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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린 글'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

미완과 중단을 견디는 쓰기의 내공

by 윤채
그냥 때려치울까?



글을 쓰다 보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문장이 있다.



아무리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고, 단어 하나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날들...



심지어 며칠, 몇 주가 지나도 도저히 다시 열어보고 싶지 않은 글도 있다. 그런 글에는 실패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것만 같다. '이건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창 닫기 버튼을 눌러버린다.



하지만 작가라면 결국 그 구린 글로 돌아가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글이 ‘미완’이기 때문이다.



'미완'이라는 상태는 불완전한 결과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때 중요한 건, 창작자는 완성보다 회복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외로 안 구릴지도!)



글을 다시 열고, 미완의 문장을 똑바로 마주하는 행위 자체가 내공이다. 좋은 문장은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엔 못 쓴 글이어야만 나중에 더 나은 문장이 된다.




1. 미완의 글을 마주할 때, 뇌는 성장한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은 뇌가 불확실성과 오류 상황에서 더 많이 활성화된다고 설명한다.



"왜 잘 안 풀리지?"라는 인지 부조화 상태에 놓일 때, 뇌는 해석을 시도하고 패턴을 찾으려 하며 새로운 연결을 만든다. 이는 곧 창작 능력을 강화하는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으로 이어진다.



즉, 글이 막힐 때 멈추지 않고 다시 돌아가 마주하는 작가의 뇌는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훈련되고 있다. 글쓰기를 잘하게 되는 사람은 단순히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못 쓴 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238978fgsdl.jpg Despair_Bertha Wegmann (Danish, 1847–1926)



2. 중단된 글이 주는 심리적 통제감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는 자존감의 회복은 '자기 통제감의 회복'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쓰던 글을 중단한 상태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쉽다. "나는 왜 이것조차 못 끝내지?"라는 자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시 열어보고, 단 한 줄이라도 덧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통제권을 되찾기 시작한다. 완성 여부와 관계없이 ‘쓰고 있다’는 감각은 심리적 회복을 돕는다. 글쓰기가 회복을 주는 이유는, 내가 여전히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호를 나 자신에게 보내기 때문이다.




3. 창작자는 ‘돌아올 줄 아는 사람’

정신분석학자 융은 "창작은 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계속 마주하는 반복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반복은 고통스럽지만, 결국 ‘내가 돌아온다’는 자기 신뢰의 증거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관계의 유지다. 글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 때로는 흐릿하고 지저분한 초고라도 그것이 끊긴 문장이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믿는 태도, 그게 결국 작가를 만든다.



잘 써진 글만이 내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시 돌아온 글, 끝내 완성한 문장들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자국을 남길 때도 있다. 그렇기에 포기하고 싶을수록 다시 펜을 잡고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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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쓴 글에도, 나만의 복권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복권은, 돌아온 사람만이 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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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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