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렇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제가 남편 놈 말대로 정말 쓸데없는 걱정 하는 거 아니죠?”
“아니죠, 아니죠. 어머니. 절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닙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아이인데요.”
“그렇죠?”
“네. 이제 무관심한 아빠나 의사와 함께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하시면 됩니다. 일단 피검사는 6개월에 한 번씩 하셔야 하고요. 무엇보다 병원 검사로 따님의 상태를 정확히 지켜보셔야 합니다. 주치의든 전문의든 의사들도 환자가 한둘이 아니고 바쁘니까 그냥 대충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관심과 관찰이 제일 중요합니다. 성조숙증은 서서히 진행되기도 하고 한순간에 수치가 팍 오르기도 하거든요.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기검진과 추적관찰이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의사도 더 이상 신용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의사라는 사람이 샴푸 바꾸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하고 앉아 있고. 3개월마다 뼈 사진, 즉 성장판 검사를 하시고 피검사는 6개월마다 꼬박꼬박 하시고요. 필요시에는 자궁 성숙도를 측정하는 자궁초음파 검사를 하시고 갑상선 검사도 하셔야 하는데, 이 두 가지 검사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검사들은 건강검진 차원에서라도 좋거든요.”
사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슬며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에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려 보였다. 사장은 마치 딸을 키워 본 것과 같이 여성의 자궁 성숙도나 자궁초음파 검사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나는 어떤 무언의 압력에 의해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찌그러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미소를 보더니 아줌마도 확신을 얻었는지 이제 사장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확신의 표현이었다.
사장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드디어 영업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성조숙증을 겪게 되면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합니다. 신체 변화나 이른 초경으로 아이가 느낄 당혹감을 생각해 보셨나요?”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또래 친구들과의 이질감이나 자존감 저하, 불안 등등 이런 일을 딸아이가 혼자 겪게 가만히 지켜만 보실 건가요?”
“절대, 절대로 안 되죠. 저희 금쪽같은 딸아이가 그런 일을 혼자 겪게 놔둘 수는 없어요. 저는 이제 진짜 어떻게 하면 될까요?”
“고객님은 이제부터 아무 걱정 하실 게 없으세요. 이제부터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이것부터 좀 읽어 보시고.”
“아니에요. 읽어 볼 것도 없어요. 우리 딸아이를 위해서인데.”
“일단 저희와 함께 똘아이, 어이 씨. 죄송합니다. 딸아이의 차도를 함께 지켜보고요. 가슴에 멍울이 생기고 아프다고 하면 그때 병원에 가는 걸로 합시다. 또 성조숙증으로 판정 난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때는 저희가 진단 비용이랑 호르몬 검사, 호르몬 억제 주사 비용까지 다 지원해 드립니다.”
“정말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과 비용 문제 같은 걸로 더 이상 싸우실 필요도 없으세요.”
“어휴, 그 인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사장님. 그깟 검사 비용이 얼마나 든다고.” “네. 그러니까 어머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딸아이나 잘 돌봐 주시면 됩니다.”
“와, 진짜 여기 오길 잘한 거 같아요.”
“네. 저희와 함께하는 한 어머님은 아무것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와, 정말 감사드려요.”
그 아줌마는 얼굴이 환해지더니 그제야 움켜잡은 사장의 손을 놓았다. 사장은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다시 아줌마의 손에 슬며시 집어 주었다. 아줌마는 손에 있는 물건을 보더니 거의 울먹일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사장은 말로만 샴푸를 바꾸라는 의사와는 달리 진짜 샴푸를 사은품으로 준 것이다. 이 아줌마는 눈물을 머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장을 우러러보았다. 그 아줌마의 손에는 비건 무슨, 네이처 무슨, 티트리라는 초록색의 천연 샴푸가 들려 있었다. 그 샴푸는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송진 냄새 같은 것이 확 올라왔다. 집 안에 두기만 해도 두 번 다시 정수리 냄새를 맡을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이놈의 사장, 아까는 샴푸 바꾸지 말라고 해 놓고 정수리 냄새 안 나게 하는 샴푸를 주는 건 또 뭐람. 아줌마는 샴푸 바꾸라고 했다고 의사를 욕했던 건 싹 잊어버리고 사장이 준 샴푸를 가슴에 꼭 안고 사무실을 나갔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