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그림 신념 04화

자기 준거 (Self-Reference)

4 장

by 채한리 Chae Hanlee

'그림 속 무엇인가'가 작가에게 다시 그리라는 요청을 할 때가 있다.

이 요청에 따라 먼저 그린 그림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나는 '자기 준거 (Self-Reference)' 방식이라고 부른다.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는 기분 그대로

대상에 해석을 덧붙여가며 느낌을 따라 즉흥적으로 그리는 방식이다.


먼저 그린 그림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는 '그림 속 무엇인가'와 대화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진실'에 관한 대화다. 새로운 그림이 먼저 그린 그림 보다

'어떤 진실'에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더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그림 속 무엇인가'가

작업이 오류나 거짓으로 향하지 않도록 제어한다.


'자기 준거' 방식을 시행하는 작가는 그림이 '어떤 진실'로부터 멀리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는 '그림 속 무엇인가'에 집중하면서 '어떤 진실'을 향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안다.

비장함 속에서도 힘든 여정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그림 속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진실'에 대한 도전적인 사유(思惟)다. 이 사유가 그의 작업이 정당하다는 신념을 준다.


'자기 준거'는 자기 복제나 자기 표절과 다르다. 자기 복제나 자기 표절을 시행하는 작가의 마음은

비장하지 않다. 작업이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업은 사유보다는 숙련된 기능이나

기술에 의지해서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그린 그림이 원작'이라는 고정관념을 의심 없이

따르며, 새로운 그림은 먼저 그린 그림을 원작으로서 닮아야 한다는,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 원리를 따라 작업한다.


아래 첫 그림은 <The Smoker, Oil on Canvas, 53 x 65.1 cm, 2019>이다. 이 그림을 모델로

자기 준거 방식에 의해 <The Smoker, Oil on Canvas, 80.3 x 116.8 cm, 2022>를 그렸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그림 속 무엇인가'가 '어떤 진실'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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