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그림 신념 02화

작가의 부활

2 장

by 채한리 Chae Hanlee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감상자의 일이며, 작가는 감상자의 활동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__이런 생각에서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는

'작가의 죽음'을 선언했다.


한편, 밸드서리 (John Baldessari, 1931-2020)는 사진에서 폴락 (Jackson Pollock, 1912-1956)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감상자는 사진 속 '흰 형태'가 폴락임을 즉각 알아보았다. 이를 근거로

밸드서리는 감상자의 미적 체험 속에 작가가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작가의 죽음' 테제에 대한

반발이지만, 다소 맥이 빠진 저항으로 느껴진다.


'작가 (作家)'는 원래 '짓는 자'라는 뜻이다. 작가는 '우주의 신비를 엿보고,

그가 엿본 우주에 걸맞은 세계를 지어 인류에게 선사하는 자'였다. 그러나 작가는 이 위상을 잃었다.

그는 일상을 안락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으며, 우울한 마음을 치유하고

다정하게 보듬어줄 상품들을 제작하여 시장에 공급하는 공방 상인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작가의 죽음'을 다시 논한다면, 작가의 사인 (死因)은 바르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작품의 역정 (歷程)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에게는 예쁜 상품을 만들어내는

직업이 아닌, 천부적으로 주어진 소명 (召命)이 있을 터인데 이 소명을 외면하거나 망각한 것이

그의 사인이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 시대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깊디깊은 것'으로

자각된다고 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깊디깊은 것'으로 자각하는

감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가의 소명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호응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깊디깊은 것'임을 작품으로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자신의 소명을 깨달은 작가라면 작품의 행로에서 소외된다고 의기소침하지 않을 것이다.

밸드서리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의 생존증명을 감상자에게만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세계를 짓는 자'로서 스스로 부활할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밸드서리의 <흰 형태, 1984>이다.


<출처: 윤난지, 현대미술의 풍경 (한길아트, 2005), p.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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