수는 없었다. 

이런, 엄마의 얼굴이 붉어지며 나와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정이가 말했다.


“야, 그만하고 앉아, 성의를 생각해”


아빠가 우정이에게 그만하라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았다. 

난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닦으며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때 우성이가 초에 성냥을 들이밀었고, 그들은 손바닥을 치며 생일 노래를 불렀다. 

생각할수록 이 광경은 정말 공포영화 같았다. 


나는 못 이긴 척, 콧물과 함께 촛불을 껐고,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대체 미역국은 어떤 맛인지 불고기는 달았는지 짰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딱딱한 돌덩이 같은 나의 심장을 파헤쳐 보고 싶다. 

나도 잘 모르겠다면 파헤쳐 보는 게 방법이지 않은가, 과연 조금이라도 말랑거리는 부분을 찾을 수 있을까.


참, 내가 뽑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되는 일이 있긴 한가보다.          


사실, 난 서울 생활을 하면서 많은 옷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늘 직장에서는 유니폼을 입었고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돈을 탕진해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빠듯한 생활에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도 없었다. 


우정이는 희한한 버릇이 있다. 

한번 옷을 입고 그 옷이 맘에 들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낡아 보이면 그 옷은 찬밥 신세가 된다. 

다행히 그 옷은 내 차지가 되었고, 체격이 작은 나는 어떤 옷이라도 잘 맞았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붉은 성의 우리가 약속할 때마다 대면하는 이곳, 오늘도 나는 제일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이곳은 언제나 복잡하다. 

익숙해질 법도 한 이곳이 나는 여전히 낯설었고 기분이 나빴다. 


‘앗 수진이다’


꽤 멀리 보이는 수진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가 뭐래도 수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을 부렸고 귀, 만한 큰 링 귀걸이와 짙은 립스틱, 짧은 팬츠, 짧아진 머리칼이 꽤 멋져 보인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수진은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나의 친절한 손을 볼 때까지 등대처럼 계속 흔들었다. 

나의 손을 알아차린 수진이 귀걸이를 흔들거리며 뛰었다.


“우재야”


“왔어?”


수진이가 나의 두 팔을 잡으며 웃었다.


“아, 진짜 너무 오랜만이다, 언제 왔어?”


“응, 금방”


우리의 대화 속은 약간의 긴장과 어색함이 잔뜩 실려 있었다. 

나는 어서 빨리 정희가 와 주길, 바랬다. 정희와 해연이 함께 걸어왔다. 

키가 큰 해연이 긴 팔을 뻗으며 알은 채 한다.


“야, 얘들아”


그야말로 우리는 길거리에서 꽤 시끄럽게 상봉했다. 

우리들은 여전했다. 새침한 수진이 침착한 정희, 말도 빠르고 목소리도 큰 해연이, 우리는 이렇게 이 년 만에 다시 넷이 되었다. 넷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우리가 모일 수 있었던 계기는 이렇다.


정희는 단 한 번도 나의 생일을 잊은 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놀랍게도 정희는 그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난, 참 정희에게 반쪽짜리 친구는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늘 미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희는 이번 스물다섯 생일에는 꼭, 함께 보자는 이야기를 했고, 정희는 해연에게, 나는 수진에게 연락이 닿아 모일 수 있게 되었다.


꼭, 내 생일이어서 우리가 모인 것보다 정희의 말처럼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 우리는 꼭 만났어야 했다. 

오랜만에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마치 우리가 교복을 입고 멋을 부리기 위해 교복 치맛자락을 수선하거나 바지 단을 넓혀 입었을 때처럼, 우린, 이유 없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

정말 붉은 성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때 20대의 젊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술을 마시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의 볼이 조금씩 발그레해지고, 우리의 웃음은 더욱더 이유 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모든 긴장에서 나의 어깨를 늘어뜨리고 진짜 웃음을 뱉어 보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쉬운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나는 홀로 남아 그들이 가는 길을 보았다. 


수진이는 일찌감치 남자 친구의 차를 탔고, 해연과 정희는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정희가 버스에 오르며 나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생일 축하해, 우재야. 네 곁에는 늘 우리가 있었어”


나는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뭔

가 내가 잊고 살았던 기분이 들었다. 아니 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난 어두컴컴한 밤길을 계속 걸었다. 

나름 성인이라고 나의 걸음은 이제 조금 떳떳하다.


예전처럼 주눅 들지 않았고, 주눅이 들었다 해도 티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캄캄한 길도 이제 무섭지 않다. 

하느님을 소환하지 않아도 얼굴만 있는 귀신을 보거나 상상하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뛰지 않아도 된다. 

성인이 되고, 주민등록증을 받아 들고 난 후, 왜 난, 홀로 비뚤어지길 원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곁에 모든 사람은 티 나지 않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친절하지 못하다, 는 생각으로 나에 대한 사랑이 또는 애정이 부족하다고 나는 툴툴거리지만,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항상 나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 모른 척, 반항하고 분노했다. 

붙잡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던 것만큼 외면하지 말고 붙잡았어야 했다. 


내가 백발이 되고, 침대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성장 중일 것이다. 그렇게 붉은 성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때 잊고 있었던 나의 친구가, 나의 얼굴을 보고 말한다.


“우재야, 네 곁에는 늘 우리가 있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